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 조사보다 내 감을 믿어요”

중앙선데이

입력 2018.02.04 02:00

업데이트 2018.02.04 0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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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9호 24면

석정혜는 핸드백 없이 설명되지 않는 이름이다. 이른바 ‘핸드백 신화’를 썼던 그다.

‘핸드백 신화’ 석정혜 디자이너,
새 브랜드 ‘분크’ 론칭

2009년 서울 청담동의 작은 가게로 시작한 그의 브랜드 ‘쿠론’은 론칭 1년 만에 코오롱 FnC에 인수됐고, 이곳에서 다시 내놓은 스테파니백은 5년간 12만개가 팔리며 국내 핸드백 최다 판매를 기록했다. 2016년에는 몸값을 높여 신세계 인터내셔날로 자리를 옮겼다. 하지만 대기업 생활 8년 만에 그는 자신의 이름을 건 새 브랜드 ‘분크(Vunque)’를 내놓으며 돌연 홀로서기에 나섰다.

제2의 핸드백 신화를 노린 것일까. 중앙SUNDAY S매거진이 13일 신제품 출시를 앞두고 그와 마주했다.

“네네, 안감은 더 예뻐요. 아, 나중에 더 많은 색깔이 나올 거예요.” 인터뷰용 사진 촬영 막간에 그는 인스타그램 라이브를 했다. 한 손엔 휴대폰, 다른 한 손에는 분크의 가방을 들고 쉴 새 없이 댓글에 답을 했다. 인터뷰 전날엔 가방 포스팅에 달린 댓글에 답하느라 오전 3시에야 잠이 들었다고 했다. “디자이너와 고객이 이제는 멀리 있을 이유가 없어요.” 출시가 일주일 남짓 남았는데도 대기물량이 300여 개나 생긴 이유였다.

‘인스타 마켓’이라는 말이 맞는 것 같네요.
“시대가 변했죠. 소비자들이 딴 데 있지 않아요. 패션 피플들? 아니죠. 바로 바로 궁금해 하고 관심 가져주는 사람들이죠. 그들한테 솔직히 보여주고 설명해요. 일일이 댓글을 달다 보면 핸드백과 상관 없는 것도 물어요. 머리 어디서 했냐, 화장품 뭐 쓰냐 이런 거요. 그럼 또 답해 줘요. 저와 이런 식으로 소통하는 사람들이 진짜 고객인 거죠.”
매장도 없이 사업을 시작하나요.
“온라인의 시대예요. 이탈리아어 ‘어디에서나(Ovunque)’에서 분크라는 말을 따온 것처럼 매장에 연연하지 않아요. 단독 사이트(vunque.com) 운영하면서 그때그때 컨셉트가 맞는 곳에서 팝업 스토어를 열려고요. 백화점에는 일단 들어가지 않아요. 지금 토크 백이 32만원인데 백화점에 가면 이걸 맞추기가 힘들 거 같아요.”  
그런데 온라인에서 가방 파는 사람들은 이미 많아요.
“옷이라는 게 천 조각 두 개를 붙여도 입을 수 있지만 그게 다가 아니잖아요. 가방도 마찬가지예요. 가죽에 어떤 가공을 했는지, 어떤 종류인지에 따라 쓰는 실조차 천차만별로 달라져야 제대로 된 물건이 나오죠. 저, 가방만 20년 넘게 만들었어요. 브랜드가 된다는 건 늘 새로운 무언가를 담아낼 수 있어야 돼요. 그건 저만 할 수 있는 거죠.”
대세 안 따르고 시대 흐름 좇아 디자인  
스커트(skirt)

스커트(skirt)

오캄(occam)

오캄(occam)

오캄(occam)

오캄(occam)

그는 대학 졸업 뒤 국내 패션기업 한섬에서 액세서리 디자이너로 일하다 나와 1995년부터 OEM(주문자상표부착상품) 가방 사업을 꾸렸다. 당시 자신이 원하는 디자인으로 가방을 만들어 다니곤 했는데, 어느 날 길 가던 사람이 말을 걸어 왔단다. “가방 어디 거예요, 구할 수 있나요?”

그 여성은 재벌가 부인이었고, 물건을 만들어 준 뒤 청담동 사모님들 사이에서 입소문이 났다. 남들 다 아는 명품 가방이 아닌, 새롭다는 이유였다. 하나둘씩 주문 제작을 하다 2009년 아예 브랜드도 내고 매장까지 차렸다. 그때 마주친 그 ‘사모님’은 지금까지도 석씨의 VIP다.

