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하급관리에게 불어넣은 존엄한 인간의 이미지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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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9호 14면

사진작가 레비츠키가 찍은 그리고로비치(1856)

사진작가 레비츠키가 찍은 그리고로비치(1856)

두 아들을 나란히 공병학교에 넣으려던 닥터 도스토옙스키의 계획은 예상치 못한 문제로 절반만 실현됐다. 원기 왕성해보이던 맏아들 미하일이 신체검사에서 떨어진 것이다. 창백하고 신경질적이고 매사에 굼뜬 둘째 표도르는 오히려 ‘건강상태 양호’ 판정을 받아 무난하게 입학했다. 미하일은 하는 수 없이 레벨(지금의 탈린)에 있는 육군공병학교로 진학했다. 이때부터 두 형제가 인생과 문학에 관해 수시로 주고받은 편지는 청년시절 도스토옙스키를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자료다.

석영중의 맵핑 도스토옙스키 #<5> 상트페테르부르크: 글 쓰는 인간

한 살 터울인 두 사람은 어려서부터 우애가 남달랐다. 둘 다 문학을 좋아했고, 책을 많이 읽었고, 특히 실러를 숭배했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든든한 기둥이자 가장 사랑하는 친구가 되어주었다. 형이 지병으로 45세에 세상을 하직한 뒤 도스토옙스키가 형의 빚을 떠안고 유가족을 끝까지 보살핀 것은 한 때 가장 사랑했던 사람에 대한 의리였으리라.

장래의 대문호는 자신이 앞으로 걸어갈 길에 대해서도 형에게 가장 먼저 털어놓았다. “형, 인간과 인생의 의미를 연구하는데 꽤 진척을 보이고 있어. 인간은 신비 그 자체야. 우리는 그 신비를 풀어야 해. 그러기 위해 평생을 보낸다 하더라도 결코 시간을 허비했다고 할 수 없을 거야. 인간이고 싶기 때문에 나는 이 수수께끼에 골몰하고 있는 거야.”

머릿속에 문학이 꽉 들어찬 조숙한 청년의 허세를 감안한다고 해도 심오하다. 무엇보다 그토록 복잡한 인간을 왜 연구해야 하는가에 대한 그의 답이 압권이다. “인간이고 싶기 때문에.”

아마 이보다 더 간단명료하면서 무겁게 들리는 답도 없을 것이다. 인간이고 싶다면 우리는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먼저 물어보아야 한다. 뒤집어 말하자면,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묻지 않을 때 인간은 인간이기를 멈춘다. 말이 씨가 된다더니, 그는 어떤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자의 반 타의 반 ‘인간 연구’에 평생을 바쳤다. 결국 그는 “인간 영혼의 심연을 들여다보는 사람(Seer)”이라 불리게 되었다.

‘인간 연구’ 담아낸 첫 소설부터 화려한 데뷔

도스토옙스키의 인간 연구는 데뷔작인 『가난한 사람들』에서부터 결실을 보기 시작한다. 공병학교 졸업 후 소위로 임관했다가 적성에 안 맞는다며 다 집어치우고 하숙집에 들어앉은 백수 청년은 이 한 권의 소설로 위풍당당하게 문단에 등장했다. 당시 그의 룸메이트였던 드미트리 그리고로비치의 회고록을 읽어보자.

1845년 5월 말의 어느 포근한 저녁 도스토옙스키는 자신이 쓴 소설을 룸메이트에게 읽어주었다. 신예 작가이기도 한 룸메이트는 단박에 이 소설을 알아보고는 원고를 낚아채다시피 해서 문우 네크라소프에게 가져갔다. 두 사람은 밤이 깊어가는 것도 모르고 원고를 읽었다. 마지막에 주인공이 연인과 헤어지는 장면에서 그리고로비치는 감정을 주체할 수 없어 그만 울음을 터뜨렸다. 흐느끼면서 옆을 슬쩍 보니 네크라소프 역시 소리없이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두 사람은 부둥켜 안고 조금 더 눈물을 쏟은 뒤 도스토옙스키의 하숙집으로 달려갔다. 새벽 4시였다. 하품을 참으며 문을 열어준 작가에게 두 사람이 무슨 말을 했을지는 독자의 상상에 맡기겠다.

