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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그를 보내는 노래인듯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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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8호 27면

김광석 추모음반 ‘가객’. 1996년에 처음 나온 걸 LP로 리이슈했다.

김광석 추모음반 ‘가객’. 1996년에 처음 나온 걸 LP로 리이슈했다.

1996년에 나는 무엇을 하고 있었나. 돌이켜보니 사느라 정신이 없었다.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입주할 아파트가 건축 중이었으며, 회사도 대변혁의 와중에 있었다. 그래도 그렇지, 그해 1월의 김광석 사망이 내 기억에 없다.

an die Musik: #김광석 추모음반 ‘가객(歌客)’

생각해보면 이상한 일도 아니다. 나는 김광석을 몰랐다. 가족 모임에서 조카가 ‘이등병의 편지’를 불렀을 때도 누구 노래인지 몰랐을 정도다. 김광석은 TV출연을 좋아하지 않았다. 리허설하고 녹화하는 과정을 행복해하지 않았다고 한다. 대신 소극장 공연을 즐겼다. 그가 추구하는 음악은 대중적이 아니었고 ‘노찾사’ 등 민중가요패의 일원으로 활동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잘 아는 가수는 아니었다. 그는 세상을 떠난 뒤 유명해졌으니 생전의 그를 모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게다가 그 무렵 난 클래식 음악의 바다에 빠져 있었다.

그를 알게 된 것은 2014년 리이슈 LP로 나온 4집 앨범을 통해서다. ‘일어나’ ‘너무 깊이 생각하지 마’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같은 노래를 들으며 ‘그가 바로 김광석이었구나’하는 상념에 빠졌다. 그 노래들은 광화문의 카페에서, 취재 차량의 라디오에서 무심코 흘러나와 나의 귀를 붙들곤 했었다. 4집에 이어 ‘다시부르기’ 12집을 들으며 김광석은 비로소 나의 레코드 라이브러리에 자리를 잡았다. 바흐나 모차르트처럼 그는 하늘나라로 간 뒤에야 내가 좋아하는 음악가가 되었다.

2017년 여름은 온 나라가 김광석 이야기로 들끓었다. 뒤늦게 불거진 김광석과 딸의 죽음을 둘러싼 주장과 반박들. 악몽과 같은 그 논란을 다시 떠올리고 싶지는 않다. 그 소란의 와중에 음반이 한 장 발매됐는데 한여름에 주문한 것이 겨울이 되어서야 배달됐다. 김광석이 떠난 뒤 그를 그리워하는 친구들이 만든 추모음반 ‘가객(歌客)’으로 1996년 말에 나온 걸 500매 한정 LP로 다시 낸 것이다. 일련번호 145가 찍힌 음반이 내 차지가 되었다.

음반제작자 최성철은 “김광석의 유작 녹음, 참여 뮤지션들의 포효하지 않는 울분을 담은 절창이 만나 ‘비극적인 품위’를 오롯이 담아 낸 최고의 트리뷰트 앨범”이라고 평가했다. 안치환이 부른 ‘겨울새’ 권진원의 ‘내 사람이여’ 등은 음반을 위해 새로 만든 노래들인데, 일회성 추모 음악을 훨씬 뛰어넘는 명곡이다.

그러나 음반 ‘가객’은 우리 가요사의 빛나는 시도와 좌절이라는 안타까운 장면의 기록이기도 하다. 김광석은 1995년부터 한국 현대시를 노래로 만드는 작업에 착수했다. 시인·작곡가인 백창우의 제안에 의한 것이었다. 정호승·안도현·김용택·도종환 등의 작품에 곡을 붙여 ‘노래로 만나는 시’라는 음반으로 발표하자는 것이었다. 시인 한 명당 앨범 한 장에 해당하는 분량이라 방대한 작업이었다.

그러나 야심찬 계획은 그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무산되고 말았다. 죽기 몇 시간 전인 96년 1월 6일 새벽, 백창우와 만났을 때도 그 작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는 문제를 논의했다고 하니 안타깝기 그지없다. 그 작업이 계획대로 진행되었다면 우리가 사랑하는 많은 시들이 애창곡이 되어 있을 것이다.

아쉬움을 달래주는 것은 음반 2번 트랙에 실려 있는 정호승 시인의 ‘부치지 않은 편지’다. 김광석이 프로젝트를 시작하며 녹음한 곡 중 유일하게 남아 있는 것이다. 시는 1987년 시집 『새벽편지』에 처음 발표됐다. “시대의 새벽길 홀로 걷다가 / 사랑과 죽음이 자유를 만나” 같은 곳에서는 시대를 바라보는 시인의 비장함이 느껴진다.

그러나 김광석의 노래로 들으면 그를 위한 시로 읽히기도 한다. 특히 마지막 부분이 그렇다. “산을 입에 물고 나는 / 눈물의 작은 새여 / 뒤돌아 보지 말고 / 그대 잘 가라.” ●

글 최정동 기자 choi.jeongd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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