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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운 세계] '3%'만 사는 더러운 세상··· 브라질은 왜 다시 룰라를 찾나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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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셸리(비앙카 콤파라투)는 이날만을 기다려왔습니다.

스무살이 되기를, 그래서 그곳에 갈 수 있기를 얼마나 바랐던가요.
지독히 가난하고 더러운 내륙을 떠나 ‘완벽한 유토피아’인 외해(外海)에서 살 수 있기를 말입니다.

넷플릭스가 브라질에서 만든 드라마 '3%'. '브라질판 헝거게임'이라 불리며 화제를 모았다.

넷플릭스가 브라질에서 만든 드라마 '3%'. '브라질판 헝거게임'이라 불리며 화제를 모았다.

미셸리가 사는 암울한 미래 세계에선 누구나 스무살이 되면 외해로 가는 테스트를 치를 수 있습니다. ‘인생의 단 한 번뿐인 기회’죠.
살인적인 경쟁에서 살아남으면 유토피아행 티켓을 거머쥘 수 있지만 탈락하면 그대로 끝, 평생 끝 모를 빈곤 속에서 살아야 합니다.

살아남는 건 오직 3%뿐이죠.

넷플릭스(동영상 스트리밍 업체)가 브라질에서, 브라질 감독과 배우들을 기용해 만든 드라마 ‘3%’(2016, 시즌1)는 이렇게 제목이 주는 강렬함으로 먼저 시선을 끄는 드라마입니다.

영화로(오늘은 드라마입니다만) 국제뉴스를 들여다보는 [임주리의 영화로운 세계] 두 번째 무대는 바로 이곳, 브라질입니다.
최근 이 나라 정국이 요동치고 있거든요.

지지자들과 함께하고 있는 룰라 전 대통령 [로이터=연합뉴스]

지지자들과 함께하고 있는 룰라 전 대통령 [로이터=연합뉴스]

브라질에 별 관심이 없으셔도 한때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대통령’으로 불렸던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 시우바(72) 전 대통령의 이름은 들어보셨을 겁니다.
룰라는 8년 간(2003-2010) 대통령 자리에 있었는데요, 8년이 지난 지금 다시 대선에 뛰어들었습니다. 심지어 압도적인 지지율 1위를 달리고 있고요.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대형 건설사 오데브레시로부터 뇌물을 받은 혐의 등으로 재판 중인데, 지난달 24일 항소심에서 징역 12년 1개월의 실형 선고를 받았거든요. 지지자들은 강력히 반발하고 있습니다. 룰라는 “사법 당국이 무죄를 입증할 증거는 무시했고 ,이는 정치탄압”이라며 유엔(UN) 고발을 추진하고 있고요.

그런데 말이죠.
왜 브라질 사람들은, 어쩌면 감옥으로 갈지도 모르는 옛 지도자를 다시 애타게 찾고 있는 걸까요?

◇ 현실보다 더 현실 같은 판타지 드라마 ‘3%’

다시 드라마 ‘3%’를 볼까요. (스포일러 아닙니다.)

넷플릭스가 브라질에서 만든 드라마 '3%'.

넷플릭스가 브라질에서 만든 드라마 '3%'.

미셸리와 동료들은 압박 면접을 거쳐 ‘절차’라고 불리는 혹독한 테스트를 치르기 시작했습니다. 외해로 가고 싶은 스무살 청년들은 점점 서로 배신하고 짓밟는 선택을 하게 되죠.

그런데 내륙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습니다. 3%만 선택받는 세상, 이 더러운 판을 뒤집어 보겠다는 조직 ‘대의’가 뭔가 일을 꾸미기 시작한 겁니다.
‘절차’ 총감독인 에제키에우(주앙 미겔)가 이를 모를 리 없죠. 그는 곧, 절차에 참가한 이들 중 대의의 첩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첩자가 만약 외해로 가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이야기는 점점 더 흥미로워집니다.

전 세계로 세를 불리고 있는 넷플릭스가 브라질에서 야심 차게 만든 첫 작품이 ‘3%’란 사실은 꽤 의미심장합니다. 근미래가 배경인 판타지이긴 하지만, ‘3%’의 엘리트만 풍족한 외해에서 살 수 있다는 설정은 마치 브라질의 극심한 빈부 격차를 꼬집는 듯하거든요.

브라질은 지니 계수(소득 불평등 지수로 1에 가까울수록 불평등)가 0.5529(2017년 기준, 한국은 0.4 수준)로, 심한 양극화로 악명이 높습니다.

◇ 5000만 빈민의 희망이었던 대통령 룰라

지지자들 앞에서 눈물 짓는 룰라 전 대통령 [로이터=연합뉴스]

지지자들 앞에서 눈물 짓는 룰라 전 대통령 [로이터=연합뉴스]

그러나 이곳 국민도 희망에 부풀어있던 때가 있었습니다.

룰라가 재임하던 시절이었죠.
대학 근처는 가보지도 못한 가난한 노동자 출신 룰라는 말 그대로 입지전적인 인물입니다.

