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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 인생샷] 포르투갈 취재 갔다 만난 에우제비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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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년 개띠, 내 인생의 다섯컷 (34) 김학수

한국 사회에서 '58년 개띠'는 특별합니다. 신생아 100만명 시대 태어나 늘 경쟁에 내몰렸습니다. 고교 입시 때 평준화, 30살에 88올림픽, 40살에 외환위기, 50살에 글로벌 금융위기까지. 고도성장의 단맛도 봤지만, 저성장의 함정도 헤쳐왔습니다. 이제 환갑을 맞아 인생 2막을 여는 58년 개띠. 그들의 오래된 사진첩 속 빛바랜 인생 샷을 통해 우리가 걸어온 길을 되짚어봅니다.

내가 태어나기 3년 전 어머니(왼쪽)가 명동성당에서 견진성사를 마치고 우리나라 최초의 대주교인 노기남 전 서울대교구장과 함께 찍은 기념사진이다. 뒤에 서 있는 이가 아버지이고, 고개를 푹 숙인 채 안겨있는 아기는 나보다 4살 위인 첫째 누나이다. 어머니 바로 뒤는 친할머니이다.

모태 신앙은 이미 할머니 때부터 시작됐다. 서울 사대문 안 중구 인현동 주택가(현재 중구청 자리)에서 할머니, 큰 아버지네 등과 함께 대가족을 이루며 살았던 내 어릴 적, 집에서도 미사를 알리는 명동성당 종소리가 ‘땡, 땡, 땡’ 하며 들렸다.

가톨릭 친화적인 집안 분위기와 명동성당이 지리적으로 가까이 있었기 때문에 나는 일찍이 유아세례를 받았고, 복사(성당 미사 때 사제를 돕는 아이)생활도 했었다. 집에서 명동성당까지 가는 길에는 사람으로 복잡 대던 인현 시장과 횡단보도, 신호등이 있었으나 잘도 찾아다녔다.

길눈이 밝은 것은 성당 가는 길을 통해 개띠의 ‘야성’을 스스로 터득한 것이 아니었을까. 신생아 100만명 시대를 열었던 58년 개띠 가운데 서울 사대문 안에서 태어난 이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며 게다가 모태신앙은 아마도 더 적을 것이다.

1975년 서울공고 2학년 때 김포공항에서 같은 금속과 친구와 함께 선생님들과 찍은 사진이다. 혼자 교련복 입은 이가 나다.

당시만 해도 공항에 나간다는 것은 아주 이례적인 일이다. 지금처럼 외국 여행하는 것이 자유롭지 않고, 유학이나 회사업무 등 특별히 허가받은 이들만 가능하던 시절이었다. 담임선생님(가운데 환하게 웃고 있는 고수머리 분)은 우수교사로 선발돼 뉴질랜드로 유학을 가게 돼 반 친구 대부분이 환송하기 위해 공항을 찾았다.

나는 그 시절 집안 형편이 어려워 첫 평준화가 시작된 인문계 고교로 가지 않고 가난한 인재들이 모이는 서울공고 금속 과에 좋은 성적으로 장학금을 받고 입학했다. 반 친구들은 졸업 후 조국 근대화의 기수로 중동 건설 현장, 제철과 석유화학 회사 등에 취업했고, 나를 비롯한 일부는 대학에 진학했다.

내 친구들은 나를 포함 박사 3명, 의사 1명, 상장회사 CEO 등이 배출되는 등 인재들이 많았다. 올해 회갑을 맞아 기념 문집과 별도의 기념 모임을 가질 예정이다. 아쉽게도 60명 중 3명의 친구가 세상을 떠나 영영 동창 모임에는 참석할 수가 없다.

1983년 ROTC 장교로 군 복무할 때의 사진이다. 3공수여단에서 중위로 근무했던 때로 야간 산악침투훈련을 하기 위해 성남비행장에서 일명 ‘점프복’을 입고 수송기를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다.

