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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의 멘토] 인공지능 공포 ? 50년 전 한국에 컴퓨터 들여올 때도 비슷했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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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국내 IT산업 산증인 이주용 KCC정보통신 회장 

국내 소프트웨어 1세대로 꼽히는 이주용(82) KCC정보통신 회장의 인생엔 두번의 결정적인 선택이 있었다.

IT 기술 발전은 재앙 아닌 축복 #AI, 사람이 싫어하는 일 하게 돼 #새로 생기는 일자리가 더 많을 것 #IBM에 입사한 첫 한국인 #미 유학 중 경제학 전공서 진로 바꿔 #은행 고액 연봉 포기, 도전의 길 택해 #주민등록 전산화 사업 진두지휘 #1975년 당시 우리 인구 2000만 명 #1000명이 3교대 하며 겨우 일 끝내

첫번째 선택은 IBM 입사였다. 이 회장은 경제학을 배우겠다며 유학을 떠난 미국에서 우연히 컴퓨터의 세계에 발을 들였다. 컴퓨터 산업의 태동기에 굴지의 컴퓨터 회사 IBM 본사에 최초의 한국인 직원으로 입사했다. 더 높은 연봉을 제시하는 글로벌 은행을 뒤로 하고 IBM을 찾은 건 “이왕 컴퓨터를 할 거면 배울 것이 많은 곳을 택하자”는 결심 때문이었다.

이주용 KCC정보통신 회장이 서울 염창동 사옥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사진 박종근 기자

이주용 KCC정보통신 회장이 서울 염창동 사옥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사진 박종근 기자

두번째 선택은 1966년 한국으로 돌아온 것이다. 한국의 1인당 GNP(국민총소득)이 그의 연봉의 100분의 1도 되지 않던 때였다. “미국에 남았다면 연봉이 더 올라갈 수는 있었겠지만 한국 IT 산업을 발전시키겠다고 결심한 것이 참 자랑스럽고 잘한 결정”이라고 그는 돌아봤다.

두 차례의 선택을 내릴 때마다, 이 회장은 가까운 미래보다 먼 미래를 내다봤다. 눈 앞의 이익이 더 적더라도, 궁극적으로 더 큰 열매가 기대되는 곳에 승부수를 던진 것이다.

이주용 KCC정보통신 회장이 서울 염창동 사옥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사진 박종근 기자

이주용 KCC정보통신 회장이 서울 염창동 사옥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사진 박종근 기자

이후 이주용 회장은 우리 IT 산업의 역사와 발걸음을 같이 했다. 1967년 국내 최초의 컴퓨터 파콤222를 들여와 컴퓨터 인력을 길러냈고, 75년 한국 최초의 주민등록 전산화 사업을 이끌었다. 81년엔 철도 승차권을 온라인으로 전산화하는 작업을 맡았다. 이때 개발된 소프트웨어는 91년태국 철도청으로도 수출됐다. 한국 최초의 소프트웨어 수출이었다.

이 회장과의 인터뷰는 서울 강서구 화곡동 사무실에서 진행됐다. KCC정보통신은 지난해 설립 50주년을 맞았다.

“컴퓨터의 본마당에서 배우자, 내 인생 최고의 결정”

미국 미시건대 대학원에서 경제학 석사 학위를 취득하고, 다소 엉뚱하게 1959년 IBM 본사에 1호 한국인으로 취직을 했다.

“석사 과정을 마쳤는데도 취직이 쉽지 않았다. 영주권이 없고 학생 비자였던 것이 큰 제약이었던 것 같다. 교수님이 학교의 사회과학연구소에서 밤을 새 컴퓨터를 오퍼레이팅(운영)하는 자리를 주선해주셨다. IBM의 첫 컴퓨터 기종인 IBM650이었다. 컴퓨터를 접한 뒤 호기심이 생겨서 학교에서 관련 수업을 듣기 시작했다. 1년이 지나니 컴퓨터 전문가가 돼 있더라. 씨티은행을 비롯한 최고의 직장에서 나를 데려가겠다고 나섰다.”

미국 유학 시절 이주용 회장. 왼쪽은 이홍구 전 국무총리 [사진 이주용 회장]

미국 유학 시절 이주용 회장. 왼쪽은 이홍구 전 국무총리 [사진 이주용 회장]

IBM을 선택한 이유는.  

