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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중앙] 데뷔 30년 쉼표 찍고, 제2 전성기 달리는 가수 이자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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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자연은 스스로 행운아라고 한다. 적기에 좋은 사람을 만났고 좋은 노래를 부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자연이 월간중앙과 인터뷰를 마친 뒤 거울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이자연은 스스로 행운아라고 한다. 적기에 좋은 사람을 만났고 좋은 노래를 부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자연이 월간중앙과 인터뷰를 마친 뒤 거울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이 자연은 바쁘다. 지난해 10월 새 앨범 ‘사나이 눈물’(나훈아 작사·작곡)을 발표한 뒤 찾는 곳이 부쩍 많아졌다. “모든 분들에게 ‘사나이 눈물’을 들려주고 싶다”는 게 이자연의 새해 목표다. 이자연은 기자와 만나기 하루 전날(1월8일) 오후에도 KBS <가요무대>(녹화)에 출연했다.

“나훈아 선배님보다 제가 더 잘 부른대요~^^” #길옥윤·박건호·정풍송·박성훈 등 당대 최고 음악가들과 함께한 행운아… #최근 발표한 새 앨범에서도 나훈아 곡 ‘사나이 눈물’ 등 다시 불러 인기몰이

이자연은 젊다. 데뷔 3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소녀 감성’으로 노래를 부르곤 한다. <가요무대> 녹화 때도 연출 담당자가 “‘당신의 의미’만은 소녀 감성으로 불러달라”고 요청했다. 이자연은 “아무리 많이 부르고 또 세월이 흘러도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곡이 ‘당신의 의미’와 ‘찰랑찰랑’”이라며 “이 노래를 부르면 소녀로 되돌아간 것 같다”고 했다.

1986년 ‘메밀꽃 필 무렵’(길옥윤 작사·작곡)으로 데뷔한이자연은 87년에 발표한 ‘당신의 의미’로 스타덤에 올랐다.95년에는 ‘찰랑찰랑’(박건호 작사, 이호섭 작곡)으로 국민적인 인기를 모았다. 두 곡은 이자연의 상징이자 ‘국민 가요’의 반열에 오른 노래다.

이자연은 2016년 12월 데뷔 30년을 기념한 공연(디너쇼)을열었다. ‘찰랑찰랑’의 노랫말처럼 공연에는 ‘내 마음이 찰랑찰랑’이라는 타이틀을 내걸었다. 가수 인생 30년 ‘쉼표’를 찍은이자연은 지난해 새 앨범을 내고 제2의 전성기를 구가한다.

‘군위·선산의 이미자’ 노래는 내 운명

이자연은 자신의 고향을 “경북 군위 겸 선산”이라고 한다.행정구역상 옆집은 군위, 앞집은 선산이었다. 이자연의 집은두 고장의 경계선에 위치했다. 방송에서 이자연이 “내 고향은 군위”라고 하면 선산 사람들이 서운해했고, “내 고향은선산”이라고 하면 그 반대였다. 그래서 이자연의 고향은 ‘군위 겸 선산’이다.

어려서부터 노래를 잘했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이미자나 조미미의 노래를 따라 부르면 동네 사람들이 이자연앞으로 모여들었다. “쪼맨한 게 노래 잘하네. 눈 감고 들으면이미자랑 구별 못 한데이.

”이자연은 자신에게는 특별한 ‘노래 유전자’가 있다고 했다. “아버지께서 노래를 정말 잘하셨어요. 동네 최고의 가수셨거든요. 오죽하면 외할머니가 아버지 노래에 반해 사위를삼았을까요. 지금도 고음 올라갈 때면 아버지 음성이 생각납니다. 참 많이 닮은 것 같아요.”

동네 사람들의 박수가 좋았다. 박수를 받을수록 더 노래하고 싶었다. 때마침 멍석이 깔렸다. ‘대도시’ 대구로 이사를가게 된 것이다. 이자연은 대구 MBC와 대구 KBS 노래자랑에 나갔다. 두 방송국에서 모두 상을 받자 음반을 내자는 제의가 들어왔다. 정식 데뷔앨범은 아니었지만 이자연은 소녀시절에 음반을 취입했다.

이자연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본격적인 가수의 길에 들어섰다. 부산의 한 야간업소가 무대였다. 설운도는 야간업소 ‘동기’다. “설운도씨는 ‘잃어버린 30년’으로 데뷔하면서 서울로 올라갔고, 저는 부산에 남았어요. 그러다 8·15광복절 기념공연을 위해 일본에 가게 됐죠.”