8년 만에 다시 홀로 선 이유가 뭔가요.
“신세계 인터내셔날의 새 핸드백 라인을 만들려고 입사했는데 1년 반 만에 나왔어요. 새 브랜드를 못 낸 이유를 많이 묻는데, 사실 신규사업이라는 게 원래 그런 거예요. 끝까지 갈 수도, 못 갈 수도 있고. 그걸 안 건 소중한 경험이었죠. 어쨌거나 퇴사하고 나니 여러 군데서 러브콜이 왔어요. 그런데 거길 간다 한들 2~3년 있다 결국 같은 자리일 거 같더라고요. 바로 만들어 바로 결과물을 보는 게 생산적이라고 생각하는데 장기로 계획을 세우는 기업은 그럴 수 없으니까. 어쩌면 저도 그 시스템에 길들여질 수도 있고요. 원래 혼자 시작했던 일이니 무서울 게 없었어요. 이사, 상무 타이틀이 뭐 중요한가요.”  
막상 결정하고 나니 어떤가요.
“행복해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이 기다렸던 것 같아요. 모 백화점에서는 브랜드 내면 무조건 입점하라고 연락도 하데요. 지금 나오는 국내 핸드백들도 여전히 쿠론 스타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으니 ‘뭔가 좀 새로운 걸 내놔봐’라는 거죠. 저는 무슨 브랜드가 있나, 뭐가 잘 팔리나 이런 시장 조사 안 해요. 그냥 제 감을 믿어요. 쿠론 스테파니 백이 잘 팔린 이유도 딴 게 아니에요. 당시 백화점 바이어들은 검정 가방 말고는 절대 안 팔린다고 했는데도 제가 파란색 핑크색 백을 막 만들었죠. 다양성·개성을 찾기 시작할 때였으니까요. 첫 물량이 완판 됐는데 사람들이 돈 미리 내놓고 기다릴 정도로 히트를 쳤죠.”
이번에는 어떤 감이 들었나요.
“내복보다 히트텍을 입는 시대라면, 미니멀 라이프가 각광 받는 시대라면 좀 더 가벼운 가방을 만들자, 또 양말이나 신발도 짝짝이로 신는 게 트렌드니까 가방도 앞뒤가 다른 색깔로 해보자 이런 거죠. 시그너처 가방인 ‘토크백’도 그렇게 나왔어요.”  
전 직장에서 불발된 디자인인가요.
“전혀. 거기서 만들었던 건 패턴까지 다 놓고 나왔죠. 회사 차린 게 40일 전이고 이 백도 이후 순식간에 디자인했어요. 오래 생각한다고 좋은 제품이 나오는 건 아니니까. 아까 얘기처럼 키 팩터를 건드리기만 하면 돼요.”  
“글로벌 브랜드의 핸드백 디자인도 맡기로”
토크백(toque bag)

토크백(toque bag)

분크 백의 잠금장치는 면도칼 모양이다. 가장 단순한 것이 가장 진실하다는 의미의 ‘오캄의 면도날’에서 따왔다.

분크 백의 잠금장치는 면도칼 모양이다. 가장 단순한 것이 가장 진실하다는 의미의 ‘오캄의 면도날’에서 따왔다.

‘감’으로 디자인한다 했지만 패션계에서 그의 안목은 이미 최고로 알려져 있다. 국내에 수입 브랜드가 많지 않던 어릴 적부터 어머니의 럭셔리 제품을 접하면서 자연스럽게 ‘보는 눈’이 생겼단다. 사회 생활을 시작하면서는 월급 대부분을 가방이나 옷을 사는데 ‘투자’했다. 지금도 일년에 반씩 서울과 로스앤젤레스에서 번갈아 살며 경험의 영역을 확장시키고 있다.

새롭게 해보고 싶은 건요.
“분크를 하면서 미국 여성복 C브랜드의 핸드백 라인의 총괄 디렉터로 일할 예정이에요. 이달 내 계약이 마무리돼요. 조나단 앤더슨(런던 기반 디자이너)만 자기 브랜드 하면서 로에베 디자인까지 할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라는 타이틀이 있는 것처럼 단순히 디자이너가 아니라 브랜딩까지 프로젝트로 맡아 진행해 볼 수도 있고요.”
디자인의 철학이 있다면.
“예쁜 건 그냥 예쁜 거예요. 어떤 식당이 유명하다고 하면서 사람들은 막 이런저런 이유를 대요. 주인이 잘 생겼다, 인테리어가 멋있다고. 그런데 음식 맛 없으면 절대 이런 평이 안 나오죠. 옷도 가방도 마찬가지예요. 그냥 예쁜 건데 이런저런 이유를 댈 뿐이죠. 내가 만들고 싶은 핸드백도 그래요. 분크가 뜨는 브랜드라, 연예인이 들어서가 아니라 그냥 예쁘니까 갖고 싶은 가방이어야 해요.” ●

글 이도은 기자 dangdol@joongang.co.kr,  사진 신인섭 기자, 분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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