“원래 경제학도였기 때문에 씨티은행에 입사했다. 그런데 내게 컴퓨터 업무만 계속 시키더라. 이왕 컴퓨터를 계속 할 거면 컴퓨터의 본마당에서 배우자, 결심했다. 당시 연봉은 씨티은행이 IBM보다 훨씬 많았다. 하지만 길게 보고 IBM을 선택한 것이 내가 평생 내린 결정 중에 가장 좋은 결정이었다고 생각한다. 참 운이 좋았다.”

1961년 미국 IBM 근무시절 컴퓨터 앞에 앉은 이주용 회장 [사진 KCC정보통신]

1961년 미국 IBM 근무시절 컴퓨터 앞에 앉은 이주용 회장 [사진 KCC정보통신]

컴퓨터에 눈을 뜨게 된 건 우연한 기회였지만, 관련 지식을 쌓고 IBM을 선택하는 등의 노력과 결정이 적극적이었다.

“살아오면서 느낀 건 안전이 제일이 아니라는 거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해야 한다. 하고 싶은 일이 뭔지를 찾는 게 인생의 방랑 시기다. 그걸 몇년을 두고 찾는 사람이 있고, 나처럼 우연히 찾는 사람도 있다. 너무 안전을 중시하다보면 오히려 기회가 적어진다. 우리가 인생을 60년 살지 100년을 살지 모르지만,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살아야 한다. 자기가 취미가 있고 사회를 위해 이바지할 수 있는 일이라면 그게 제일이다. 그런 의미있는 인생을 가져가야 정말 보람된 인생이지, 남이 간다고 해서 남만 쫓아가게 되면 정말 헛발질하기 쉬울 것 같다.”

“IBM이 준 교훈은 ‘젊음을 허비하지 말라’는 것”

IBM 본사에서 1호 한국인으로 배운 것은.  

“나는 늘 ‘전력을 다한다’‘순간마다 내 최선을 다한다’는 신조를 갖고 있다. 그걸 지금 돌아보면 IBM에 들어가서 배우지 않았나 생각한다. 학교에 있을 땐 그렇게까지 느끼지 못했는데, IBM에 들어가 보니 너무 경쟁이 심하더라. 아이비리그 나온 수재들이 다 와서 같이 있는데 결사적으로 뛰더라. ‘야, 뭐하자고 이렇게까지 전력투구를 하냐’고 가끔 옆에 있는 친구한테 물었다. 그랬더니 ‘야, 그거 남겨둔다고 저장되는 게 아니야’ 그러더라. 에너지는 있을 때 써야지 더 오는 거지, 아낀다고 되는 게 아니라는 거다.

가만 생각해보니 그렇더라. 청춘이라는 거, 젊음이라는 건 20~30년 밖에 안되거든. 그때 허비하면 안된다. 전력투구를 해야 된다.”

1961년 IBM 시절 프린터기 앞에서 업무를 하고 있는 모습 [사진 KCC정보통신]

1961년 IBM 시절 프린터기 앞에서 업무를 하고 있는 모습 [사진 KCC정보통신]

IBM에서 고액 연봉을 받다가 한국에 들어오게 된 이유는.  

“1963년 IBM 한국 대표로 나왔는데, 충격이 심했다. 당시 우리나라 1인당 GNP(국민총생산)이 100달러였는데, IBM에서 내 연봉은 1만2000달러였다. 1966년 한국에 들어왔을 때 이은복 한국생산성본부 이사장을 만나게 됐다. 이 이사장은 당시 한국 최초의 컴퓨터를 도입하기로 하고 어떻게 운영 요원을 교육시킬 것인지 고민을 하고 있었다. 그때 내가 우리나라의 정보기술(IT) 산업의 나무를 심을 수 있는 기회가 있구나, 하는 걸 봤다. 그때 내 나이가 막 서른에 접어들 때였다. 30대 전까지는 그냥 열심히 성공하려고 최선을 다했다. 그때 처음으로 인생에 보람이 되는 것을 추구했다고 할까. 우리가 IT 산업을 키워가면 선진국이 될 수 있고, 일본보다 앞설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당시 한국은 제조업 기반도 약했는데 IT 산업은 좀 이르지 않았을까.  

“내 나름대로의 생각은, 우리나라가 1차 산업혁명에는 적극적으로 참여를 못했지만 3차 산업혁명에서는 우리가 앞설 기회를 내가 만들 수 있겠다, 그런 의미를 느꼈다. 그런 생각에 한국에 남기로 했다. 인생을 쭉 살아본 뒤 보면, 그 50년 전에 한국에 남기로 한 결정이 참 잘했다, 그 덕분에 상당히 후회없는 인생을 살았다고 생각한다.”

