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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기루 도시를 채운 것은 바로 문학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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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8호 16면

이오시프 샤를레만의 석판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궁전 다리’(1852~1862)

이오시프 샤를레만의 석판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궁전 다리’(1852~1862)

닥터 도스토옙스키는 두 아들을 위한 상급학교로 상트페테르부르크 공병학교를 진즉에 점찍어 두었다. 인문학 전공자는 졸업 후 취업이 불투명했기 때문이었다. 1837년 5월의 어느 쌀쌀한 날, 도스토옙스키 형제는 아버지와 함께 마차를 타고 러시아 제국의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했다. 푸슈킨이 일찍이 “북국의 꽃이자 기적인 청년 도시”라 노래 불렀던 바로 그곳이다. 마차에서 발을 내딛는 순간, 소년 표도르는 생전 처음 보는 찬란한 유럽풍의 도시 앞에서 넋을 잃었다. 골목과 수도원과 집 대신 넓디 넓은 대로와 정부청사와 운하가 눈앞에 있었다.

석영중의 맵핑 도스토옙스키 <4> #상트페테르부르크: 도스토옙스키의 도시

이후 44년 동안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도스토옙스키의 주된 거주지였다. 변덕스러운 운명은 그를 시베리아 오지로, 중부 러시아의 시골로, 유럽으로 끌고 다녔다. 하지만 그는 언제나 다시 이 도시로 돌아왔고, 이 도시에서 눈을 감았다. 첫 소설에서 마지막 소설에 이르기까지 여러 편이 이 도시에서 씌어졌거나 이 도시를 배경으로 했다. 도스토옙스키를 낳은 것은 모스크바지만 그를 키운 것은 상트페테르부르크인 셈이다. 그래서 문학 좀 한다는 사람들은 ‘도스토옙스키의 페테르부르크’라는 표현을 좋아한다. 상트페테르부르크와 인근 명소를 둘러보는 관광상품 중에는 반나절 동안 진행되는 ‘도스토옙스키와 걷기’ 같은 상품도 있는데, 박학다식한 러시아인 가이드가 대문호의 인생 이야기를 속사포처럼 쏟아낸다.

유럽 따라잡기 위해 만든 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운하 석판화(1820), 작자 미상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운하 석판화(1820), 작자 미상

상트페테르부르크 운하 풍경

상트페테르부르크 운하 풍경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어떤 도시인가. ‘팩트’만 가지고 보아도 예사롭지 않다. 러시아 역사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1696년 전 러시아의 유일한 군주로 등극한 젊은 황제 표트르는 1703년 핀란드만으로 흘러들어가는 네바 강 하구 삼각지에 요새를 구축하고 그것을 시발점으로 도시를 건설했다. 수십만 명의 농노와 죄수와 전쟁 포로가 러시아 전역에서 차출되어 물컹물컹한 늪지에 배수로를 파고 댐을 쌓고 말뚝을 박는 기괴하고 거대한 토목공사에 투입됐다. 덕분에 끝이 안 보이던 황량한 진흙탕은 순식간에 석조 궁전과 다리와 분수와 정원과 대로로 가득 찬 호화로운 도시로 둔갑했다.

작업 환경이 어떠했을지는 상상도 하기 싫다. 건설 도중 희생된 노동자의 수는 최소 2000명에서 최대 15만 명으로 추산된다. 숫자상의 커다란 차이는 그만큼 많은 노동자가 시도 때도 없이, 숫자를 셀 겨를도 없이, 그냥 막 죽어나갔다는 뜻이리라. 인간의 뼈 위에 세워진 도시라는 별명이 괜한 것이 아니다.

이토록 큰 희생을 치루고 건설된 도시는 ‘표트르의 도시’라는 의미의 페테르부르크라 불린다. 건설자 황제는 1712년 페테르부르크로 천도를 감행하고 이때부터 러시아 역사에는 ‘페테르부르크 시대’라는 이름의 새 시대가 막을 올린다.

