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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광등 아트'는 어떻게 현대미술의 걸작이 되었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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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6일 개관한 롯데뮤지엄에 전시 중인 댄 플래빈 작품. 미니멀리즘 아티스트인 댄 플래빈은 형광등이 발산하는 빛에 의해 전시 공간이 변화하는 현상에 주목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지난 26일 개관한 롯데뮤지엄에 전시 중인 댄 플래빈 작품. 미니멀리즘 아티스트인 댄 플래빈은 형광등이 발산하는 빛에 의해 전시 공간이 변화하는 현상에 주목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독특한 인연이다. 1954년 오산에서 미 공군으로 복무했던 댄 플래빈(1933~1996)이 뒤늦게 한국을 찾았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20여 년이 지나 이번에 한국을 방문한 것은 그의 분신(分身)과도 같은 작품들이다. 60여년 전 한국에서 그는 기상 정보를 수집하는 기상병이었지만, 이번에 그의 이름을 달고 온 작품들은 '미니멀리즘 예술의 거장' 댄 플래빈을 보여준다. 지난 26일 서울 롯데월드타워 7층에 문을 연 롯데뮤지엄의 '댄 플래빈, 위대한 빛:1963-1974'에서다.

롯데뮤지엄 개관 전시 '댄 플레빈, 위대한 빛' #미니멀리즘의 거장 플래빈의 초기작 조명 #'보는' 작품 아니라 '경험하는' 작품으로 혁신 #

 댄 플래빈의 '무제' (자넷과 앨런에게) 1966년 작, 243.8 x 243.8 x 12.7 cm[사진 롯데뮤지엄]

댄 플래빈의 '무제' (자넷과 앨런에게) 1966년 작, 243.8 x 243.8 x 12.7 cm[사진 롯데뮤지엄]

1322㎡(약 400평) 규모의 드넓은 전시장에서 관람객을 맞이하는 것은 곳곳에 질서 있게 배치된 형광등이 전부다. 플래빈이 63년부터 74년 사이에 작업한 초기작 14점이다. 한쪽 벽에 사선으로 세워져 노란 불빛을 내는 2.4m의 형광등부터 나란히 수직 방향으로 세워진 백색 형광등까지 배치된 형태도 가지가지다. 수많은 형광등이 놓인 전시 공간은 관람객의 발걸음을 따르며 빛으로 말을 걸어온다. 관람객의 몸으로 스며드는 듯한 빛이다.

'댄 플래빈, 위대한 빛'전은 플래빈의 첫 해외 전시다. 롯데뮤지엄이 '현대 미술의 보고(寶庫)'라 불리는 미국 디아 아트 파운데이션( Dia Art Foundation,이하 디아)의 협력으로 마련했다. 이번 전시는 디아가 해외 기관과 함께 여는 첫 전시라는 점에서도 눈길을 끈다. 디아는 60~70년대 현대 예술의 걸작을 다수 소장하고 있는 비영리재단으로, 뉴욕에 위치한 '디아 첼시'(Dia:Chelsea)와 비콘 지역에 위치한 '디아 비콘'(Dia: Beacon)을 운영하고 있다. 롯데뮤지엄 개관에 맞춰 내한한 디아의 수석 큐레이터 커트니 제이 마틴(Courtney J. Martin)은 플래빈은 "시대의 변화를 일찍이 자각한 선구자였다"고 소개했다.

댄 플래빈의'1963년 5월 25일의 사선'(콘스탄틴 브랑쿠시에게)1963년작. (to Constantin Brancusi) 1963년 180.3 x 177.8 x 11.4 cm. [사진 롯데뮤지엄]

댄 플래빈의'1963년 5월 25일의 사선'(콘스탄틴 브랑쿠시에게)1963년작. (to Constantin Brancusi) 1963년 180.3 x 177.8 x 11.4 cm. [사진 롯데뮤지엄]

전시장에서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1963년 5월 25일의 사선'(부제 '콘스탄틴 브랑쿠시에게')은 단순하다. 형광등 하나를 벽에 비스듬히 세워 놓았다. 마틴은 이를 가리켜 "플래빈이 처음으로 형광등 하나만을 사용한 것"이라며 "그의 빛 작업에 새로운 출발점을 제공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고 설명했다.

 한국에서 기상병으로 근무하다가 미국으로 돌아간 플래빈은 뉴욕 컬럼비아대에서 미술사를 공부했다. 이후 60년대 초반부터 부조 형태의 조각에 여러 전구를 붙이는 '아이콘' 연작을 만들었다. '1963년 5월 25일의 사선'은 그 실험 끝에 나온 작품으로, 이후 플래빈은 오직 형광등만을 사용하는 작업에 주력한다. 형광등의 빛과 그림자가 작품이 놓인 공간을 다르게 보이게 하는 현상에 매료된 것이다. 플래빈은 "빛으로 실제 공간을 해체하고 유희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며 "빛이야말로 매우 분명하고 열려 있으며, 직접적인 예술"이라고 말한 바 있다.