“컴퓨터를 모르던 한국… 최초의 컴퓨터를 들여오다”

67년 본격적으로 한국생산성본부에서 일을 시작하며 한국 최초의 컴퓨터인 ‘파콤222’를 들여왔다.

“일본 후지쯔의 제품이었다. 내가 합류했을 땐 이미 생산성본부가 도입 계약을 마친 상황이었다. 그런데 계약 내용을 따져보니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컴퓨터를 가르치기 위해 한국에 올 일본인 기술자가 네 명이었는데, 한명의 하루 체제비가 우리 회사원 월급의 두배였다. 직접 후지쯔를 방문해 계약 내용을 수정했다. 기술 지원료를 크게 깎고, 임대료를 30분의 1수준으로 깎았다. 후지쯔로서도 이미 배에 물건을 실은 상황이라 계약을 무르기 힘들었던 것이다. 그렇게 그해 3월, 우여곡절 끝에 한국 1호 컴퓨터가 인천항을 통해 들어왔다.”

1967년 5월 국내 최초의 컴퓨터인 FACOM222 앞에 앉은 이주용 회장. [사진 KCC정보통신]

1967년 5월 국내 최초의 컴퓨터인 FACOM222 앞에 앉은 이주용 회장. [사진 KCC정보통신]

당시엔 한국에 컴퓨터 관련 인력이 많지 않았을 것 같다.

“컴퓨터란 말 자체를 아무도 이해하지 못했다. 면세 통관 절차를 거쳐 설치까지 두달이 걸렸다. 세관이 컴퓨터가 뭔지 몰라 ‘계산기’라고 설명을 하면 ‘계산기가 왜 이리 비싸냐’‘왜 이렇게 부피가 크냐’ 이렇게 물었다. 당시 파콤222는 총 무게가 35t이었다. 대형 트럭 5대로 컴퓨터를 날랐다.

모든 게 처음이었기 때문에 내가 교육과 프로그래밍, 마케팅과 시스템 분석을 모두 혼자 했다. 광범위한 일을 나 혼자 하려니까 처음엔 너무 갑갑했지만, 나중엔 뭐든 시간이 되는대로 하자, 뚫고 나가자고 마음 먹었다.

그때 생각이 이걸 나 혼자 할 수는 없으니 밑에 애들을 가르쳐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미국에선 3~5개월 이수할 교육 과정을 1~2주일에 끝냈다. 낙오할 사람은 낙오시켜 가며 가르쳤다. 그렇게 정신없이 6개월을 보내고 나니 가르친 사람들이 도움을 줄 수 있게 되더라. 스태프도 30~40명으로 늘고.”

“경제개발 5개년계획, 주민등록 전산화 사업에 기여”

 다른 보람된 일을 꼽는다면.

“그때는 참 하루 24시간이 아까웠다. 그 일을 맡았을 땐 토요일, 일요일이라는 것이 없었다. 통행금지란 게 있었는데, 통행금지 때문에 집에 못 가는 시간이 태반이었다. 밤을 같이 직원들과 새웠다.

66년에 제2차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프로그래밍 작업을 맡았던 게 기억이 남는다. 그 전에는 관료들이 모든 걸 계산기를 두드려가며 손으로 작업했다. 내가 2~3일 밤을 새며 만든 프로그램은 매개 변수를 입력하면 결과치가 나오는 방식이었다. 우리나라의 경제개발 계획을 짜는 데 도움을 줬다는 생각에 밤을 새는 것도 즐거웠다.”

우리나라 최초의 주민등록 전산화사업을 이끌었는데.

“1975년 주민등록 전산화 사업이 시작된 건 김신조 사건이 계기였다. 김신조가 이북에서 내려오는 바람(1968년)에 보안에 경각심을 갖게 됐고, 그래서 우리 국민을 모두 등록시켜 불순 분자 색출을 용이하게 하자는 것이었다.  

당시 인구가 2000만 정도로 추계됐는데, 보통 어마어마한 일이 아니었다. 비용 산출부터 엄두를 내기 힘든 방대한 규모였다. 1000여명의 인력이 3교대로 작업을 했다. 호주의 기술을 도입해 프로그램을 구성했다.  

