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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은 '날라리풍 K팝' 두려워 금강산 공연 취소했나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北 '케이팝' 두려웠나…"'날라리풍 섬멸' 지시 김정은도 한국식 표현"

북한은 왜 금강산에서 열기로 한 공동문화행사를 일방적으로 취소했을까.

북측은 지난 29일 금강산 행사 최소를 일방적으로 통보하면서 “(한국 언론이) 내부의 경축행사까지 시비했다”는 이유를 들었다. 8일로 예정된 북한의 대규모 열병식 관련 보도에 대한 불편함으로 해석되는 대목이다.

북한 김정은 김일성 주석의 생일(15일ㆍ태양절) 개최된 열병식 참석 2017.4.16 노동신문

북한 김정은 김일성 주석의 생일(15일ㆍ태양절) 개최된 열병식 참석 2017.4.16 노동신문

북한의 주장을 인정하더라도 북한은 왜 금강산 공연과 마식령 스키장에서의 합동 훈련 등 남측이 먼저 제안한 2가지 사안 중 마식령 훈련은 수용하면서, 유독 합동 공연만을 취소시킨 데 대한 합리적 이유가 되지 못한다.

한 당국자는 31일 “북한에서 한국의 케이팝(K-POP) 공연이 이뤄지지 못하게 된 데 대해 깊은 아쉬움이 있다”며 “2008년 박왕자 씨 피살사건 이후 폐쇄된 금강산 내 시설이 재차 열릴 수 있었는데 이 점 역시 상당히 아쉽다”고 말했다.

결국 정부가 북한에 금강산에서의 합동 공연을 제안했던 전략적 배경에는 북한에서 케이팝으로 상징되는 한국의 대중문화를 전파하겠다는 의도가 있었고, 이에 대해 북한이 거부감을 가졌을 수 있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은회색 계열의 양복 차림으로 2018년 신년사를 낭독하는 김정은.

은회색 계열의 양복 차림으로 2018년 신년사를 낭독하는 김정은.

이미 전조가 있었다. 북한의 김정은은 올해 신년사에서 “혁명적인 사회주의 문학예술의 힘으로 부르주아 반동문화를 짓눌려 버려야 하겠다”며 “전 사회적으로 도덕 기강을 바로 세우고 사회주의 생활 양식을 확립하며 온갖 비사회주의적 현상을 뿌리뽑기위한 투쟁을 드세게 벌여야 한다”고 밝혔다.

김정은이 뿌리 뽑아야 한다고 했던 ‘온갖 비사회주의적 현상’의 핵심은 케이팝과 드라마, 영화 등 한류(韓流) 문화로 추정된다.

북한의 수소폭탄 실험에 대한 대응으로 전방지역에서 대북 확성기 방송을 136일 만에 재개 했다. 이날 중부전선에서 한 병사가 방송을 위해 확성기 위장막을 걷어내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북한의 수소폭탄 실험에 대한 대응으로 전방지역에서 대북 확성기 방송을 136일 만에 재개 했다. 이날 중부전선에서 한 병사가 방송을 위해 확성기 위장막을 걷어내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북한은 한국 대중문화를 ‘남조선 날라리풍’이라며 배격하고 있다. 남한 문화에 대한 ‘섬멸전’을 벌이라는 김정은의 지시는 그만큼 한국의 대중문화가 북한의 체제 유지에 큰 위협이 된다는 방증이다. 실제로 북한을 탈출한 태영호 전 주영 북한 대사관 공사는 언론 인터뷰에서 “북한 주민은 낮에는 ‘김정은 만세’를 외치지만, 밤에는 이불 덮어쓰고 드라마를 보면서 남한에 대한 동경(憧憬)을 키워가고 있다”고 말했다. 최근 판문점 JSA(공동경비구역)를 넘어온 북한군 병사도 의식을 찾자마자 “남한 노래가 듣고 싶다”고 했다는 이를 뒷받침한다.

27일 서울 마포구 MBC 상암홀에 들어가는 평창 겨울올림픽 북측 선발대(왼쪽)와 걸그룹 오마이걸. [연합뉴스, 일간스포츠]

27일 서울 마포구 MBC 상암홀에 들어가는 평창 겨울올림픽 북측 선발대(왼쪽)와 걸그룹 오마이걸. [연합뉴스, 일간스포츠]

북한이 금강산 공연 취소를 통보하기 이틀 전인 지난 27일. 태권도 시범단 공연 준비를 위해 서울을 방문했던 북측 선발대가 상암동에 있는 방송국 시설을 둘러봤다. 북측 선발대는 2시간 뒤 생방송 될 프로그램의 리허설을 하고 있던 걸그룹 ‘오마이걸’의 무대를 보고 당황한 반응을 보였다. 북측 인사와 동행했던 정부 관계자는 “북한 인사들이 허공이나 바닥을 내려보거나 제자리에서 뱅뱅 도는 등 시선을 어디에 둬야 할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고 전했다.

한국의 대중 가수가 북한에서 공연했던 전례는 있다. 그러나 이미 10여년 전 일이다.

2003년 베이비복스의 공연을 바라보는 북한 주민. [유튜브 영상 캡처]

2003년 베이비복스의 공연을 바라보는 북한 주민. [유튜브 영상 캡처]

1999년 12월 평양 봉화예술극장에서 열린 ‘2000년 평화 친선음악회’에서 패티김ㆍ태진아ㆍ설운도 등이 노래했다. 이 외에도 1세대 아이돌 그룹인 ‘젝스키스’와 ‘핑클’이 출연했다.

2002년에는 가수 이미자ㆍ윤도현 밴드 등이 평양에서 공연했다. 2003년 평양 모란봉 야외무대에서 코미디언 송해와 북한 여성방송원 전성희가 ‘평양노래자랑’을 공동 진행했고, 베이비복스·신화·이선희 등이 참석한 공연이 열리기도 했다. 2005년 평양 류경정주영체육관에서는 조용필 콘서트가 열렸다.

한편 여권의 한 핵심 인사는 “김정은의 올해 신년사를 꼼꼼히 분석해보면 그동안 쓰지 않았던 ‘남한식 표현’이 다수 사용되고 있다”며 “북한이 한국의 대중문화 차단에 혈안이 돼 있지만, 역설적으로 김정은의 신년사를 쓰는 그룹이나 김정은 본인조차 이미 한국 문화에 익숙해져 있을 정도로 한국 문화가 깊숙하게 침투했다는 점을 드러낸 단면”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김정은은 이번 신년사에서 “언제나 늘 마음뿐이었고 능력이 따라서지 못하는 안타까움과 자책 속에 지난 한 해를 보냈는데…”라는 표현을 썼다. ‘언제나 늘 마음뿐이었다’는 말은 북한에서 쓰지 않는 남한식 표현이다. 특히 ‘무결점’의 신적 존재였던 수령이 자신의 능력이 부족했음을 인정한 대목 역시 무오류성을 깬 표현으로 꼽힌다.

강태화 기자 thka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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