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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론

원자력안전위 독립성이 생명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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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주한규 서울대 원자핵공학과 교수

주한규 서울대 원자핵공학과 교수

지난해 말 탈원전 주창자인 강정민 박사가 원자력안전위원회(원안위) 위원장에 임명된 지 한 달 만에 사무처장이 사직했다. 이로써 2명의 원안위 상임위원(위원장·사무처장)이 모두 교체됐다. 전임자가 과오 때문에 문책당할 이유가 없는 상황에서 원안위에서 핵심적 역할을 하는 두 상임위원의 임의적 교체는 원안위 독립성을 심각하게 훼손한다.

원안위 상임위원 2명 전격 교체 #임의 교체는 윈안위 독립성 훼손 #미국도 규제 권한의 독립성 보장 #이념 아닌 과학 잣대로 판단해야

원안위(위원 9명)는 상임위원 2명과 비상임 위원 7명으로 구성된다. 비상임위원 4명은 국회가 추천하고 3년의 임기가 보장된다. 또 심의 안건에 대한 결정은 불가피한 경우를 제외하고 합의제로 하게 돼 있다. 원안위의 이런 구성과 운영방식은 원자력 안전 사안에 대한 독립적 결정이 가능하도록 하자는 데 그 취지가 있다. 만약 원자력 진흥을 추진하는 정권이 원안위에 조속한 원전 가동을 요구해도 그에 굴하지 말고 독립성을 유지하라는 취지이다. 물론 그 반대의 경우에도 해당한다.

원안위 독립성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원안위의 모태인 미국 원자력규제위원회(NRC)의 사례를 보면 확인할 수 있다. NRC는 인사나 예산 등에 관해 대통령과 연방의회로부터 어느 정도 통제를 받고 있지만 규제 권한 행사에 관해서는 독립성을 보장받고 있다. NRC가 행정부가 아닌 의회의 감독을 받는 점도 주목할 만한데, 이는 정권으로부터 독립성을 더 확고하게 보장하기 위한 것이다.

NRC는 상원의 인준을 거쳐 대통령이 임명한 5명의 위원으로 구성된다. 각 위원의 임기는 5년이고 매년 6월 말에 위원 한 명씩의 임기가 종료되도록 해 규제의 독립성과 연속성을 보장하게 돼 있다. 또한 위원회의 정치적 중립성을 보장하기 위해 5명의 위원 중 3명 이상을 동일한 정당에서 지명할 수 없도록 하고 있다.

대통령이 바뀌었다고 임기가 남은 위원장과 사무처장이 특별한 이유 없이 바뀐 한국은 미국 기준에서 보면 위원회의 정치적 독립성이 아예 없거나 심각하게 훼손된 경우라 할 수 있다. 참고로 크리스틴 스비니키 현 NRC 위원장은 2008년 3월에 유고로 물러난 전임자의 잔여 임기를 이어받아 위원이 됐다. 그 후에 정권이 바뀌었지만 3회 연임해 2022년 6월 말까지 임기를 보장받았다.

시론 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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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독립된 환경에서 NRC는 미국에서 가동 중인 99기의 원전 중 88기에 대해 60년 계속 운전 승인을 내줬고, 그중 44기는 40년을 넘겨 정상운전 중이다. 특기할 사실은 이렇게 장기 운영 중인 미국 원전의 이용률이 3년 연속 90%를 넘기도록 안정적으로 가동 중이라는 사실이다. 이는 NRC가 합리적으로 원전 운영을 감독하고 있다는 사실을 방증한다.

사실 신임 강 위원장은 원자력 안전 전문가라는 이미지보다 핵 비확산 전문가이자 탈원전 주창자로서의 이미지가 강하다. 그는 지난 몇 년간 고리원전 사용후핵연료 저장조의 잠재적 위험을 지나치게 부각해왔고, 탈원전이 국가안보에 이롭다고 주장해 왔다. 심지어 원전 수출에도 부정적인 의견으로 일관해왔다. 위원장으로 임명된 뒤에는 영화 판도라를 보고 “탈원전이 허무맹랑하다고 말하는 자체가 허무맹랑하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아랍에미리트는 한국 원전 4기를 수입했고, 영국과 사우디아라비아가 한국 원전 수입을 희망하는 상황을 고려하면 강 위원장의 주장은 아이러니하다. 탈원전론자에게 원자력 안전규제를 맡기면 그 앞날이 뻔히 예상된다. 안전규제 강화란 명분으로 원전 가동을 장기간 멈출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정부가 지난해 12월 발표한 제8차 전력수급 기본계획에 따르면 월성 1호기의 가동정지가 예정돼 있다. 현재 원안위의 월성 1호기 계속운전 허가에 대한 항소가 진행 중인 상황에서 신임 위원장이 정부의 지시에 순응해 항소를 포기할 우려도 있다. 만일 이런 조치가 실행된다면 40년간 아무런 사고가 없도록 한국 원전의 안전규제를 성공적으로 수행해온 원자력 규제기관이 자신을 부정하고 신뢰를 허물어뜨리는 결과가 초래될 것이다.

기술이 아니라 이념에 기반을 둔 원자력 안전규제는 원전 종사자들의 자긍심과 책임감을 떨어뜨리게 해 원전의 안전성을 오히려 해칠 수 있다. 원안위는 우리 사회가 수용할 수 있는 범위에서 원자력을 안전하게 이용하는지를 판단하는 최고의 기술적 행정기구이다.

오로지 과학과 기술의 잣대로 봐야 할 안전규제를 정무적이거나 정책적으로 판단해서는 곤란하다. 어떤 경우에도 원안위를 탈원전 정책의 이행 수단으로 전락시켜서는 안 된다.

주한규 서울대 원자핵공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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