1981년 10월 새마을호 승차권 전산발매시스템 가동식. [사진 KCC정보통신]

1981년 10월 새마을호 승차권 전산발매시스템 가동식. [사진 KCC정보통신]

작업 중간에 오류를 검증하기 위한 검사 숫자(Check Digit)를 추가하느라 업무 계획이 연기되기도 했다. 검사 숫자는 주민등록번호의 오류를 잡아내기 위해 만들어진 일종의 비밀번호다. 애초 12자리였던 주민등록번호가 13자리가 된 게 이 검사 숫자 때문이다.  

그래도 이 숫자가 있었기에 오류를 사전에 예방할 수 있었다. 주민등록번호라는 게 한 숫자만 잘못 입력해도 남자가 여자가 되거나 어른이 아이가 될 수 있는 거다. 우여곡절 끝에 완료된 사업이지만 우리 회사에도, 국내 컴퓨터 산업의 역사에도 획을 긋는 일이었다. 굉장히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4차 산업혁명의 본질은 하느님과 싸우는 것”

요즘 젊은이들의 걱정 중 하나는, 인공지능이다. 가뜩이나 일자리도 없는데 인공지능이 일자리를 침범해들어온다는 얘기들을 많이 하지 않나.

“인공지능 가지고 걱정할 게 하나도 없다. 옛날에 컴퓨터가 나왔을 때도 ‘컴퓨터 때문에 사람들이 다 실업자가 된다’고들 했었다. 그런데 IT 산업이 만들어 낸 직업은 없앤 것보다 수십배가 된다. 인공지능은 사람의 일을 대신 하는 게 아니다. 사람이 정확하지 않은, 실수하는 걸 없애고 사람이 하는 일 중에 가장 기계적인 일, 사람이 하기 싫어하는 일을 인공지능이 하는 거다.  

지금 인공지능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오늘 시작된 게 아니다. 제가 1960년에 IBM 갔을 때도 다들 앉아서 하는 일이 그거였다. 오늘 경마에서 어떤 말이 우승할지를 맞추는 소프트웨어를 만드는 식이다. 그런데 왜 우승마를 딱 맞추지 못할까. 말과 마주와의 호흡, 경기장 트랙의 상태, 말의 컨디션, 이런 건 데이터화가 안 되는 거다.”

이른바 ‘4차 산업혁명’의 본질은 뭘까.  

“3차 산업혁명도 마찬가지지만 결국은 소프트웨어의 싸움이다. 한국에 들어온 이후 줄곧 ‘소프트웨어가 중요하다’고 했지만, 당시엔 아무도 믿지 않았다. 보이지 않으면 믿을 수 없다는 게 한국 사람들의 특징이다. 결국 우리는 하드웨어에 올인했다.  

4차 산업혁명에서 하드웨어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모든 것을 소프트웨어가 결정한다. 결국은 하느님하고 싸우는 거다. 하느님이 사람을 만드신 걸 봐라. 얼마나 큰 메모리로 만들었나. 우리가 인풋(Inputㆍ입력)과 아웃풋(Outputㆍ출력) 설계가 얼마나 잘 되어있나.

이주용 KCC정보통신 회장이 서울 염창동 사옥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사진 박종근 기자

이주용 KCC정보통신 회장이 서울 염창동 사옥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사진 박종근 기자

옛날부터 우리가 인간 로봇을 만들려고 했는데 비슷하게 만들기가 얼마나 힘이 드나. 하느님이 그만큼 사람을 잘 만드신 거다. 인간이 하느님의 능력에 우리가 다가갈 수 있는지를 시험하는 것이 결국 4차 산업혁명이 될 거다.”

인생을 살아오면서 꼭 지키려 했던 원칙은.  

“전력투구다. 인생이라는 건 모멘텀(순간)의 연속이다. 그 순간의 내가 있는 힘을 다 하는 것, 그걸 안 하면 낭비가 된다. 인생에서 좀더 낫고, 더 성공할 수 있는 건 얼마만큼 그걸 하느냐 하는 것이다.”

“인생은 순간의 연속… 전력투구하길”

제 주변 젊은 친구들을 보면 20대 후반, 30대 초반이 됐는데도 선택에 확신을 못 가지는 친구들이 많다.

“일정 부분은 풍요 때문인 것 같다. 우리가 좀더 여유있는 세상을 살고 있다보니 젊은이들이 쉬운 길을 가려고 하는데, 미국이나 한국이나 나는 그게 문제라고 생각한다. 좀더 어려운 길을 택해야 한다. 어렵지만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해야 한다.”

하고 싶은 일에 매진한다고 늘 좋은 결과가 나오진 않는다. 그런데 실패했을 경우에 떠받쳐줄 안전망이 우리 사회엔 너무 없는 것 같다.