'유명론의 셋' (윌리엄 오캄에게)1963년작. 243.8 x 10.2 x 12.7 cm_243.8 x 20.3 x 12.7 cm_243.8 x 30.5 x 12.7 cm. [사진 롯데뮤지엄]

'유명론의 셋' (윌리엄 오캄에게)1963년작. 243.8 x 10.2 x 12.7 cm_243.8 x 20.3 x 12.7 cm_243.8 x 30.5 x 12.7 cm. [사진 롯데뮤지엄]

플래빈은 이후 각각 한 개, 두 개, 세 개의 형광등이 수직 방향으로 차례로 서 있는 '유명론의 셋'(윌리엄 오캄에게) 등을 거쳐 '장벽' (barrier)과 같이 복잡한 작품으로 나아갔다. '장벽'은 빛을 활용해 공간이나 통로의 일부분을 가로막는 일군의 작품을 가리킨다. 이번 전시작 중 하이라이트로 꼽히는 '무제'(당신, 하이너에게 사랑과 존경을 담아, 1973년)가 그 중 하나다. 플래빈이 이토록 애정을 듬뿍 전한 '하이너'는 디아 설립자인 하이너 프리드리히를 가리킨다. 무명시절 자신에 대해 물심양면 지원을 아끼지 않은 후원자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그는 굳이 감추지 않았다. 이 밖에도 플래빈은 제목을 '무제'로 하면서도 자신에게 영감을 준 예술가나 철학자 등의 이름을 넣었다. 관람자들에게 이야기를 상상하게 하기 위한 의도다.

'무제'(당신, 하이너에게 사랑과 존경을 담아)1973년작. 이른바 '녹색 장벽'(Green Barrier)라고 불리는 작품이다. 40m에 달하는 거대한 녹색의 빛은 전혀 다른 공간을 경험하게 한다.[사진 롯데뮤지엄]

'무제'(당신, 하이너에게 사랑과 존경을 담아)1973년작. 이른바 '녹색 장벽'(Green Barrier)라고 불리는 작품이다. 40m에 달하는 거대한 녹색의 빛은 전혀 다른 공간을 경험하게 한다.[사진 롯데뮤지엄]

 플래빈의 독창성에 대해 마틴은 "그는 기존의 고정관념을 깨고 조각(sculpture)의 영역을 넓혔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그가 작품에 무엇을 더해서가 아니라 불필요한 것을 덜어내고 단순한 재료를 쓰며 예술의 영역을 확장했다는 점"이라고 강조했다. 미술사에서 플래빈을 미니멀리즘의 맥락에서 이해하는 이유다. 과거엔 예술 작품의 재료로 여겨지지 않던 형광등을 과감하게 재료로 썼다는 점 역시 혁신적이었다. 형광등은 그의 전시 공간에서 하나의 오브제이자 그 빛으로 회화적인 효과를 내는 기능을 한다.

'무제'바바라와 요스트에게) 1966년, 243.8 x 243.8 x 12.7 cm.[사진 롯데뮤지엄]

'무제'바바라와 요스트에게) 1966년, 243.8 x 243.8 x 12.7 cm.[사진 롯데뮤지엄]

마틴은 또 "플래빈은 형광등을 활용해 작품이 놓인 공간 자체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며 "플래빈에게 전시장은 단순히 작품을 담는 공간이 아니라 작품의 일부가 된다"고 말했다. 궁극적으로 관람객은 플래빈의 작품을 단지 눈으로 보는 게 아니라 온몸으로 경험하는 것이라는 얘기다.

미국 디아 아트 파운데이션의 수석 큐레이터 커트니 마틴.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미국 디아 아트 파운데이션의 수석 큐레이터 커트니 마틴.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예일대에서 미술사를 전공한 마틴은 지난해 디아에 큐레이터로 합류하기 전에 브라운대 조교수로 재직하며 미술사를 가르쳤다. 그는 "20년간 미술사를 연구하며 플래빈 작품을 익숙하게 보아왔는데도 롯데뮤지엄에 설치된 것을 보니 완전히 달라 보였다"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공간이 달라지니 작품이 마치 새로운 캐릭터를 얻은 것처럼 극적으로 달라 보인다. 플래빈은 빛을 통해 계속 새롭게 말을 걸어오고 있다"고 말했다.

 ▶ 롯데뮤지엄(LMoA·Lotte Museum of Art)=롯데문화재단(이사장 신동빈)이 2018년 1월 26일 롯데월드 타워 7층에 문을 연 미술관으로 세계 현대미술의 다채로운 흐름을 담아내겠다는 포부다.  1320㎡ 규모의 전시 공간은 조병수 건축가가 설계했다. 가족과 어린이, 성인 등 전 연령층을 대상으로 하는 'LMoA(엘모아) 아카데미'를 운영할 예정이며 전시 콘텐트와 연계된 교육 프로그램을 진행한다는 방침이다. 송파구와 함께 '송파구 박물관 나들이'를 진행해 지역 초등학생 대상의 교육 프로그램도 활성화하고 지역 소외 계층을 위한 초대 행사도 열 계획이다.

이은주 기자 jul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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