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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툰 강국 '대한민국'에서 웹툰 작가들이 착취당하는 법

중앙일보

입력

지난 11일 서울 논현동 레진코믹스 본사 앞에서 작가와 독자 100여 명이 항의 시위를 했다. 웹툰 작가들은 처우 개선을 요구하고 블랙리스트 의혹 등에 대한 해명과 사과를 촉구했다. [중앙포토]

지난 11일 서울 논현동 레진코믹스 본사 앞에서 작가와 독자 100여 명이 항의 시위를 했다. 웹툰 작가들은 처우 개선을 요구하고 블랙리스트 의혹 등에 대한 해명과 사과를 촉구했다. [중앙포토]

7240억원. KT경제경영연구소가 밝힌 지난해 국내 웹툰의 시장 규모다. 2020년 이 시장 규모는 1조원에 이를 것으로 예측된다. 네이버 웹툰, 코미코, 카카오페이지 등 웹툰 플랫폼의 해외 진출이 활발하게 이뤄지면서 한국 웹툰의 시장은 더욱 넓어지고 있으며, 드라마·영화 등 다양한 장르로 변용되며 K-스토리의 원천이 되고 있다. 어느덧 웹툰이 한류의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는 얘기다.

그런데 이 화려한 금자탑의 이면에는 웹툰 작가들의 부당한 착취가 서려 있다. “웹툰계의 성취에 반해 우리가 그에 걸맞은 옷은 입고 있느냐를 보았을 때 좀 허무하다”는 게 '미생' 등 각종 명작을 그려낸 윤태호 작가(한국만화가협회 회장)의 얘기다. 이에 대한 해결 방안을 마련해보고자 30일 서울 삼청동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공정한 웹툰 생태계 조성을 위한 토론회’가 열렸다. 토론회에 참석한 이림 작가가 밝힌 사례를 통해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렇다.

강제 연재 종료하고, 지각비 걷고…허울 뿐인 웹툰 강국

웹툰을 연재하고 있는 A사는 지난해 6월 웹툰 연재 작가 30여명에게 일방적으로 연재 종료를 통보했다. 매출이 저조하다는 이유였다. 작가들은 작품을 마무리할 수 있도록 기간을 달라고 요청했고, A사는 3~5회 안에 종료하라며 통보했다. 일부 작가들은 연재가 중단된다는 공지조차 올리지 못했다.

“연재를 완결까지 보장하겠다”던 계약 당시의 구두 약속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이에 일부 작가들이 반발해 계약 해지를 요구하자, A사는 이미 지급된 원고료의 반환을 요구했다. 뒤로는 미완결 작품을 중국에 서비스한다며 파일을 요구하거나, 작가에게 사전 고지 없이 외부 사이트에 작품을 제공하기도 했다.

한 웹툰작가가 자신의 트위터에 올린 글. [트위터 캡처]

한 웹툰작가가 자신의 트위터에 올린 글. [트위터 캡처]

다른 웹툰 플랫폼인 B사는 작가들이 월 2회 이상 지각할 경우 월 매출의 최소 3%에서 최대 9%까지 지각비를 징수했다. 지각비는 웹툰 업데이트 이틀 전 오전 3시까지 마감하지 않을 경우 부과됐다. 이 때문에 실제 지각비로 연평균 1000만원~1500만원을 낸 작가도 있다. 플랫폼에 구체적이고 금전적인 피해가 없어도 지각비가 징수됐는데, 작가를 관리하는 PD와의 친소 관계에 따라 지각비가 면제되기도 해서 기준이 들쑥날쑥했다. B사는 여러 관행에 문제를 제기하는 작가에 대해 웹툰 프로모션에서 제외하거나 불이익을 주는 등 블랙리스트를 작성했다는 의혹도 받고 있다.

이외에도 웹툰 작가들이 겪고 있는 대표적인 '갑질'로는 ▶주관적인 평가 기준에 의한 반복적인 수정 요구 ▶2차 저작물 독점 ▶작가도 모르는 웹툰 재연재 ▶아파도 쉽지 않은 휴재 ▶비밀 유지 조항 강요 등이 있었다.

구두 계약 관행부터 바로 잡아야

이날 토론회에 참석한 조일영 서울시 공정경제과 변호사는 우선 계약부터 똑바로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조 변호사는 “서울시에서 지난해 발표한 ‘만화·웹툰 분야 불공정 거래 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불공정 계약 조건을 강요당한 경우가 있다고 답한 비율이 36.5%였다”며 “각종 분쟁을 예방하기 위한 첫걸음은 계약서를 잘 쓰는 것이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계약이라는 건 대등한 당사자 간 이뤄지는데, 작가들은 여러 가지 이유로 사업자들에 비하면 열악한 처지"라며 "을의 위치에 있는 작가들이 피해를 보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조 변호사가 구체적으로 제시한 내용은 ▶계약의 목적을 명시하고 ▶계약 시 연재 기간, 연재 분량, 연재 일, 연재 방식, 연재 사이트 등을 계약서에 표로 정리해서 한 눈에 확인할 수 있게 하고 ▶계약 시작 일과 계약 종료 일을 명시한 뒤 계약 연장이 필요할 시 계약 갱신을 하고 ▶웹툰 데이터 보관일을 정하고, 보관 기간 종료 시에는 데이터를 삭제한 후 작가에게 확인 문서를 보내게 하는 내용을 계약서에 넣는 등 주로 기존에는 구두 계약 내지는 불분명하게 넘어갔던 내용을 구체적으로 기재하도록 했다.

토론자로 참석한 황정한 만화가는 "작가들은 작품이 흥행해 해외진출, 2차 저작물 판권 판매 등 다양한 기회비용을 희망하며 적은 비용을 받더라도 작품을 제작하는데, 이러한 희망의 기회비용마저 선점하려는 플랫폼, 제작사, 에이전시의 움직임들이 작가들을 그저 노동자로 전락하게 하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고 말했다. 윤태호 작가는 "큰 정책도 중요하지만 디테일에서 출발해야 한다"며 "계약이 업체와 작가 간합의에 따라 보다 공정하게 이뤄지고 전문적으로 이를 집행해야 한다"고 말했다. 박인하 청강문화산업대 교수는 "영화진흥위원회 산하의 공정환경 조성센터와 같이, 조사와 중재, 교육을 담당하는 기관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노진호 기자 yesn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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