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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 인생샷] 예멘 가정집 초대 받고 남자만 본 까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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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년 개띠, 내 인생의 다섯 컷(37) 고상근

한국 사회에서 '58년 개띠'는 특별합니다. 신생아 100만명 시대 태어나 늘 경쟁에 내몰렸습니다. 고교 입시 때 평준화, 30살에 88올림픽, 40살에 외환위기, 50살에 글로벌 금융위기까지. 고도성장의 단맛도 봤지만, 저성장의 함정도 헤쳐왔습니다. 이제 환갑을 맞아 인생 2막을 여는 58년 개띠. 그들의 오래된 사진첩 속 빛바랜 인생 샷을 통해 우리가 걸어온 길을 되짚어봅니다.

경강역 철로에서 친구와 함께 찍은 사진이다. 왼쪽에서 세 번째가 본인이다. 나는 춘천 인근의 경강(지금의 ‘굴봉산’역)이라는 시골 마을에서 줄곧 자랐다. 고향은 충남 천안의 석교(현 경부고속도로 휴게소 중 하나인 망향휴게소 근방)이나 철도공무원인 아버지의 전근으로 내가 예닐곱 살 때쯤 이곳으로 이사 왔다.

경기도와 강원도의 경계라 하여 경기도의 ‘경’자와 강원도의 ‘강’자를 따 ‘경강’이라는 역명이 지어졌다는 이곳 서천(동네명은 서천이다)은 말만 기차가 지나갈 뿐이지 온통 산과 들로 뒤덮여 문명의 이기라고는 전혀 누릴 수가 없는 농촌 마을이었다. 지금이야 전철도 지나가고 개발도 되어 많이 발전했지만 내가 고등학교 다닐 때만 해도 전화는 물론, 수도, 전기조차 없어 등잔과 호롱불에 공부해야 했다.

땅 한배기 제대로 없는 외지 낯선 땅에서 철도 노동자나 다름없는 아버지의 박봉에 하루하루 풀칠하기도 어려운 터라 어머니는 가계 살림에 조금이나마 형편이 나아질까 싶어 매일 이곳 산골 마을에서 나는 각종 채소와 농산물을 사온 후 서울 경동시장에 갖다 파셨다.

연일 원지로까지 가서 사온 물건들을 다음날 새벽 일찍 기차를 타고 서울에 갔다 팔고 돌아오시는 어머니는 생에 대한 집착력도 강했지만, 불행하게도 아버지가 내가 고등학교 3학년, 예비고사 보기 한 달이 채 남지 않는 1976년 10월, 갑자기 돌아가시고 나서부터는 이마저도 할 수 없어 우리 집은 완전 수입이 끊긴 상태에서 근근이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나는 기구한 환경만을 탓할 수는 없기에 별 내색하지 않고 열심히 공부, 중학교, 고등학교 6년여간을 기차통학을 하면서도 내내 상위권을 유지, 우등생으로 졸업했다.

1978년 3월, 언감생심 사립학교는 꿈도 꾸지 못할 형편이었지만 합격만 하면 어떻게든 자력으로 대학교를 졸업하겠노라 어머님을 설득했고, 나는 원하는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했다. 나는 4년 내내, 아니 약 27개월의 군대생활을 포함해 7년 가까운 대학생활을 아르바이트와 가정교사로 학비를 보태고 또 다른 한편으로 장학금을 받으면서 가까스로 대학을 졸업했다.

대학생활 중 마음 한구석에는 거센 민주화 운동과 독재에 항거하는 학우들의 데모를 지켜보면서 가족의 생계라는 절박한 현실 앞에서 그 대열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없다는 자괴감에 혼란스럽기도 했다.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과 데모로 잠시도 영일이 없고 장학금과 과외 수입만으로는 학비를 충당할 수 없어 나는 2학년을 마치고 군대에 갔다. 운이 좋았는지, 나는 서울 금천구 독산동에 위치한 공병부대로 전속되었고 보직 또한 대대 행정과 사병계로 배치받아 비교적 수월하게 군대생활을 했다. 사진은 부대 인근 지역으로 야외훈련 중 점심을 먹는 모습이다. 뒷줄 왼쪽 첫 번째가 나다.

1984년 11월, 나는 대학교를 졸업하기 약 4개월 전 당시 국내 최대 해운회사인 범양상선에 조기 취직을 했다. 당시는 졸업하기 전 취업이 허용되는 터라 친구마다 여건과 상황, 능력에 따라 취업 시기가 조금씩 달랐다. 대학원을 진학하여 계속 공부를 하고 싶었지만, 가계형편상 빨리 취직할 수밖에 없어 대학교 생활을 끝으로 학업을 마쳤다.

당초 외교관이 되어 처칠과 같은 위대한 정치가(Statesman)가 되고자 정치외교학과를 지원했지만, 외무고시의 과정이 필요했고 행여 제때 합격이 안 되어 불가불 기나긴 여정을 밟아야 하는 경우, 더욱 어머니께 부담을 드릴 것 같아 빨리 취직하는 것이 순리였고 능사였다. 대신 비즈니스 일선에서 회사를 대표하고 능력을 발휘해 작게는 회사와 개인, 크게는 국가발전에 기여하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라 자위하고 회사생활에 만족했다.