러시아는 그때까지 서구 문명의 원천인 그리스 로마 문명과도, 화려한 르네상스와도 단절되어 있었다. 988년에 동방정교를 국교로 채택한 때문이다. 서구의 척도로 재면 러시아는 17세기까지도 여전히 중세에 속한 나라였다. 철권 황제는 이런 조국을 단박에 선진 문명 수준으로 격상시키기 위해 무자비하고 대담한 근대화·서구화 정책을 실시했다. 의식주와 같은 일상에서부터 행정부와 군대와 교육에 이르기까지, 러시아의 삶을 완전히 서구식으로 개편했다. 정치와 종교를 분리시켰고, 서구식 문화와 예술을 뭉텅이로 수입했다. 황제가 새 수도에 러시아식이 아닌 독일식 이름(페테르-부르크)을 부여한 것만 보아도 서구화가 얼마나 절실했는가를 알 수 있다.

도스토옙스키가 발을 디딘 그 시점에서 페테르부르크는 명실공히 러시아 속의 유럽이었고 유럽 속의 러시아였다. 18세기 내내 몰아친 서구화의 광풍으로 도시는 눈부시게 발전했다. 10년 동안 3만 5000개의 건물이 들어섰고, 20년 동안 인구가 20만 증가했다. 세워진 지 1세기 만에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런던·파리·베를린·비엔나와 더불어 유럽 5대 도시로 손꼽히게 되었다.

그런데 바로 이 발전의 속도가 문제였다. 너무 빨리, 너무 철저하게 서구화되었다는 것이 문제였다. 당연히 빛과 그림자가 공존할 수밖에 없었다.

다른 도시 모방하고 복제 … 환상적이지만 실체는 없어

폴 들라로슈가 유화로 그린 표트르 대제(1838)

폴 들라로슈가 유화로 그린 표트르 대제(1838)

우선 실체의 문제부터 보자. 표트르 대제는 실용 정신의 화신이었다. 조국의 선진화와 세속적인 주권국가의 확립이라는 일관된 이념은 그를 역대 황제 중 가장 현실적인 황제로 만들어주었다. 거구의 황제는 한 손에는 측량기를, 다른 한 손에는 지도를 쥐고 개혁의 최전선을 누비고 다녔다. 직접 배를 만들고 손수 집을 짓고 본인 스스로 톱을 들었다.

그에게 학문이란 근본적으로 과학과 기술을 의미했으며 교육이란 직업훈련과 같은 뜻이었다. 역사는 지리에 흡수되었고 문학은 외국어 습득과 문헌 번역의 동의어가 되었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이토록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황제가 건설한 도시는 1세기가 지나자 가장 환상적인 도시, 도스토옙스키의 표현을 빌려 말하자면 “지구상에서 가장 추상적인 도시”로 불리게 되었다.

확실히 상트페테르부르크에는 다른 도시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기묘한 매력이, 몽환적인 아름다움이 있다. 대리석과 화강암으로 지어진 거대한 바로크·로코코·신고전주의 양식의 건물들, 유유히 흐르는 운하에 반사되는 다리와 가로등, 거기에 발트해에서 몰려오는 짙은 안개와 눈보라, 여름이면 며칠씩 계속되는 백야까지 더해지면 환상적이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그러나 환상적이라는 것이 실체가 없다는 것을 의미할 때에는 곧 최대의 약점이 된다.

여러 해 전 페테르부르크에서 어느 한국인 여행자와 버스를 함께 탄 적이 있다. 유럽은 가 보았지만 러시아는 처음이라고 했다. 나는 페테르부르크와 관련해 내가 아는 지식을 총동원하여 입에 침이 마르도록 설명을 해주었다. 너무도 독특하고 환상적인 도시라는 말로 설명을 끝냈을 때 여행자의 반응은 의외로 시큰둥했다. 그녀는 자기 눈에는 환상적인 것은 별로 없고 건물이고 운하고 모두 유럽에서 본 것과 비슷하다며 내 장황한 설명에 쐐기를 박았다. 뭐가 그리 독특하냐는 표정이었다.

여행자의 반응은 납득할 만하다. 사실 페테르부르크는 다른 유럽 도시의 복제본이었다. 그래서 환상적으로 보였다. 세워질 때부터 도시는 거대한 스케일의 과시형 소비 그 자체였다. 모든 것이 유럽처럼 보이기 위해 비싼 대가를 치루고 급조된 환영처럼 보였다. 그래서 도스토옙스키는 “이곳의 모든 것은 혼돈이자 합성물이다. 많은 것이 캐리커쳐의 소재다”라고 했다.

