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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호화폐 투기 막으려다 벤처 싹 자를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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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정경민
정경민 기자 중앙일보
정경민 편집국 경제담당

정경민 편집국 경제담당

100달러짜리 미국 지폐는 초록 잉크가 찍힌 종이 쪼가리에 불과하다. 한데 세계 어딜 가나 이걸 내밀면 물건이나 서비스로 바꿀 수 있다. 그 덕에 달러 발행권을 쥔 미국 정부는 100달러 지폐를 찍을 때마다 종이·잉크값과 위조방지·물류 비용을 뺀 차익을 거저먹는다. 이를 경제학에선 주조차익 혹은 ‘시뇨리지(Seigniorage)’라고 한다. 미국 정부가 그동안 챙긴 시뇨리지 수익은 상상을 초월한다.

블록체인의 승자 누가 될지 몰라 #거래 금지는 기존 공룡기업에 유리

그렇다면 미국 정부라는 독점 발행권자 없이도 ▶안정적으로 공급되면서 ▶세계 어디서나 통용되고 ▶위조가 불가능한 새 결제수단을 만들 순 없을까. 2009년 사토시 나카모토란 가명의 암호학자는 블록체인 기술로 만든 암호화폐 비트코인으로 이런 발칙한 꿈이 실현될 수 있다는 걸 수학적으로 증명했다.

‘수학적으로 증명했다’는 건 주관적 감정이나 정치적 신념이 아니라 경제적 인센티브에 의해 시스템이 스스로 작동될 수 있다는 걸 입증했다는 뜻이다. 블록체인은 더 많은 사람이 쓸수록 안전해진다. 그럴수록 널리 통용되고 천문학적 시뇨리지가 창출된다. 이 수익은 정부나 거대기업이 독차지하는 게 아니라 블록체인 시스템을 작동시키는 데 기여한 모든 참여자에게 암호화폐란 인센티브로 분배된다.

블록체인이 “극소수 기술자들이 갖고 놀다 싫증 날 장난감”이 아니라 세상을 바꿀 미래 기술이 될 거라고 기대하는 건 이런 초강력 인센티브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개인 간 직거래를 실현한 블록체인이 일상화하면 개인과 개인의 중간에서 엄청난 이익을 챙겨온 정부와 거대기업의 시뇨리지·수수료 장사는 설 자리가 사라진다.

정부는 암호화폐와 블록체인 기술은 별개라고도 한다. 암호화폐 거래를 금지해도 블록체인 기술은 발전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특정 국가나 기업이 만드는 프라이빗 블록체인을 두고 하는 말일 거다. 코닥이 사진 거래를 위해 만든 ‘코닥코인’이 대표적이다. 케네스 로고프 하버드대 교수의 제안처럼 미국 중앙은행이 프라이빗 블록체인 기술을 적용한 ‘벤코인’을 내놓는다면 비트코인을 따라잡을 수도 있다.

그러나 프라이빗 블록체인에선 암호화폐 발행을 독점한 주체가 시뇨리지 이익을 독식한다. 이 점에서 비트코인·이더리움 같은 퍼블릭 블록체인과 본질적으로 구별된다. 프라이빗 블록체인의 생명은 발행 주체의 신뢰도에 달려있다. 구글·아마존처럼 자본·기술력을 갖춘 기존 공룡이 절대 유리하다.

이와 달리 퍼블릭 블록체인은 암호화폐라는 경제적 인센티브에 의해 작동된다. 암호화폐 없는 퍼블릭 블록체인은 존립할 수 없다. 결국 암호화폐 거래 금지는 프라이빗 블록체인을 키우고 퍼블릭 블록체인은 죽이는 결과를 낳게 된다. 암호화폐 투기를 막으려다 자칫 구글·아마존에 특혜를 주고 벤처기업 싹은 자르는 모순에 빠질 수 있다.

그렇다면 블록체인의 미래가 장밋빛이라고 모든 암호화폐가 다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될까. 천만의 말씀이다. 암호화폐는 빛의 속도로 진화하고 있다. 비트코인은 금융 거래에 특화됐다. 후발주자인 이더리움은 금융뿐 아니라 중고차·농산물 등 모든 종류의 거래는 물론 투표에까지 응용할 수 있는 다용도 플랫폼으로 설계됐다. 하루가 멀다 하고 개량된 암호화폐가 쏟아져 나온다.

90년대 검색엔진이 등장했을 때도 라이코스, 마젤란, 알타비스타, 익사이트 등이 군웅할거 했다. 야후가 절대 강자로 부상하는 듯했지만 후발주자 구글에 밀렸다. 게다가 검색엔진처럼 블록체인의 본질은 플랫폼이다. 플랫폼은 여러 개가 공존하기 어렵다. 지금까지 나온 3000여개의 암호화폐 가운데 5년 혹은 10년 후 시장을 장악할 승자는 10개도 안 될지 모른다. 대다수는 소리소문없이 사라지거나 틈새시장의 골목대장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암호화폐에 전 재산을 털어 넣는 깜깜히 투자가 위험천만한 까닭이다.

정경민 편집국 경제담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