그가 선반공으로 일하던 1960~70년대는 브라질 경제의 성장기였습니다. 그러나 군부 독재의 억압 아래 노동자들은 열악한 노동 환경과 저임금으로 고통받고 있었죠.

룰라의 삶 또한 그랬습니다.
열아홉 살에 야간작업을 하다 왼손 새끼손가락을 잃었고, 20대 땐 만삭 아내를 제대로 치료하지 못해 아내와 뱃속 아이를 모두 잃는 슬픔을 겪어야 했죠.

그럼에도 노동운동에 별 관심이 없던 그는 1969년 노동조합에 가입한 이후 무섭게 성장합니다. 6년 후 상베르나르두두캄푸 금속 노조위원장으로 뽑혔고, 1978년부터 3년간 이어진 총파업 때는 노동계 ‘전국구 스타’로 떠오르죠.

룰라가 2018년 대선 출마를 선언하자 지지하기 위해 모여든 사람들 [로이터=연합뉴스]

룰라가 2018년 대선 출마를 선언하자 지지하기 위해 모여든 사람들 [로이터=연합뉴스]

룰라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노동자들의 이익을 대변하려면 정당을 만들어야 한다며 1980년 노동자당을 창당한 겁니다. 300여 명으로 시작한 이 당은, 룰라가 2003년 대선에서 승리하며 집권당이 되죠.

3수 끝에 대통령이 된 룰라는 신자유주의를 어느 정도 수용해야 한다는 현실을 과감히 받아들이고, 노선이 다른 이들과도 손을 잡습니다. ‘실용주의 좌파’였던 셈이죠.
그러나 빈민을 구제해야 한다는 의지만큼은 강경하게 밀어붙였습니다. 그렇게 나온 것이 ‘보우사 파밀리아’(Bolsa Familiaㆍ아이를 학교에 보내는 것 등을 조건으로 보조금 지급)라는 유명한 복지제도입니다.

비판도 나왔지만 룰라는 “부자를 돕는 것은 투자라고 하고, 빈민을 돕는 것을 비용이라고 한다”며 밀고 나갔죠.
덕분에 5000만 여명(2011년 기준)이 절대적 빈곤에서 벗어났습니다. 세계은행, 유엔식량농업기구 등도 이를 무척 효율적인 정책이라 평가했고요.

룰라는 87%라는 놀라운 지지율을 유지하며 대통령직에서 물러납니다.
퇴임 시 이렇게 절대적인 사랑을 받는 대통령은 전 세계적으로도 찾기 힘들죠. 이어 룰라의 후계자라고 할 수 있는 지우마 호세프가 대통령으로 당선됩니다.

◇ 노동자들이 만든 당, 부패 혐의로 추락하다

지난달 25일 함께한 룰라 전 대통령과 지우마 호세프 전 대통령 [EPA=연합뉴스]

지난달 25일 함께한 룰라 전 대통령과 지우마 호세프 전 대통령 [EPA=연합뉴스]

호세프는 나름대로 국정을 잘 이끌어나갔고, 재선에도 성공하죠.
그러나 불운이었을까요.
그의 집권 시기는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의 여파로 세계 경제가 흔들리고 있던 때였습니다. 특히 국제 원자재 가격이 폭락하자, 원자재 수출 비중이 작지 않은 브라질은 직격탄을 맞았습니다.

경제가 어려워지자 호세프는 긴축 정책을 씁니다.
복지 정책을 축소하자 노동자당의 지지층이 등을 돌렸죠. 기득권층과 우파가 그의 편을 들어줬을 리 없습니다. 부패 관련 조사를 막아달라고 요청한 우파 인사의 부탁을 거절한 일 또한 괘씸죄가 됐고요.
이렇게 지지층과 반대파 모두가 등을 돌리며 호세프는 2016년 탄핵당합니다. 의회 동의 없이 국영은행에서 돈을 빌려 국가 재정으로 사용했다는 이유였죠.

문제는 노동자당 내부에도 있었습니다.

룰라가 구속돼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집회 [AP=연합뉴스]

룰라가 구속돼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집회 [AP=연합뉴스]

어떤 문제였느냐고요?
1970년대, 독재 정권은 민주 세력이 단결하는 것을 막기 위해 정당들이 마구 만들어질 수 있는 판을 깔았습니다. 때문에 20~30개 정당이 난립하게 됐죠. 집권당은 필히 여러 정당과 연정을 해야 했는데, 이 과정에서 노동자당이 소수정당에 뇌물을 제공한 겁니다.

이것은 시작일 뿐이었죠.
‘오데브레시(브라질 대형 건설업체) 스캔들’을 비롯한 정치인들의 대형 부패 사건이 줄줄이 터졌습니다. 검찰은 2014년부터 수사를 시작, 지금까지 300명가량의 정치인을 기소했죠.

부패 정치인은 수없이 많았지만, 특히 집중적으로 공격당한 건 노동자당이었습니다. 국민은 큰 배신감을 느꼈고 룰라와 호세프의 정당은 몰락해갔죠.