혈기 왕성한 대학 시절, 역사학도로서 1979년 10·26과 12·12, 1980년 5·18 등 격동의 시기를 보낸 나는 시대의 고민을 안고 ROTC 장교로 임관, “배운 사람이 더 많은 고생을 해야 한다”는 각오로 공수부대에 지원했다.

강원도 깊은 두메산골, 밤하늘에서 쏟아지는 별빛과 달빛을 보며 산길을 걷고, 뜨거운 동해안 백사장에서 수영훈련을 받으며 비지땀을 쏟던 기억은 아직도 잊을 수 없다. 2년 4개월간 근무하면서 체력적, 정신적으로 많은 경험을 하며 평생 전우들을 만날 수 있었다.

군에서 만난 선후배들과 지금까지 자주 모임을 갖고 좋은 전우애를 이어 나간다. 별 네 개 대장 출신부터 선임하사 출신까지 격의 없이 ‘형님’, ‘아우’하며 전우를 만날 때마다 기쁨과 설렘으로 가슴에 뜨거운 기운이 일어난다.

1991년 6월 포르투갈 세계청소년축구선수권대회에서 나의 어릴 적 ‘스포츠 영웅’ 에우제비오와 함께 했다. 이 무렵 스포츠 기자로 남북 단일팀 취재를 위해 포르투갈로 날아갔는데, 우리 시대의 최고 축구 영웅 에우제비오(당시는 영어식 발음으로 유세비오로 부름. 나중에 현지 발음으로 정정됨)는 대회 스폰서인 코카콜라 측 홍보대사로 활동하고 있었다.

에우제비오는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 준준결승에서 북한을 5-3으로 제압할 때, 해트트릭을 기록하며 월드컵 득점왕으로 한국팬들에게 잘 알려져 있었다.

벼락슈팅이 일품인 그는 포르투갈 식민지였던 모잠비크 출신으로 천부적인 축구 소질을 인정받아 포르투갈 명문 벤피카 구단에서 활약했는데, 초등학교 6학년 때인 1970년 소속구단과 함께 한국을 방문해 동대문운동장에서 한국대표팀과 경기를 가졌다.

당시 한국대표 백호 팀의 변호영 골키퍼는 미드필드 부근에서 쏜 대포알 같은 그의 슈팅을 접하곤, “쇳덩이에 맞는 기분이었다”고 말해 ‘흑표범’ 별명의 진가를 입증하기도 했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잉글랜드 월드컵 8강에 올랐던 북한 보다 뒤진 한국 축구 실력을 키우기 위해 국제대회인 박 대통령 배 축구대회를 창설하고 에우제비오, 펠레 등이 소속한 세계 유명 프로팀을 초청하기도 했다.

2015년 11월 28일 강남의 한 음식점에서 고교은사님과 사모님을 모시고 고교 동창 부부 동반으로 선생님의 고희를 축하하는 모임을 가졌는데, 동창 부인들을 중심으로 기념사진을 찍었다.

이날 행사장에는  선생님의 캐리커처가 그려진 고희연을 축하하는 플래카드가 전면에 걸렸고, 그 아래 헤드테이블에는 축하케이크와 아름다운 꽃바구니, 작은 캐리커처 사진이 놓여있었다. 황금 감사패에는 ‘최고의 스승님께 드립니다. 마흔 한 해 전 이른 봄’으로 시작하는 감사의 글을 실었다.

선생님은 감격해 “기업에서도 좋은 것을 받아 보았지만, 여러분들의 숭고한 뜻이 담긴 이거야말로 최고로 좋은 것”이라고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그날 선생님 존함의 표기가 잘못되기도 했는데, 한자 이름 성병호(成炳鎬)를 확인할 수 있었다. 이룰 성, 밝을 병자에 호는 빛이 난다는 뜻이다.

선생님은 고교 때 일찍이 해외로 유학을 나가 귀국 후, 현대자동차 부사장까지 역임하고 70세가 넘은 현재도 독일 기업을 상대로 한· 독 간 사업을 활발히 하고 있다. 나도 제2의 삶을 선생님처럼 남부끄럽지 않게 살 각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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