다행히 해외업무부서로 배치되어 세계사람들과 교류할 수 있는 시간이 많았다. 한참 때는 전시회 참가, 비즈니스 상담 등의 이유로 한 달에 거의 보름을 출장을 가기도 했고 그렇지 않을 때는 외국의 바이어가 내사, 제품 판매 및 해외 네트워크 구축을 위해 협의를 벌이기도 했다.

미국은 물론, 일본, 인도, 싱가포르 등 동남아시아에서부터 그리스, 터키, 영국, 독일 등 유럽지역, 더하여 UAE, 시리아, 예멘 등 중동국가까지 출장을 갔다. 줄잡아 25여 개 국은 족히 다녀온 것 같다. 80~90년대는 많은 나라가 특별히 중동지역은 우리나라 인지도가 낮아 한국이 어디에 있는지조차도 모르는 곳이 많아 현지 바이어와의 상담 시 먼저 세계지도를 펼쳐 놓고 위치를 알려 주는 것으로 대화를 시작했던 것이 기억에 남는다.

사진은 예멘 출장 중 현지 바이어 집으로 초대받아 직원들과 함께 찍은 사진이다. 사진 가운데가 필자다. 참고로 이슬람국가 중 예멘은 현지 집으로 초대받아도 부인을 볼 수가 없다.

나는 중학교 은사님의 소개로 지금의 아내를 만났다. 천성적으로 노래와 그림 그리기에 소질이 없어 이왕이면 ‘예술’하는 사람으로 소개해 주시면 좋겠다고 말씀드렸더니 선생님께서 음악을 전공하는 사람을 중매, 지금의 나의 반려자를 만났다. 사진은 1987년 4월 결혼식 후 제주도로 신혼여행을 떠나기에 앞서 춘천 공지천 인근에서 한 컷 찍었다.

이제 내 나이 60을 갓 넘었다. 작금 100세 시대를 운운하지만 어쩌면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짧은지도 모른다. 올해로 결혼한 지 만 30년이 되는 나도 동년배 다수가 그렇듯이 녹록지 않은 생활을 영위해 온 것도 사실이다. 더하면 더했지 그 세기에 있어 약하지가 않다.

그렇다고 심약하게 환경에 굴복하고 세상을 원망하지 않았다. 그간의 과정이야 어떻건 집사람과 작년에 결혼시킨 큰아들 및 중국 북경에서 전액 장학생으로 대학원을 다니는 막내아들을 둔 가장으로서 즐겁게 살고 있다.

나는 업무 속성상 PC를 많이 사용하는 편이다. 지금부터 10년 전만 하더라도 운동도 좋아하지 않고 대외 활동도 그리 활발하지 않은 성격이라 특별히 산행은 관심조차 두지 않았었다. 더욱이 내가 크고 자라 생활의 터전이 되었던 시골 마을이 온통 산투성이라 딱히 등산이라 할 것도 없었고 산을 찾는 것 자체를 호사스럽게 생각해 온 터였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불쑥 찾아온 어깨 통증으로 몇 년간 고생했다. 온갖 유명하다는 정형외과와 한의원을 찾아다니며 갖은 치료를 받았지만, 별반 효용이 없었고 차도가 나아지지 않았다. 그때 아는 지인의 소개로 산을 다니면서 효험을 보기 시작했다. 물론 나름대로 요가도 병행하면서 치료에 전념한 것도 부정하지 못한다.

이제 나는 매주 주 1회 산행하는 것이 일상화됐다. 5년 전에는 고교산악회에도 가입하여 총무를 지냈고 그때 적은 산행안내문과 후기를 엮어 문집, ‘내 마음의 청산이 거기에 있거늘’을 출간하기도 했다. 앞으로도 틈틈이 산행하면서 건강과 심신을 단련하면서 특별히 여건이 된다면 향후 5년 이내에 나의 지나온 발자취를 더듬어 보는 자서전도 집필할 계획이다. 사진은 2015년 북한산 위문으로 올라가는 계단에서 찍은 사진이다.

돌이켜보면, 우리 나이 어디 녹록지 않은 삶을 살지 않은 자 있겠느냐마는 나는 유난히 윤택하지도 달리 문명의 이기도 누리지 못한 것 같다. 어찌 보면 불운한 삶을 살았는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부모님에 대한 심대한 원망도, 사회에 대한 원성도 그리 크게 갖지 않았다.

가난과 빈곤의 연속 선상에도 새로운 삶을 살아가기 위한 꿈을 잃지 않았고 굴곡진 사회의 일그러진 모습을 보고서도 좌절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의지를 굳건히 세우는데 반면교사로 삼았다.

작금 헬조선을 외치며 살아가는 젊은 세대들은 그들의 의지에 상관없이 이 사회가 주는 역경과 시련이 적지 않게 원망스럽겠지만 생각해 보면, 우리 58년 개띠도 그에 못지않게 자력으로 극복할 수 없는 외적인 요인도 많지 않았을까 싶다. 세상은, 삶은 굳건한 의지와 강인한 집념으로 목표를 추구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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