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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보수는 철학이 없고 진보는 정책이 없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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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이철호
이철호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이철호 논설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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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의 국정지지율이 60% 선에서 오르내리고 있다. 최근 두 달 사이 10%포인트 주저앉았다. 여론조사 기관들은 그 원인으로 정책 혼선과 과거 집착을 꼽는다. 갤럽·리얼미터·리서치뷰 등은 “최저임금, 암호화폐, 평창올림픽 남북 단일팀 논란 등이 악영향을 미쳤다”고 분석한다. 2009년 박세일 전 서울대 교수는 인터뷰에서 “한국의 보수는 철학이 없고 진보는 정책이 없다”고 갈파한 적이 있다. “(김대중·노무현 정권에) 정서적인 진보는 많지만 정책적 진보가 약했다”고 진단했다. 갈수록 적폐청산에 부정적 반응도 고개를 들고 있다.

노무현보다 문재인 정부 더 이념적 #보수·진보의 혐오와 경멸 판치고 #분노조절 장애에 시달리는 한국 #과거와 현재 싸우면 미래 잃는다

과연 문재인 정부는 노무현 시즌2일까? 정책적 측면에서는 결코 아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운동권 출신 보좌관들에게 ‘나를 역사 발전의 도구로 써 달라’고 했다. 하지만 대통령이 된 뒤에는 실사구시적 입장으로 돌아섰다. 조흥은행과 코레일의 귀족노조 파업에 경찰력을 투입했다. 스크린 쿼터제도 폐지하고 한·미 FTA(자유무역협정) 협상을 시작했다. 노무현은 “계급장 떼고 붙어보자”는 김근태 의원의 반발을 외면한 채 대선 공약이던 아파트 분양원가 공개도 접었다.

문재인 정권은 정반대다. 집권 이후 줄곧 소득주도 성장, 최저임금, 탈원전, 사드 재검토, 일본군 위안부 재협상 등을 밀어붙였다. 모두 대선 공약들이다. 정책 전문 관료를 배제한 채 청와대는 대선 캠프와 시민단체 출신, 진보 학자를 중심으로 일방적 독주를 해 왔다. 당연히 섣부른 정책 실험들은 후폭풍을 불렀다. 청와대가 586 운동권에 둘러싸여 ‘집단사고’에 빠진 게 아니냐는 비판도 거세졌다. 지난달 초에야 청와대 정책실은 처음으로 기획재정부 관료들과 저녁을 함께했다고 한다. 집권 8개월 만이었다. 냉정하게 따져 보면 노무현보다 문재인 정부가 훨씬 이념적이다.

또 하나, 문재인 정권이 전력투구하는 것은 과거와의 전쟁이다. 적폐청산을 내걸고 검찰·국정원·국세청 등을 전방위로 동원해 전 정권, 전전 정권을 무더기로 털고 있다. 대선 중요 공약인 협치·탕평·소통은 증발한 지 오래다. 그 대신 온 사회가 두 쪽으로 쪼개지면서 양극화 그림자는 더 짙어졌다. 지금 인터넷에선 네티즌들끼리 서로 악플을 주고받으며 저주를 퍼붓고 있다. 더불어민주당이 그제 악성 댓글 106건을 고소하자 “쥐박이, 닭그네는 표현의 자유이고 문재앙, 문슬람은 신성불가침의 절대 존엄인가”라는 조롱이 인터넷을 도배한다.

이철호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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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자 폭탄과 악성 댓글은 더 이상 ‘양념’이 아니다. 사회심리학자 바우마이스터는 “나쁜 것이 좋은 것보다 강하다”며 “악플이 선플보다 더 마음을 흔들고 기억에 오래 남는다”고 지적한다. 적절한 규제 없이는 악성댓글이 창궐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지금 한국에는 악플이 선플보다 4배나 많다. 반면 일본은 선플이 악플의 4배다. 악성 댓글을 막기 위해 도입됐던 인터넷 실명제는 2012년 헌법재판소의 위헌 결정으로 폐지됐다.

요즘 세계 학계의 큰 흐름 중에 하나가 양극화에 따른 차별·혐오·경멸을 연구하는 것이다. 여성 법철학자 마사 너스바움은 『혐오와 수치심』에서 혐오는 인류가 갖는 기본 감정 중 하나라고 분석했다. 일본의 나카지마 요시미치도 『차별 감정의 철학』에서 이념과 인종·종교에 의한 차별·혐오·경멸이 가장 가혹하다고 지적한다. 너스바움과 나카지마가 제시하는 해법은 서로 닮아 있다. “상호 이해와 상호 존중을 넓혀가야 한다” “잘못된 믿음에서 최대한 자신을 해방시키고 상대방과 소통하라”는 주문이 그것이다. 이들은 분노 자체보다 분노조절 장애가 더 큰 문제라고 지적한다. 우리 사회에서도 진보와 보수가 정면충돌하면서 약간의 자비조차 찾아보기 힘들어지고 있다. 조금이라도 마음에 안 들면 가차 없이 복수하고 응징한다.

지금이라도 이념대립과 진영논리에서 좀 벗어났으면 한다. 상대방에 대한 분노는 혐오와 경멸을 부르고, 결국은 상대방뿐만 아니라 자신도 파괴한다. 문재인 정부부터 과거를 들추기보다 미래를 바라볼 필요가 있다. 영국 윈스턴 처칠 총리는 “과거와 현재가 싸우면 미래를 잃게 된다”고 경고했다. 이미 박근혜의 보수 정부는 낡은 정치 철학 때문에 사실상 파산했다. 이제 문재인 진보 정부라도 정책 빈곤으로 실패해선 안 된다. 지난해 초 “대한민국, 잘 해라”는 유언을 남기고 타계한 박세일 교수도 이런 말을 자주 했다. “이 땅에서 자유를 존중하는 우파와 평등을 주장하는 좌파는 나름의 가치를 가지고 있다. 그것을 아우르는 게 바람직하고 반드시 그래야 한다.” 어쩌면 한국이 가야 할 길도 보수와 진보의 극한 대립이 아니라 그 중간의 어디쯤인 ‘개혁적 보수’나 ‘발전적 진보’가 아닐까 싶다.

이철호 논설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