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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운명 가른 역사적 장면…1명은 우울증, 2명은 치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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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증을 진단받은 뒤 스스로 총리직을 사임한 제프 갤럽 전 웨스턴오스트레일리아주 총리의 최근 모습. [ABC 홈페이지 캡처]

우울증을 진단받은 뒤 스스로 총리직을 사임한 제프 갤럽 전 웨스턴오스트레일리아주 총리의 최근 모습. [ABC 홈페이지 캡처]

약 10년 전, 호주 정계에서는 한 ‘커밍아웃’이 화제였습니다. 한 정치인이 우울증을 진단받은 사실을 고백한 것입니다. 제프 갤럽 웨스턴오스트레일리아주(州) 총리입니다.

우울증 진단 사실 밝힌 뒤 자진 사임한 제프 갤럽 전 호주 주총리 #우울증 걸렸던 윈스턴 처칠 영 총리는 “(우울증은) 검은 개”라고 표현 #1964년 ‘정신이상설’ 제기된 미 공화당 후보 낙마 계기로 의학계 윤리 원칙 제정

이 사실을 숨길 수도 있었던 그는 우울증으로 정상적인 정계 활동이 어렵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총리직에서 사임한 뒤 우울증 치료에 전념했지요.

학자 출신으로 성공 가도를 달리던 그의 ‘용감한 선택’에 호주 국민들은 많은 격려와 찬사를 보냈습니다. 이안 학기스 시드니의대 교수는 “호주인 여섯 명 중 한 명이 우울증에 시달리지만 그 사실을 잘 공개하지 않는다”며 “갤럽의 결단은 우울증 환자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줬다”고 평가했답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연합뉴스]

요즘 미국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에게 제기된 정신건강 이상설 때문에 시끌벅적합니다. 지난달 초에는 미 상·하원 10여 명이 정신과 전문의인 밴디 리 예일대 의대 교수를 의회로 초청해 그의 정신건강 상태가 대통령직 수행에 적합한지에 대해 브리핑을 받았지요.

이어 이달 2일엔 트럼프 대통령이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의 ‘핵 단추’ 발언에 대해 “나는 더 크고 강력한 핵 버튼을 갖고 있다”고 응수하면서 그의 정신건강 이상설이 본격적으로 촉발되었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트럼프 행정부의 비화를 다룬 미 언론인 마이클 울프의 『화염과 분노』는 이런 논란에 기름을 부었지요.

그런데 해외 정계를 살펴보면 ‘실제로’ 정신질환을 겪은 유명 정치인이 적지 않습니다. 상당수가 우울증 혹은 치매에 시달렸지요. 그런데 이들이 처했던 상황과 반응은 제각각 달랐습니다. 한번 살펴볼까요.

치매 사실 밝힌 뒤 치매 연구소 설립한 로널드 레이건

미국 제40대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 [중앙포토]

미국 제40대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 [중앙포토]

영화배우 출신인 로널드 레이건 미 40대 대통령. 그는 대통령에서 물러난 이후 지난 1994년 11월 알츠하이머병(노인성 치매)을 진단받고 자신이 치매에 걸린 사실을 알리는 담화문을 발표했습니다. 다음과 같은 내용입니다.

“(중략) 내가 알츠하이머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여러분들에게 알림으로써 이 병에 대해 더욱 많은 관심을 이끌어내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이 병으로 고생하는 환자와 그 가족들에 대한 이해를 높일 수 있을 것입니다. (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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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담화문 발표 이후 레이건 전 대통령은 아내인 낸시 여사와 ‘알츠하이머병 치료 연구’를 목적으로 ‘로널드 앤드 낸시 레이건 연구소’를 설립했습니다. 두 사람은 이 연구소를 통해 알츠하이머 치료를 위한 배아줄기세포 연구를 지원했답니다.

마가릿 대처 전 영국 총리. [중앙포토]

마가릿 대처 전 영국 총리. [중앙포토]

또 획기적인 정책 추진과 독단적인 정부 운영으로 ‘철의 여인’으로 불렸던 마가릿 대처 전 영국 수상도 정계 은퇴 후 치매를 앓았습니다. 2013년 뇌졸중으로 사망 전까지 그는 대중에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윈스턴 처칠·스탈린…정신질환 시달린 20세기 초 정치인들

시계추를 더 돌려볼까요. 20세기 초에도 우울증·치매 등 정신질환에 걸렸던 유명 정치인은 적지 않습니다.

영국 총리를 지낸 윈스턴 처칠. [중앙포토]

영국 총리를 지낸 윈스턴 처칠. [중앙포토]

2차 대전을 연합군의 승리로 이끈 윈스턴 처칠 영국 전 총리가 대표적이지요. 그는 평생을 괴롭혔던 ‘반복성 우울증’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림 그리기에 몰두했습니다.

처칠 전 총리는 자신의 질환을 두고 ‘검은 개’라고 불렀지요. 전문가들은 “검은색이 우울 증상을 의미하고, 개는 사람을 졸졸 따라다녀 쫓아내기 어려운 동물이기 때문에 처칠이 그렇게 부른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습니다. 말년에 질환을 회복한 처칠은 “검은 개가 떠났다”고 표현했습니다.