이자연은 광복절 기념공연 후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런데얼마 뒤 일본 공영방송 NHK에 한국어 강좌가 개설됐다. 우리 민요 코너도 생겼다. 이자연은 다시 일본에 가게 됐다. 전국 순회공연을 다니면서 재일동포와 일본인들 사이에서 큰인기를 얻었다.

이때 인연을 맺은 이가 고(故) 길옥윤(1927~95)이다. 서울대 치대의 전신인 경성치과전문대를 나온 길옥윤은 전 부인패티김을 비롯해 혜은이·이자연 등 당대 최고 여가수들에게많은 곡을 선물한 작곡가이자 연주가다. 길옥윤이 한국 가요사(史)에 한 획을 그은 인물이라는 데 이견은 많지 않다.

길옥윤은 한동안 일본에서 요시야 준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했다. 그 무렵 신인가수 이자연을 만났고, 자신의 공연에게스트로 전격 발탁했다. 길옥윤이 이자연에게 건넨 첫마디.“얘, 너 노래 참 잘하는구나.”

일본에서 5년간 활동하며 앨범 세 장을 발표한 이자연은86년 한국으로 돌아왔다. ‘비 내리는 영동교’로 트로트 태풍을 일으킨 주현미의 대항마를 찾던 한 음반회사 사장이 일본으로 건너가 이자연을 직접 스카우트한 것이었다.

이자연은 길옥윤과 손잡고 국내 데뷔앨범을 냈다. 길옥윤이 곡을 준 ‘메밀꽃 필 무렵’이 대표곡이었다. “길옥윤 선생님이 저를 참 많이 아껴주셨어요. 일본에서 전국 순회공연을 할때도 오프닝 때 한 번, 중간에 한 번 이렇게 두 번이나 무대 위에 저를 올려서 서너 곡 이상 부르게 하셨으니까요. 95년 3월암 투병 중인 선생님에게 병문안을 갔죠. 말씀도 잘하시길래곧 일어나실 줄 알았는데…. 일주일 후 눈을 감으시더라고요.”

‘가수’ 이자연을 데뷔시켜준 이가 길옥윤이라면 인기가수 이자연을 만들어준 사람은 ‘트로트의 황제’ 나훈아다. 나훈아는 이자연의 실질적 데뷔곡인 ‘당신의 의미’를 비롯해 최근 발표한 앨범 수록곡 ‘사나이 눈물’, ‘서울나그네’ 등도 만들었다. 나훈아가 작사·작곡해서 불렀던 곡을 이자연이 리메이크해 발표했다.

“일본에서 길옥윤 선생님과 공연하며 다닐 때 나훈아 선배님을 알게 됐어요. 그 인연으로 나훈아 선배님 공연에 게스트로 초대됐고, 선배님이 ‘한국에서 음반 내면 곡 하나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 노래가 ‘당신의 의미’였죠.”

지금은 ‘국민 가요’가 됐지만 ‘당신의 의미’는 자칫 빛을보지 못 할 뻔했다. ‘천하의’ 나훈아가 직접 피아노를 치며 곡을 만들었지만 정작 이자연의 마음엔 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선배님, 이 노래 별로인 것 같아요. 다른 곡 주세요.”

당돌한 이자연의 말에 나훈아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이녀석아, 곡값이나 주면서 싫다고 해야지. 곡값도 안 주면서 불만이야?” 이자연은 나훈아에게 달랑 2000원을 건넸다. 그돈으로 담배 한 갑을 산 나훈아는 연기를 깊이 한 모금 빨아들였다. 나훈아는 열심히 마무리 작업을 했고, ‘당신의 의미’는 이자연의 데뷔앨범 타이틀곡으로 세상에 나왔다.

잊을 수 없는 세 남자

2008년 프로야구 삼성과 두산의 플레이오프 5차전 시타자로 나선 이자연. 이자연은 ’삼성의 응원가가 ‘당신의 의미’라 큰 경기에 초대됐다“고 말했다.

2008년 프로야구 삼성과 두산의 플레이오프 5차전 시타자로 나선 이자연. 이자연은 ’삼성의 응원가가 ‘당신의 의미’라 큰 경기에 초대됐다“고 말했다.

