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성고문 피해자 '권양'에서 성폭력 '구원투수'로 돌아온 권인숙 위원장

중앙일보

입력

1980년대 ‘부천 경찰서 성고문 사건’의 피해자가 32년만에 성폭력 피해 여성들을 위한 ‘구원투수’로 돌아왔다. 2일 법무부가 성희롱ㆍ성범죄 대책위원회 위원장으로 임명한 권인숙(54) 한국여성정책연구원장이 그 주인공이다. 서지현 검사 성추행 사태를 계기로 발족한 대책위는 앞으로 법무부와 산하기관에서 발생한 성희롱, 성범죄 실태를 조사하고 개선방안을 마련하는 역할을 맡는다.

박상기 법무부 장관과 권인숙 위원장 [연합뉴스]

박상기 법무부 장관과 권인숙 위원장 [연합뉴스]

 “권양! 우리가 그 이름 부르기를 삼가지 않으면 안되게 된 이 사람은 누구인가. 온 국민이 그 이름은 모르는 채 그 성만으로 알고 있는 얼굴 없는 유명인사, 이 처녀는 누구인가.”

법무부 성범죄 대책위 위원장 임명 #1986년 '부천서 성고문 사건' 피해자 #여성학자 활동…文대통령과도 인연 #"사회적 중요성 잘 알아…피해자 입장 중요히 판단"

1986년 11월21일 인천지법 법정에서 조영래 변호사가 떨리는 목소리로 변론서를 읽어내려갔다. 이날 검찰은 권 위원장에게 징역 3년을 구형했다. 피고인석에서 권 위원장은 눈물을 떨궜다. 그는 무슨 범죄를 저지르고 이 자리에 섰을까.

당시 권 위원장을 위해 모인 9명의 변호인단이 문귀동 경장과 옥봉환 부천경찰서장 등 관련 경찰 6명을 상대로 쓴 고발장이 그 과정을 상세히 말해준다. 변호인단에는 막 인권변호사의 길을 걷기 시작한 박원순 서울시장도 포함되어 있었다.

85년 봄 권 위원장은 서울대 의류학과 4학년 시절 경기 부천의 한 가스제조업체에 위장취업했다. 몰래 노동운동에 참여하기 위해서였다. 이듬해 6월 4일 주민등록증을 위조한 사실이 들통나 경기 부천경찰서에 연행된 권 위원장에게 지옥이 시작됐다. 당시 조사를 맡은 문귀동 경장은 수사를 빙자해 이틀동안 그에게 성고문을 가했다.

권인숙씨 위원장과 그를 변론했던 조영래 변호사.

권인숙씨 위원장과 그를 변론했던 조영래 변호사.

권 위원장 사건의 파장은 컸다. 진상규명을 요구하며 교도소 내에서 단식에 돌입한 권 위원장을 따라 다른 수감자들이 함께 단식에 들어갔다. 검찰은 “사건 당시 성모욕 행위는 없었다”고 발표하면서 불에 기름을 부었다. 이같은 군사정권의 부도덕성은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과 함께 1987년 6월 항쟁의 도화선이 됐다. 대법원은에 문귀동에 대한 재정신청(검찰이 기소하지 않은 사건에 대해 재판에 넘겨달라고 직접 법원에 신청하는 것)을 받아들여, 89년 6월 문귀동에게 징역 5년을 선고했다.

패셔니스트가 꿈이었던 권 위원장의 삶은 뒤바뀌었다. 그는 석방된 후 뒤늦게 서울대로 돌아가 1994년 졸업장을 받았다. 이후 미국으로 건너가 여성학을 전공했다. 클라크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2001년부터는 사우스플로리다주립대 여성학과 교수로 활동했다. 2003년 한국으로 돌아와 명지대 교수로 부임했다.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대선 예비후보의 영입 인사인 여성학자 권인숙 명지대 교수가 8일 오전 서울 여의도 더불어민주당 당사 브리핑룸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영입 소감을 밝히고 있다. 2017.3.8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대선 예비후보의 영입 인사인 여성학자 권인숙 명지대 교수가 8일 오전 서울 여의도 더불어민주당 당사 브리핑룸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영입 소감을 밝히고 있다. 2017.3.8

2014년엔 국내 유일한 성폭력 전문 연구소 ‘울림’의 초대 소장을 맡아 1년간 활동했다. 국무총리 소속 양성평등위원회 위원, 대통령 소속 저출산ㆍ고령사회위원회 자문위원도 맡아 활동했다.

문재인 대통령과의 인연도 있다. 지난해 4월 대선을 앞두고 당시 문재인 후보 선거대책위원회에서 공동선대위원장으로 활동했다. 지난해 3월엔 문 대통령이 세계여성의 날을 맞아 권 위원장에게 꽃을 전달하기도 했고, 10월엔 한국여성정책연구원장으로 임명했다.

권 위원장은 임명 직후 성폭력ㆍ성희롱을 뿌리 뽑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그는 “법무부 성희롱ㆍ성범죄 대책위원회의 사회적 중요성을 잘 알고 있다”며 “법무부와 산하기관의 성폭력 범죄 실태를 정확히 파악해 적절한 방안을 마련하겠다”고 말했다.

법무부 성폭력 대책위는 서지현 창원지검 통영지청 검사 사건을 계기로 제도 개선에 나설 예정이다. [JTBC]

법무부 성폭력 대책위는 서지현 창원지검 통영지청 검사 사건을 계기로 제도 개선에 나설 예정이다. [JTBC]

박사라 기자 park.sara@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