“그런 안전망까지 생각한다는 게…. 낙오했을 때 다시 살 수 있는 건 그때 그 사람의 의지일 거다. 나올 수 있는, 재기할 수 있는 힘이 있으면 천만 다행인 거고. 사회가 무정한 게, 꼭 성공한다는 보장이 없다. 하나의 운명이다.”

계층의 사다리가 끊겼다는 표현을 많이 쓴다. 금수저ㆍ흙수저론이 나오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나는 유복한 집에서 태어났지만) 사업을 하면서 부모에게서 받은 돈은 거의 쓰지 않았다. 나는 사업을 하면서도 돈을 쫓아가지 않았다. 돈이 날 쫓아왔다고 할까. 일을 하다보니 돈이 나에게 오더라. 어느새 내가 우리 아버지보다 더 부자더라고. 돈은 오히려 벌기보다 쓰기가 어렵다. 열심히 노력하면 돈은 들어온다. 그걸 낭비하지 않음으로써 부가 축적이 되는 거다.”

지난해에 소프트웨어 교육 사업을 위해 100억원을 쾌척하기로 했는데.

“나는 컴퓨터 산업의 변화를 잘 읽어 큰 돈을 벌었다. 내가 투자한 컴퓨터 회사 프라임이 세계 최고의 미니 컴퓨터 회사가 되는 바람에 많은 돈이 들어왔다. 프라임 역시 하드웨어 회사가 아니라 소프트웨어 회사였다. 소프트웨어로 번 돈이니 소프트웨어를 위해 쓰고 싶어 일부를 내놓은 거다. 우선 100억원을 내놓았지만, 정식으로 ‘미래와 소프트웨어 재단’이 설립되면 500억원을 더 내놓을 계획이다.”

미래 교육이 어떻게 바뀌어야 할까.  

“미국서 유학할 때, 잊을 수 없는 가르침을 받았다. 미시건대 경제학부 4학년에들었던 경제학 수업이었다. 경제 이론을 분석하라는 시험에 내가 암기하고 있던 책의 내용을 옮겨쓰고선 기분이 좋았다. 그런데 교수가 나에게 D 학점을 주더라. 그 교수는 ‘나와 서른살 차이 나는 자네가 경제 이론에 대해 나와 같은 생각을 할 수 있느냐. 책을 베끼는 건 원숭이에 지나지 않는 일’이라고 나를 꾸짖었다.  

우리나라 교육이 지금도 암기를 중시하고, 주입식으로 진행되는 게 아닌지가 우려스럽다. 지식이 중요한 시대가 아니라 창의성이 중요한 시대다.”

이주용 KCC정보통신 회장이 서울 염창동 사옥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사진 박종근 기자

이주용 KCC정보통신 회장이 서울 염창동 사옥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사진 박종근 기자

젊은이들에게 건네고 싶은 조언은.  

“젊음이라는 건 대단한 거다. 억만금을 주고도 못 산다. 지금 내게 20년 세월을 당겨 준다면 1000억원이라도 내겠지. 그만큼 젊음이 중요하다. 그 좋은 걸 갖고 계시니까 잘 쓰시길 바란다. 첫째 자신을 위해, 둘째 여러분 가족을 위해, 셋째 사회ㆍ국가를 위해서 이 시간을, 젊음을 잘 써 주시길 바란다.”

임미진 기자 mijin@joongang.co.kr

이주용 KCC정보통신 회장은


1935년 3월 경남 울산 출생

1953년 3월 경기고 졸업

1953년 4월 서울대 문리과대학 입학

1955년 9월 미국 미시간대 경제학부 입학

1958년 8월 미국 미시간대 사회과학연구소 전산실 연구원

1960년 6월 미국 미시간대 대학원 2년 수료

1960년 7월 미국 IBM 입사

1963년 2월 미국 IBM사 한국 대표

1964년 4월 미국 IBM사 서비스 뷰로 프로젝트 매니저

1967년 1월 한국생산성본부 전자계산소장

1968년 8월 철도청 EDPS 개발위원회 위원

1971년 4월 한국전자계산(주) 대표이사

1975년 치안본부 주민등록 전산화 작업 착수

1985년 4월 종하장학재단 이사장

1987년 4월 동탑산업훈장 수여

1988년 5월 한국전자계산(주) 대표이사 회장

1996년 10월~ 현재 KCC정보통신(주), (주)시스원, KCC모터스(주), 종하E&C(주) 대표이사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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