“노동자당을 겨냥한 법정 포퓰리즘”(『2017 라틴아메리카: 국제정세 변화와 영향』에서)이란 비판도 나왔지만, 집권당에 배신감을 느낀 국민은 사법부에 열광했습니다.

◇ 다시, 브라질 사람들은 룰라를 찾는다

호세프가 탄핵당하자, 한때 노동자당과 연정했던 중도우파 브라질민주운동당의 미셰우 테메르(당시 부통령) 정부가 집권했습니다.

그러나 테메르 정부는 곧 한계를 드러냅니다. 노동자ㆍ서민 계층의 반발에도 노동 유연화가 핵심인 노동법 개정을 하고, 국영전력회사를 민영화하는 등의 정책을 펼쳤지만, 최악의 장기침체는 끝날 줄 모르고 있거든요.
무엇보다 테메르 본인을 비롯한 우파 정치인들의 엄청난 부정부패 사실이 드러나며 사람들을 질리게 했습니다.

테메르 정부의 지지율이요?
5% 미만입니다. 역대 최악이죠.

룰라 전 대통령에 대한 항소심 판결이 있었던 지난달 24일 집결한 룰라의 지지자들. [EPA=연합뉴스]

룰라 전 대통령에 대한 항소심 판결이 있었던 지난달 24일 집결한 룰라의 지지자들. [EPA=연합뉴스]

행진하고 있는 룰라 전 대통령의 지지자들 [AFP=연합뉴스]

행진하고 있는 룰라 전 대통령의 지지자들 [AFP=연합뉴스]

브라질 사람들은 룰라를 다시 찾기 시작했습니다.

세계 8위 경제 대국이었던 시절에 대한 향수, 영화 같은 삶을 산 룰라 개인의 매력과 카리스마. 무엇보다 그의 ‘실용주의’가 나라를 다시 일으킬 수 있을 거란 믿음이 모두 더해진 거죠.

“부패한 우파 대통령이 하루아침에 노동권을 무너뜨리는 것을 지켜본 브라질 국민은 큰 충격을 받았다. (중략) 대선 출마를 선언한 룰라에 대한 지지율이 38%까지 오른 이유다”(『역설과 반전의 대륙』에서)

물론 인기는 예전 같지 않습니다.
현재 상황으로는 출마 가능성도 불투명해 보이고요. 대법원에 상고한 후 후보로 등록할 수는 있지만, 법원의 허락이 필요하고, 당선되더라도 대법원에서 유죄가 확정되면 자리에서 내려와야 합니다.

만약, 다시 대통령이 된다 해도 예전처럼 브라질을 황금기로 이끌 수 있을지는 미지수입니다.
룰라가 브라질을 이끌 당시는 국제 원자재 시장 등이 호황이었기에 성장과 복지를 동시에 밀어붙일 수 있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거든요.

무엇보다 그에게는, 아니 노동자당에는 ‘새로운 비전’이 뚜렷하지 않습니다. 현재 청년층이 이 당을 ‘기성 정당’으로 여기는 이유죠.
이런 상황에서 국민들이 아예 새로운 인물을 원할 가능성도 큽니다. 지난해 프랑스 대선에서 에마뉘엘 마크롱이 당선된 것처럼요.

넷플릭스가 브라질에서 만든 드라마 '3%'.

넷플릭스가 브라질에서 만든 드라마 '3%'.

너무 숨차게 달려왔네요.
다시 ‘3%’ 이야기로 끝을 맺을까 합니다.

미셸리를 비롯한 주인공들이 각자의 사연을 풀어내며 치열한 테스트를 하나하나 통과하는 동안, 3%만을 위한 세상에 반기를 든 ‘대의’ 또한 완벽하지 않다는 사실이 조금씩 드러납니다.
‘대의’가 노동자당과 겹쳐지는 건 비단 저만의 생각일까요?

올해 방영될 예정인 시즌2는 어떨지 궁금해집니다.
사실, 10월 치러질 브라질 대선 결과가 더 궁금하지만요.
임주리 기자 ohmaj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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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3%'

 드라마 '3%'는 넷플릭스가 브라질 원작의 판권을 사들여 제작한 오리지널 드라마입니다.
 인구 2억의 브라질은 넷플릭스에 아주 큰 시장이거든요. 현지에선 '브라질판 헝거게임'으로 입소문이 나 인기를 끌었습니다.

 드라마를 보신다면 브라질식 포르투갈어,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배우들이 낯설게 느껴질지도 몰라요.
 하지만 그만큼 신선한 재미를 줍니다.

넷플릭스가 브라질에서 만든 드라마 '3%'

넷플릭스가 브라질에서 만든 드라마 '3%'

 다만 SF 장르의 팬이라면, 조금 심심하실 수도 있어요. 이 장르만이 보여줄 수 있는 대담한 상상력이나 화려한 액션보다는, 철학적 질문과 쫀쫀한 구성, 캐릭터의 매력으로 승부를 보는 편이거든요.

 하지만 시즌2에서는 '외해'의 모습이 펼쳐질 것 같으니, 더 풍성한 볼거리를 기대할 수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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