네바다 사막 한가운데 어느 날 갑자기 생겨난 저 ‘환상적인’ 라스베이거스가 신기루에 비유되는 바로 그만큼, 상트페테르부르크도 신기루에 비유될 만하다. 베르사이유 궁전과 암스테르담의 운하와 바티칸의 베드로 성당을 모방한 건축 덕분에 “북방의 파리” “새로운 네덜란드” “영원한 로마”로 불리지만, 실제로는 파리도 아니고 네덜란드도 아니고 로마도 아니다. 유럽이라는 이름의 배우가 최장기 공연을 하고 있는 극장일 뿐이다.

테오필 고티에는 페테르부르크를 방문한 뒤 도시의 척추라 할 수 있는 넵스키 대로(Nevsky Prospect)에 늘어선 궁전과 건물들은 모두 ‘보여주기 위해’ 고안된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런 의미에서 전망을 의미하는 ‘프로스펙트’는 그 길의 용도와 정확하게 일치하는 이름이라고 덧붙였다. 19세기 작가 고골은 한 술 더 떠서 넵스키 대로의 모든 게 미망이라 일갈했다. “오, 넵스키 대로를 믿지 마라. 모든 게 꿈이고 모든 게 기만이고 모든 게 보이는 것과 다르다!”

몽환적인 외피의 도시, 문학 작품의 테마가 되다

역사의 부족도 문화 연구자들이 흔히 지적하는 문제다. 페테르부르크는 러시아 역사의 새로운 시대를 열어주었지만 정작 자기 자신은 역사를 결여했다. 도시의 내력이 짧다는 뜻만은 아니다. 과거 현재 미래로 이어지는 건강하고 자연스러운 흐름이 여의치 않다는 뜻이다. ‘유럽을 따라잡고 유럽을 넘어선다’는 표트르 대제의 이념은 너무나 강력해서 이후 누가 무엇을 하건 그 이념으로 되돌아가게 된다. 강한 러시아라는 미래의 비전을 위해 러시아는 반드시 표트르 대제가 서 있었던 그 출발점으로 되돌아 갈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서 현재는 미래를 위해 담보된다. 그래서 19세기 러시아 지식인들은 자기네 나라에는 과거와 미래만 있고 현재는 없다고 자조했다.

그렇다면 환상적인 외관 속에 담긴 진짜 러시아는 무엇인가? 러시아의 본질은 무엇인가? 역사의 공백을 채워주는 것은 무엇인가? 무엇이 러시아를 러시아로 만들어 주는가?

러시아는 이 문제의 답을 문학에서 찾았다. 라스베이거스가 환영의 빈 공간을 엔터테인먼트로 채웠다면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문학으로 채웠다. 처음에는 괴담과 신화가 역사의 빈자리를 채웠지만 곧 진지한 문학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환상적이라는 것은 더 이상 실체가 없음을 의미하는 단어가 아니었다. 그것은 문학 작품의 테마가 되어 시간을 초월했다. 언제 올지 모르는 미래에 대한 기다림과 과거로의 고집스러운 회귀 모두 문학적 현재로 들어왔다. 19세기에 대거 등장한 문호들은 정체성에 대한 목마름을 해소시켜 주었다.

아이러니하게도 표트르 대제가 도구로만 취급했던 문학은 이제 그가 창조한 이 기이하게 멋지고 환상적인 도시의 본질이 되었다. 그리고 물론 그 문학을 대표하는 것은 도스토옙스키였다. 페테르부르크는 그래서 ‘도스토옙스키의 도시’인 것이다. 마샬 버만은 상트페테르부르크를 “그 자체의 음울한 대기속으로 계속해서 녹아 들어가게 되는 신기루”라고 불렀다. 도스토옙스키는 신기루에서 가장 견고한 것을 빚어냈다. 문학이라는 이름의. ●

석영중 : 고려대 노문과 교수. 『도스토예프스키, 돈을 위해 펜을 들다』 『자유, 도스토예프스키에게 배운다』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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