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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김여정의 글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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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이현상 논설위원

이현상 논설위원

“글씨는 뇌의 흔적이다.” 19세기 말 독일의 생리학자 빌헬름 프라이어의 말이다. 필적은 대뇌의 지배를 받는 생리작용이기 때문에 발가락이나 입으로 글씨를 써도 손글씨와 특징이 같다는 주장이다. 글씨를 보고 성격이나 심리 상태를 추론하는 학문이 필적학(graphology)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생소한 분야지만, 서양에서는 17세기부터 관련 문헌이 등장할 정도로 역사가 깊다.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의 특사 자격으로 청와대를 예방한 여동생 김여정의 방명록 글씨가 화제다. 오른쪽 45도 방향으로 올라간 기울임체에 ㅍ, ㅅ, ㄷ 등의 첫 글자가 큰 것이 특징이다. 한 필적 전문가는 “평범함에 만족하지 못하고 남들 위에 서 있다는 심리를 표출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긍정적이고 낙천적이며 목표 지향적인 성격도 엿볼 수 있다는 설명과 함께.

김여정의 글씨는 할아버지, 아버지, 오빠의 글씨와 느낌이 비슷하다. 유전자의 영향일 수도 있지만, 학습의 결과일 가능성이 더 크다. 2004년 북한 인터넷 매체 ‘조선인포뱅크’는 김정일 국방위원장 글씨의 ‘비밀’을 공개했다. 부친이 쓴 글씨를 유리판 밑에 깔아놓고 따라 쓰는 노력 끝에 부친의 ‘태양서체’를 익히는 데 성공했다는 것이다. 안으로 흘리는 김 위원장의 본래 서체가 아버지처럼 밖으로 흘리는 서체로 바뀌었다고 한다. 10년 후인 2014년, 북한 월간지 ‘조선예술’이 이번에는 김정은 서체의 비밀을 밝혔다. “글을 배우기 시작할 때부터 많은 품을 들여 장군님(김정일)의 ‘백두산 서체’를 배웠다.” ‘불면불휴의 혁명 영도’에 여념 없는 아버지의 집필 사업을 도우려는 효심에서였다는 것이다. 김정은이 핵실험이나 장거리 로켓 발사 후 친필 명령서를 공개하는 것도 ‘대를 이은 혁명 필체’를 부각하려는 의도로 읽힌다. 용지 양식을 무시하고 우상향으로 올라간 서체에서 자기 과시와 안하무인의 심리가 엿보인다는 평이 나왔다.

그러나 필적과 성격이 곧장 연결되지 않는다는 반론도 만만찮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의 손글씨는 그의 터프한 이미지와는 달리 의외로 동글동글 귀여운 면모가 있다. 빈정거림의 뉘앙스이긴 하지만 그의 글씨를 본뜬 글꼴이 개발됐을 정도다. 김정은 글씨의 중성과 종성이 끊어지지 않고 이어져 있는 점에 주목해 그의 내면이 뜻밖에 부드러울지 모른다는 전문가도 있다. 혹시 아는가. 이런 의외의 면모가 발휘돼 한반도를 둘러싼 긴장이 눈 녹듯 풀릴지. 김정은의 명령서를 다시 보고 싶지 않을 뿐이다.

이현상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