“자고 일어나니 스타가 돼 있더라는말 있죠? 바로 저를 두고 한 말 같았어요. 말 그대로 폭발적인 반응이 돌아왔죠. 오죽했으면 선배님이 노래돌려달라고 하셨겠어요. 절대 안 된다고 했죠. 나중에 선배님도 그 노래를 직접 부르셨어요. 솔직히 ‘당신의의미’는 제가 더 잘 부르잖아요. 원곡가수가 최고 아닌가요?”(웃음)

가수 이자연을 만들어준 이가 길옥윤과 나훈아라지만 정작 가수의 꿈을 갖게 해준이는 그의 아버지였다. 선친은 고향에서는 ‘명가수’로 소문이 자자했다고 한다. 오죽하면 외할머니가 아버지의 노래 솜씨에 반해 딸을 시집 보냈을까!

그런 아버지가 한때는 딸이 가수 되는 걸반대했다. 가수의 길을 어떻게 가야 할지,어떻게 밀어줘야 할지 아버지도 몰라서였다. 그런 아버지를 조르고 또 졸랐다.“딱 1년만 하게 해주이소. 1년만하고 아버지 하라는 대로 하겠심더.” 자식 이기는 부모는없을 것이다. 결국 이자연은 아버지 허락을 받고 부산의 야간업소 무대를 뛰며 가수의 길로 나섰다.

마음껏 노래를 불렀다. 그런데 무슨 인생의 조화인지 애지중지하던 딸이 무대에 선 지 1년도 채 안 돼 아버지는홀연히 세상을 등졌다. 하늘이 무너져도 이보다 막막하진않을 터이다. 얼마나 울었던지 목이 상해 한동안 무대에 설수 없을 정도였다.

이 자연이 2016년 12월 서울 광장동 쉐라톤 그랜드 워커힐 호텔 내 워커힐 시어터에서 열린 데뷔 30주년 기념 디너쇼에서 열정적인 무대를 연출하고 있다.

이 자연이 2016년 12월 서울 광장동 쉐라톤 그랜드 워커힐 호텔 내 워커힐 시어터에서 열린 데뷔 30주년 기념 디너쇼에서 열정적인 무대를 연출하고 있다.

“아버지의 노래 유전자를 물려받은 덕분에 제가 가수가됐어요. 지금도 고음을 낼 때면 ‘내게 아버지의 목소리가 배어 있어’ 그런 느낌을 갖거든요. 데뷔한 지 30년이 흘렀지만정작 아버지는 제가 이렇게 가수로서 열심히 노래하는 모습을 보지 못 하셨어요. 아버지만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해집니다.”

갓 피어난 꽃처럼 젊고 예쁜 시절에 아버지를 떠나보낸 이자연에게 남편은 각별한 사람이다. 이자연은 남편에 대해“두 살 많은 사업가로 친구 같은 사람”이라고 소개했다. 이자연은 남편의 사생활이 세상에 노출되는 것을 싫어한다.

“남편과는 22년 전, 그러니까 1996년에 결혼했어요. 아이를 가져보려고 온갖 노력을 다했는데 안 되더라고요. 저도 남편도 힘들어했는데 지금은 괜찮아요. 참, 우리 집은요 이상하게 붕어가 잘 자라요. 새끼도 많이 낳더라고요. 남편이 이 녀석들을 너무 좋아해서 먹이도 꼬박꼬박 챙겨요. 저는 남편더러 ‘아예 물속에 들어가서 같이 살라’고 합니다.”(웃음)

아버지를 일찍 여읜 이자연은 ‘처녀 가장’이었다. 맏딸인이자연의 밑으로 여동생 1명과 남동생 3명이 있었다. 어머니는 밖에 나가 100원짜리 한 장 벌어본 적 없는, 천생 가정주부였다.

아버지를 잃고 난 뒤로 그는 더 열심히 노래를 불렀다. 야간업소를 늘려갔고 수입은 어지간한 직장인보다 많았다. 그렇게 동생 넷을 모두 대학까지 보냈고, 어머니를 모셨다. 일본에서 활동할 때는 수입이 꽤 많았다. ‘나는 강한 사람이다. 할 수 있다.’ 이자연은 이를 악물고 돈을 벌었다.