그 뒤의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원고는 순식간에 당대 최고의 비평가인 벨린스키의 손으로 넘어갔다. 벨린스키 역시 감격했다. 며칠 뒤 작가를 초대한 자리에서 비평가는 깊이 절을 하며 “당신이 이제 우리 러시아 문학의 천재입니다”라고 말해 가뜩이나 흥분하기 쉬운 청년의 허영심을 자극했다. 소설은 출간되자마자 독자들로부터 최고의 찬사를 받았다. 훗날 도스토옙스키는 “내 생애 가장 황홀한 순간”이라 회고했다.

소설은 페테르부르크의 슬럼을 배경으로 찢어지게 가난한 중년의 하급관리와 그 못지않게 가난한 아가씨가 주고받는 연애편지로 이루어진 ‘서간체 소설’이다. 거대하고 냉혹한 제국의 관료제도 맨 아랫단을 차지하는 하급관리는 말이 ‘관리’이지 그냥 하층민이다. 수도의 빈민굴을 점령한 그들은 누더기에 가까운 제복을 걸치고 출근해 상사의 멸시와 구박을 받으며 하루 종일 서류를 정서하는 일에 매달린다. 복사기가 없던 시절에 인간 복사기 역할을 하는 것이다.

당시 러시아 문학의 트렌드는 프랑스에서 들어온 ‘생리학적 스케치’였다. 빈민굴과 거주 하층민의 고단한 삶을 은판 사진으로 찍듯 생리학적으로 정확하게 묘사해 동정심을 유발하고 박애정신을 고취한다는 게 취지였다. 하급관리는 단골 주인공이었다.

그런데 도스토옙스키는 첫 소설에서 트렌드를 반영하는 동시에 트렌드를 넘어섰다. 진부한 하급관리와 슬럼을 가지고 새로운 서사를 만들어낸 것이다.

주인공 마카르는 하루 종일 서류 베껴 쓰기를 하는 40대 중반의 하급관리다. 마카르의 유일한 기쁨은 먼 친척뻘 되는 이웃집 고아 처녀 바렌카와 편지를 주고받고 푼돈을 아껴 그녀에게 자질구레한 선물을 사 주는 일이다. 마카르는 바렌카가 있는 한 추위도 굶주림도 직장에서 받는 수모도 견뎌낼 수 있다. 그는 나름대로 행복하다. 그런데 어느 날 바렌카 앞에 부유한 시골지주 비코프가 나타나면서 마카르의 행복은 산산조각 난다. 가난에 지친 바렌카는 결국 비코프의 청혼을 받아들여 그와 함께 떠나간다. 떠나가는 그녀를 향해 마카르는 가지 말라며 절규한다.

얼핏 보아서는 그다지 구미가 당기지 않는 소설이다. 다닥다닥 붙어있는 셋집, 더러운 층계,  깨진 유리창, 악다구니, 악취, 궁상맞은 하급관리와 고아 소녀, 게다가 신파조의 편지들…. 내 강의에 들어오는 학생들도 처음에는 뜨악해 하며 소설을 읽는다. 그러나 다 읽고 나서는 그들, 21세기를 사는 젊은이들 대부분이 『가난한 사람들』이 명작이라는데 동의한다. 눈물이 났다는 학생도 있다. 왜 그럴까?

‘생리학적 스케치’ 계열의 소설이 하층민에 대한 단순한 동정심 유발을 목표로 했다면, 도스토옙스키의 소설은 인생의 종착역에 도달한 ‘루저’가 어떻게 글쓰기를 통해 품격을 가진 인간으로 되살아나는가를 보여주기 때문일 것이다.

글쓰기를 통해 품격 있는 인간으로 되살아난 ‘루저’

도스토옙스키가 문우였던 형에게 보낸 편지

도스토옙스키가 문우였던 형에게 보낸 편지

『가난한 사람들』을 쓸 당시 그리고로비치와 살던 하숙집 건물. 상트페테르부르크 블라디미르스키 대로에 있다.

『가난한 사람들』을 쓸 당시 그리고로비치와 살던 하숙집 건물. 상트페테르부르크 블라디미르스키 대로에 있다.

바렌카에게 편지를 쓰면서 마카르는 점점 더 많은 것을 보고 더 많이 읽고 더 많이 생각한다. 그도 성장하고 그의 글도 성장한다. “저는 일하고 정서하고 여기저기 다니고 쉬기도 하면서 보고 들은 모든 것을 편지를 통해 당신께 알려드렸습니다.”

