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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원, 밸런스, 그리고 한국정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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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서승욱 기자 중앙일보 정치국제외교안보디렉터
서승욱 일본지사장

서승욱 일본지사장

타원의 정치. 이케다 하야토(池田勇人), 오히라 마사요시(大平正芳), 스즈키 젠코(鈴木善幸), 미야자와 기이치(宮澤喜一) 등 4명의 총리를 배출한 일본 자민당의 명문 파벌 고치카이(宏池會·현 기시다파)를 지탱해 온 원칙이다. ‘원은 중심이 하나, 타원은 중심이 두 개, 두 중심이 서로 경쟁하고 다른 의견도 포용하며 균형을 잡는 정치’를 추구한다는 뜻이다.

이는 비단 자민당 내 리버럴계인 고치카이의 전통을 넘어 자민당 전체 기조에도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자민당 장기 집권의 토대가 됐다. 보수 색채가 뚜렷한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의 독주로 최근엔 의미가 희석됐지만 ‘밸런스와 균형, 현실주의’는 오랫동안 자민당을 지배해 온 가치들이다.

‘아베 1강’에 대한 피로감이 확산되고, 고치카이를 이끄는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자민당 정조회장이 ‘포스트 아베’의 후보 중 한 명으로 거론되며 타원의 정치는 새롭게 주목 받고 있다.

“크고 넓게 보는 것, 작게 파고드는 것, 이 두 가지의 밸런스가 중요하다” “너무너무 집중한 나머지 더 집중했다간 돌아올 수 없을 것 같은 경지에 이르면 나는 의식적으로 집중을 멈춰 버린다. 그래야 밸런스가 잡힌다.” 일본 문화예술계가 최고의 명예로 여기는 ‘국민영예상’을 2월에 수상하는 일본 장기의 최고수 하부 요시하루(羽生善治)의 말이다. 이 승부사가 현재의 자신을 만든 최고의 무기로 꼽은 것도 밸런스와 자제력이었다.

일본 월간지 ‘문예춘추’ 2월호에 실린 작가 시오노 나나미(鹽野七生)와 일본 정치의 신성 고이즈미 신지로(小泉進次郞)의 대담에서도 비슷한 얘기가 나왔다.

『로마인 이야기』로 유명한 작가 시오노는 매달 이 월간지에 사회 현안에 관련된 에세이를 연재하고 있다. 그는 대담에서 “그 에세이 덕분에 매달 한 번씩은 역사의 세계에서 빠져나와 현대로 돌아올 수 있다. 그것이 없으면 난 2000년 전의 세계에만 머물게 된다”고 말했다. 집중력이 자신을 갉아먹지 않도록, 그 집중하는 대상에만 매몰되지 않도록 자신만의 밸런스를 유지하는 특단의 방법을 고수들은 늘 고민하고 있다.

북한을 향한 국제사회의 냉소 속에서도, 코미디 같은 해프닝 속에서도 ‘평창’을 향한 남북 유화 분위기는 절정으로 치닫는 느낌이다. 처음부터 김정은의 핵·미사일 다이어리엔 ‘평창’이란 단어에 밑줄이 세 개쯤은 그어져 있었을 것 같지만, 우리 정부의 발걸음엔 거침이 없다. 소위 ‘적폐청산’, 정권 출범 8개월이 더 지났지만 그 ‘분노’도 멈춰설 조짐이 없다. 고수가 아니기 때문인가, 이들에게 타원의 밸런스와 균형을 기대하는 건 욕심일까.

서승욱 일본지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