처녀 가장과 석사 가수

1987년 ‘당신의 의미’로 세상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을 즈음의 이자연. 큰 눈망울과 환한 미소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1987년 ‘당신의 의미’로 세상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을 즈음의 이자연. 큰 눈망울과 환한 미소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80년대 초반 야간업소에서 노래를 시작한 이자연은 2009년초까지 쉼 없이 달려왔다. 노래 부르는 것이 천직이었고 즐거움이었다. 그에게 노래를 쉬는 ‘방학’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2009년 예상치 못 한 일이 생겼다. 그해 5월 노무현 전 대통령, 이어 8월 김대중 전 대통령이 잇따라 서거했을 때였다.석 달 새 국상(國喪)을 두 번이나 치르면서 사회적인 분위기가 그래서인지 공연이 연달아 취소되기 시작했다.

“노래를 시작한 뒤로 놀아본 날이 거의 없는데 오랫동안스케줄이 취소되고 나니 뭘 해야 되나 고민이 되더라고요.그때 불현듯 ‘아 이런 때 공부를 해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퍼뜩 스쳐갔어요.”

그래서 여동생한테 제일 먼저 전화를 걸었다. “얘, 나 수능시험 봐서 대학 가야겠다.” 자매가 얘기를 나누다 보니 수화기 너머로 여동생의 흐느끼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리 언니, 동생 넷 가르치느라고 대학도 못 갔는데…. 언니, 언니가 공부하겠다면 내가 EBS 수능교재 전부 사줄게. 언니 꼭 대학에 가야 돼. 우리 언니 정말 생각 잘했어.”

부산의 어머니에게도 전화를 걸었다. 같은 생각을 전했다. 어머니는 “공부하는 것이 효도하는 길”이라며 격려해줬다. 이자연의 결심은 곧 행동으로 옮겨졌다. 동생이 보내준 EBS교재와 씨름했다. 방송강좌를 보고 또 보며 공부했다. 나중에는 강사의 애드리브까지 외우게 됐다.

2010년 11월 18일은 영원히 잊을 수 없는 날이다. 이자연은 자식뻘 되는 학생들과 수능시험을 치렀다. 이자연은 건국대 영화과(현 영화애니메이션과)에 2011학번으로 입학했다. 탤런트 이종석, 그룹 샤이니의 민호가 과 동기라고 한다.

2015년 2월 졸업장을 받은 이자연은 구미로 내려갔다. 아버지 산소에 술 한잔 올리며 졸업장을 펼쳤다. “아버지, 저학사 됐습니다. 잘했죠? 노래도 더 열심히 할 겁니다.”

늦깎이로 이뤄낸 학사 학위는 그의 자부심이었다. 이만하면 남부럽지 않았다. “자연아, 기왕 공부한 것 석사도 해라. 공부해보니 정말 좋더라.” 친한 오빠인 탤런트 김성환은 이자연에게 석사과정을 권했다. 김성환 역시 50대 중반의 나이에 종합대학 경영학과에 진학한 데 이어 석사 학위까지 받은 늦깎이 학생이었다. 현재 김성환은 박사과정을 모두 마치고논문 마무리 작업 중이라고 한다.

이자연은 2015년 건국대 언론홍보대학원 방송통신융합학과에 입학했다. 5학기를 쉬지 않고 다닌 그는 지난해 8월드디어 석사 학위를 받았다. 그뿐 아니었다. 이자연은 ‘TV프로그램에 등장하는 대중가요의 특성에 관한 연구(KBS <가요무대>를 중심으로)’라는 주제로 논문도 썼다.

<가요무대>는 이자연에게 30년 지기(知己)다. <가요무대>는 1985년 11월 4일 월요일 밤 10시 1회 방송을 시작으로 30여 년간 총 1500회 이상 방송됐고, 2만4000여 곡이 불려졌다. 국내 방송사를 통틀어 가장 대표적인 대중가요 프로그램이다. 이자연은 <가요무대>가 생긴 지 1년 뒤인 1986년에데뷔했다. 또 <가요무대>가 1500회 정도 방송되는 동안 이자연은 무려 200회가량이나 출연했다. 7~8회 중 1회, 그러니까 두 달에 한 번꼴로 이자연은 <가요무대>에 섰다.

이자연은 프로그램 큐시트를 활용해 1986년부터 2016년까지 약 30년간 어떤 노래가 많이 등장했는지 분석했다. 밤잠을 거르며 논문 준비를 했다. 마음속으로는 수도 없이 포기했고, 번번이 퇴짜를 놓는 지도교수가 원망스러울 지경이었다.우여곡절 끝에 통과된 논문이 인쇄·제본 과정을 거쳐 나왔을때 그는 검은 하드커버 된 논문을 꼭 안아줬다고 한다.“우리 대중가요는 시대적 배경과 아픔을 안고 있더라고요. 우리 역사를 말해주는 셈이죠. 논문을 쓰다 여러 번 울었습니다. 왜 ‘번지 없는 주막’인지 아세요? 나라를 빼앗기고 폐허가 됐으니 번지가 없었던 거죠. ‘나그네 설움’은 만주·연해주 등지의 독립군들에게는 애국가나 다름없었어요.”

