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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존재한다는 이유만으로도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570호 34면

기대
국어사전

期待 어떤 일이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라면서 기다림

이윤정의 공감 대백과 사전

그 여자의 사전
그 안에 자기의 이런저런 욕망들을 잔뜩 부어 넣고 결국엔 실망으로 귀결될 때쯤에서야 그것이 과도한 것이었음을 깨닫게 되는 것



고양이야 고양이야 너는 어쩜 이렇게 예쁘고 귀엽니. 매일 아침 그 여자는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런 눈길로 고양이를 쓰다듬으며 찬사를 남발한다. 사실 그 여자의 고양이는 별로 예쁜 편이 아니다. TV나 영화, 인스타그램에 흔히 등장하는 동그랗고 보석처럼 빛나는 눈을 애처롭게 반짝이거나 풍성한 털을 자랑하지도 않는다. 말이 좋아 ‘코리안 숏헤어’지, 품종 이름도 딱히 없는 그냥 한국 토종 길고양이다.

그러나 객관적으로 예쁘지 않다는 사실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내 눈엔 눈꼽을 주렁주렁 단 쭉 찢어진 눈으로 쳐다봐주기만 해도, 앞발로 얼굴만 슬쩍 닦아도, 밥만 먹고 잘 싸주기만 해도 귀여워서 반할 지경이다. 매일 매일 이렇게 예쁘기만 한 존재가 내 옆에 있다니, 이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그러고 보니 왠지 이 익숙한 이 감정은, 맞다. 벌써 이십 여년 전 아이를 품에 안았을 때 아마 그랬었지. 하필 그 순간 늦잠 자고 나온 아들의 흐릿한 눈동자와 마주친다. 여자는 갑자기 눈초리를 매섭게 바꾸며 쯧쯧 혀를 찬다. 고양이는 이렇게 예쁜데 너는.

여자의 평정심은 그리 오래가지 않는다. TV나 유튜브를 보면 왜 그렇게 재주꾼 고양이와 천재견들이 많은지. 나도 질 수 없다며 고양이에게 다가가 “오른손! 왼손!”을 외쳐본다. 멀뚱멀뚱 쳐다보기만 할 뿐 앞발은 꿈쩍도 안 한다. 이번엔 공을 한번 구석으로 던져본다. 날쌔게 달려가는 듯하더니…그냥 맨입으로 돌아오는 녀석. “공을 물고 돌아오란 말이야!”

그러나 두 번 세 번을 던져도 열심히 달려가서는 다시 제자리다. 천재견을 훈련시키는 비법이라며 개주인이 TV에서 보여준 것처럼 구석에 처박힌 공을 내 입에 물고 고양이 앞에서 아무리 시범을 보여줘도 소용이 없다. 이제 신경질이 난다. “남의 집 고양이들은 다 하는데 왜 못해!” 옆에서 아들이 큭큭 웃는다. “아니 나한테도 평생 ‘엄마 친구 아들들은 말이야’라며 그렇게 괴롭히더니….”

머쓱해진 엄마 겸 고양이 집사, 잠시 반성 모드로 접어든다. 그러게. 왜 그렇게 바라는 게 많았지. 고양이에게나 아들에게나. 엄마라고 입만 한번 떼어주더라도 감격하고 눈물이 핑 돌았던 때는 다 어디 가고 글자를 떼고 나면 알파벳을 외우길 기대하고 영어를 잘하고 나면 수학도 더 잘해야 한다고 닦달하고. 입시가 끝나니 너는 왜 성공의 의지도 미래의 계획도 없느냐며 또 기대했다 실망하고.

분명 나에게든 남에게든 혹은 고양이에게든 기대를 가져야 동기부여가 되고 그래야 어떤 성취든 이룰 텐데. 하지만 ‘기대’라는 이름으로 내 욕망을 잔뜩 얹어놓고 적절한 경계선을 넘지 않는 일은 너무 어렵다. 그 결과로 받아들여야 할 실망감 역시 과도한 기대가 문제였는지 아니면 의지의 부족 때문이 아닌가 헷갈리게도 되고.

다시 반려동물 카페에 들어가니 이번엔 천재 아닌 고양이들의 이야기가 눈에 들어온다. 아파서 눈도 못 뜨는 고양이, 다리 한쪽을 사고로 잃은 고양이, 강추위에 길에서 떨고 있는 고양이….

그래, 공을 물어오지 않아도 좋다. 오른손 왼손을 내밀지 못해도 좋다. 어차피 나보다는 먼저 세상을 떠나야할 고양이와의 시간을 아끼며 즐겁게 보내야지. 훌쩍 내 무릎 위로 뛰어오르거나 야옹거리면서 반기는 일 따위는 앞으로도 없겠지만.

마침 어슬렁어슬렁 외출하는 아들의 뒷꼭지에 대고 또 잔소리가 하고 싶어 입이 근질거렸지만, 며칠 정도는 참기로 했다. 고양이든 아들이든 존재 자체만으로도 기쁨으로 줄 수 있었던 시간을 되새기며 감사해야지. 언제 또 변할지 모르겠지만 일단 그날은 그렇게 착한 마음으로 마무리했다.

이윤정 : 칼럼니스트. 사소하고 소심한 잡념에 시달리며 중년의 나이에도 영원히 철들지 않을 것 같아 고민인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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