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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사설

역사교과서가 5년마다 뜯어고칠 정권 전리품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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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우리는 역대 정권마다 역사교과서 몸살을 앓아 왔다. 보수·진보 성향에 따라 내용은 물론 발행 방식이 바뀌기도 했다. 박근혜 정부의 국정교과서를 폐기한 문재인 정부는 “역사 교육이 정치적 논리에 이용되지 않도록 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2020학년도부터 중·고생들이 쓸 검정 역사교과서의 나침반이 될 집필 기준을 만들어 왔다.

그런데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이 공개한 집필 기준 시안을 보면 여전히 이념과 편향의 덫에 걸려 있다. 6·25전쟁의 도발 주체를 뺀 게 가장 심각하다. 시안은 ‘북한 정권의 전면적 남침으로 발발한 6·25전쟁’이라고 적시한 현행 집필 기준을 ‘6·25전쟁’으로 바꿨다. 이 지침대로라면 학생들이 전쟁을 누가 시작했는지 모를 수도 있다. 행여 “침략 주체를 따지는 게 무의미하다”는 낡은 수정주의 사관을 주입하려는 저의라면 큰일이다. 철저한 조사가 필요하다. 이뿐이 아니다. ‘자유민주주의 발전과 경제성장 과정을 이해하고’라고 명시한 현행 기준에서 ‘자유’가 빠졌다. 이는 헌법 4조의 ‘자유민주적 기본 질서’를 ‘민주적 기본 질서’로 바꾼 개헌안을 발표했다가 4시간 만에 번복한 여당의 초헌법적 행위와 일맥상통한다. 정권 입맛에 따라 교과서를 꿰맞추려 한다는 의혹이 퍼진 이유다. 인천상륙작전, 중공군 참전, 한·미 상호방위조약은 물론 새마을운동·수출제일주의 같은 경제 성과를 뺀 배경도 그런 맥락에서 자유롭지 않다.

중앙일보는 그동안 사실(史實)에 근거한 객관적이고 다양한 고품격·고품질의 역사교과서를 만들 것을 주문해 왔다. 그 출발점은 균형감이어야 한다. 하지만 집필 기준이 이 정도로 기울었다면 좋은 교과서는 애당초 불가능하다. 정부는 당장 시안을 폐기하고 독립적인 기구에 기준을 맡겨야 한다. ‘복면 지침’ 불신을 씻으려면 연구자 명단도 공개해야 한다. 역사교과서는 정권이 마음대로 뜯어고칠 수 있는 전리품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