또 그와 함께 2차 세계대전 종전(終戰) 직전 ‘얄타 회담’을 이끈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 대통령과 스탈린 소련 서기장도 당시에 이미 치매 환자였다는 놀라운 연구 결과가 발표되기도 했습니다. 10여년 전 영국 언론 BBC에 의해 말입니다.

지난 2004년 7월 당시 BBC 보도에 따르면 영국왕립정신과의사협회의 연례총회에선 ‘1·2차 세계대전 당시 주요국 정상이 치매 때문에 정상적인 판단을 내리지 못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습니다.

2차 세계대전 말기에 얄타회담에서 한 자리에 모인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 대통령, 스탈린 소련 서기관(왼쪽부터 ). [중앙포토]

2차 세계대전 말기에 얄타회담에서 한 자리에 모인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 대통령, 스탈린 소련 서기관(왼쪽부터 ). [중앙포토]

연구진인 영국 헤이우드병원 정신과 전문의 엘 님 박사는 “루스벨트 전 미 대통령(32대), 스탈린 전 서기관은 치매로 인해 정상적인 의사결정을 내리지 못했다”고 주장했습니다. 2차 대전 말기인 1945년 2월 스탈린과 만나 한반도 문제 등을 협의했던 두 사람이 치매 때문에 협상을 제대로 못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 그의 설명입니다.

연구진은 1차 세계대전 당시 우드로 윌슨 미 대통령(28대) 역시 치매 환자였다는 주장도 내놨습니다. “윌슨 전 대통령이 치매에 걸린 사실을 인정하고 일찌감치 물러났더라면 2차 대전을 피할 수 있었다”는 설명과 함께 말입니다.
 윌슨이 물러났다면 ‘차기 대통령’이 베르사유 조약을 비준해 미국이 고립주의로 회귀하지 않고 1차 대전후 국제사회를 이끌었을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대선 중 정신질환설로 낙마한 미 공화당 후보…골드워터 룰 만들어져

1964년 미 대선 당시의 배리 골드워터 공화당 후보. [보스턴글로브 홈페이지 캡처]

1964년 미 대선 당시의 배리 골드워터 공화당 후보. [보스턴글로브 홈페이지 캡처]

미국에서는 선거 유세 중 정신질환설이 제기돼 대선 후보가 낙마한 적도 있습니다. 지난 1964년 미 대선후보로 출마했던 배리 골드워터 공화당 후보 얘기입니다. 대선시 제기된 정신질환설이기에 피해는 더욱 심각했지요. 당시 골드워터 후보는 미 언론 팩트지의 “(골드워터는) 대통령직을 수행하기에 부적절한 정신 질환을 앓고 있다”는 설문 조사 발표 이후 회복할수 없는 정치적 타격을 받았고 결국 낙마하고 말았습니다. 이후 그는 팩트지 편집장을 고소해 7만5000달러를 배상받았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미 의학계에는 윤리 원칙이 하나 생겼습니다. '정신과 의사가 직접 진단하지 않은 공인의 정신 상태에 대해 의견을 밝히는 행위'를 비윤리적으로 규정한, 이른바 '골드워터 규칙'입니다. 지난해부터 트럼프 대통령의 정신 감정을 줄곧 주장한 밴디 리 교수도 현재 의학계로부터 "골드워터 규칙을 어겼다"는 비판을 받고 있지요.

밴디 리 미 예일대 정신의학과 교수. [예일대 홈페이지 캡처]

밴디 리 미 예일대 정신의학과 교수. [예일대 홈페이지 캡처]

이와 관련해 그는 중앙일보와 최근 인터뷰에서 “정신과 의사는 원칙적으로는 골드워터룰을 따라야 하지만 나는 ‘공중(公衆)의 건강 증진에 기여해야 한다’는 미 의학 윤리 원칙을 더 강조하고 싶다”며 “트럼프 대통령의 정신건강을 감지하고도 이에 대한 문제 제기를 주저한다면 이는 우리가 ‘잠재적 피해자’인 대중에게 ‘경고할 의무’를 저버리는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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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적 능력 갖춘 이가 치매 걸리면 타인이 잘 못 알아채”

헤럴드 윌슨 전 영국 총리. [중앙포토]

헤럴드 윌슨 전 영국 총리. [중앙포토]

앞서 언급한 영국 헤이우드병원의 엘 님 박사는 해럴드 윌슨 전 영국 총리를 정신 질환에 적절히 대처한 사례로 제시했습니다. 윌슨 전 총리는 치매로 인해 인식능력이 저하된 사실을 일찌감치 인식하고 1976년 전격 사임을 발표한 인물입니다. 이어 연구진은 우로 케코넨 전 핀란드 총리와 램지 맥도널드 전 영국 총리 역시 치매 증상이 있었다고 진단했습니다.

엘 님 박사는 “치매는 초기부터 기억력뿐 아니라 의사결정과 방향감각 등에도 영향을 미친다”면서 “높은 지적 능력을 보유한 사람은 치매에 걸려 직무수행 능력이 손상된다 하더라도 다른 사람이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행동한다”고 분석했습니다.

조진형 기자 enish@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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