그는 자신만의 눈으로 세상을 읽고 인간을 읽고 문학 작품도 읽고 읽은 것을 해석하기도 한다. 문학 모임에 기웃거리고 푸슈킨의 소설을 읽고 경탄하기도 한다. 편지에다 옆방 세입자의 딸이 죽었을 때의 처절한 마음도 적어 보내고, 번화가 거리의 풍경도 묘사해 보내고, 자신의 지나간 삶에 대한 회한도 적어 보낸다. 그는 연애편지를 쓴 것이 아니라 ‘삶’을 썼다.

비참하고 고독하게 아무런 낙도 없이 살아온 그가 글을 쓰면서 자신의 삶을 다시 조직하고 기쁨을 느끼는 모습은 경이롭다. 궁핍도 고독도 모두 글쓰기의 소재가 된다. 그는 심지어 가난까지도 객관화시켜 나름의 해석을 한다. “제 목을 조이는 것은 사람들이에요. 돈이 아니라 일상생활에서 느끼는 불안, 사람들의 수군거림, 야릇한 미소와 비웃음입니다.”

일단 글의 소재로 넘어가면 궁핍도 고독도 그를 비천하게 만들지 못한다. 그는 궁핍한 인간이 아니라 궁핍에 관해 쓴 ‘저자’가 된다. 그는 쓰고 또 쓴다. “매시간 매 분을 아껴 모든 걸, 모든 걸 쓰고 싶습니다!”

‘저자’가 되자 그는 스스로의 문체까지 점검해 볼 수 있게 된다. “전에 비해 훨씬 나아진  문장력”을 연인에게 자랑하고 싶어서 비유를 사용하기도 한다. 스토리가 진행되면 될수록 그의 편지는 일종의 품격을 갖추기 시작한다. 비례해서 그의 자존감도 높아진다. 그는 편지를 쓰면서부터 “무엇 하나 뛰어난 것도 없고 세련되지도 않았고 품위도 없지만 나도 사람이다, 나도 마음과 생각이 있는 사람이다”라는 것을 깨닫는다.

마카르의 글쓰기는 인간의 내면에 있는 소통에 대한 갈증을 보여준다. 그의 편지는, 러시아 인문학자 바흐친의 표현을 빌려 말하자면 “다른 목소리에 의해 들려지고 이해되고 대답되어지기를” 바라고 있다. 글을 쓰고 누군가가 읽어주고 그 누군가가 대답해 줄 때 그는 살아있는 인간이 된다. 읽어주는 사람이 없을 때, 그리하여 쓸 필요가 없을 때 그는 소멸한다. 그래서 그는 마지막 편지에 마침표를 찍지 못한다. “이제 나는 누구한테 편지를 쓰지요?…이 편지가 마지막 편지가 되다니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안됩니다. 내가 편지를 쓸 테니 당신도 편지를 쓰세요…나는 다시 읽어보지도 않고, 문체도 고치지 않겠어요. 쓸 수만 있다면, 당신에게 조금이라도 더 많이 쓸 수만 있다면 그저 써나가겠어요….”

도스토옙스키는 동정의 대상일 뿐인 하급관리로부터 ‘글 쓰는 인간’을 창조했다. 통속 소설의 문법을 유지하면서도 인간 본성에 대한 깊은 이해를 담아냈다. 기성 작가들이 빈곤을 오로지 사회 문제로만 탐색할 때 그는 인간의 내면 풍경으로 파고들었다.

미국 작가 바바라 애버크롬비는 『A Year of Writing Dangerously』(우리말 번역본 제목 『인생을 글로 치유하는 법』)에서 글을 쓰는 이유를 한마디로 요약한다. “어쩌면 이것이 내가 글을 쓰는 이유일 것이다. 그것이 하나뿐인 험난하고 귀중한 삶에서 해야 할 일이기 때문에.”

마카르는 험난한 삶에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했다. 그래서 우리는 이 가난하고 비루한 인간에게서 자신에 대한 의무를 완수한 인간의 존엄을 본다. 청년 도스토옙스키는 하층민을 향한 연민을 새로운 방식으로 표현한 것이다. ●

석영중 : 고려대 노문과 교수. 『도스토예프스키, 돈을 위해 펜을 들다』 『자유, 도스토예프스키에게 배운다』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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