‘석사 가수’ 이자연의 공부 욕심은 끝이 없다. 기회가 되면 박사과정에도 도전하려 한다. “대중가요 역사를 더 공부하고싶어요. 대중가요로 국민과 소통하는 가수가 되려 합니다.”

이자연은 이른바 성인가요가 트로트로 한데 뭉뚱그려져 불리는 데 대해 불만이 많다. 트로트라는 말만 나오면 입이뾰로통해진다. “힘닿는 데까지 노력해서 반드시 트로트라는용어를 바꾸겠다”고 다짐한다.

“여든 살 돼도 노래할 거예요”

1984년 도쿄 공연에서 길옥윤과 함께 무대에 선 이자연.

1984년 도쿄 공연에서 길옥윤과 함께 무대에 선 이자연.

“트로트라면 4분의 4박자예요. 트로트로 불리는 모든 노래가 4분의 4박자는 아니잖아요? 또 뽕짝이라는 말을 피하기위해 등장한 용어인데 일본 용어입니다. 정확히 하면 ‘트롯’이죠. 그리고 트로트 안에는 탱고·왈츠·디스코 등 수많은 장르가 포함돼 있어요. 그래서 트로트라는 한 단어로 대중가요를 포괄할 수 없다는 거죠. 사실 ‘찰랑찰랑’은 로큰롤인데 이자연이 불렀다고 트로트가 된 거예요. 한동안 트로트를 전통가요라고도 했죠? 그랬더니 이번에는 국악계에서 이의를 제기하더라고요. 어쨌든 우리나라 노래를 왜 외국어로 표현하려고 해요? 저는 그냥 대중가요라는 우리말을 썼으면 좋겠어요.”

30년 동안 300곡 정도를 발표했고, 그 가운데 ‘국민 가요’도 탄생시킨 이자연. 그가 가장 존경하는 선배 가수는 누굴까?

“스승이자 선배이신 나훈아 선배님 그리고 남진 선배님을 존경합니다. 남진 선배님은 누구에게나 편안하게 대해주시고, 함께 라면도 드실 수 있는 분이죠. 나훈아 선배님은 알고보면 정말 자상하고 부드러운데 그게 겉으로는 잘 나타나지 않아요. 예전처럼 대중 앞에 좀 더 편하게 나오시면 어떨까싶습니다.”

이자연은 지난 30여 년 동안 가장 기억에 남는 일로 ‘한길인생’과 ‘최고 음악가들과의 만남’을 꼽는다. “길옥윤·나훈아·박건호·정풍송 선생님 등 당대최고들에게 곡을 받고, 또 그분들과 함께 무대에 설 수 있었던 것은 대단한 영광이자 행운이었죠. 주위에서 다들 부러워하더라고요.”

이자연이 늘 감사하는 마음을 갖는또 한 사람이 작곡가 박성훈이다. 현철의 ‘내 마음 별과 같이’, 하춘화의 ‘날 버린 남자’ 등을 작곡한 박성훈은 이자연에게 ‘백세시대’ 등의 곡을 줬다. 이자연은“늘 변함없이 한결같은 박성훈 선생님을 존경한다”고 했다.

이자연도 어느덧 중견 가수가 됐다. 이자연 주변에는 그를“선배님”으로 부르며 따르는 후배가 많다. 조금 더 세월이흐르면 “선생님”이라고 부를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이자연은 여전히 젊다. 이자연은 “개인적으로 가장 애착이 가는 노래 ‘당신의 의미’나 ‘찰랑찰랑’을 부를 때면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갑니다. 그래서인지 그 노래를 부르는 나를 다들 소녀 같다고 하더라고요.”(웃음)

30년 쉼표를 찍고 재출발을 시작한 이자연. 그의 목표와소망은 무엇일까. “1년만 가수 해보겠다고 시작한 것이 30년이 됐어요. 밤무대까지 합하면 35년쯤? 아버지는 내가 진짜 가수가 돼서 노래 부르는 것을 보지 못 하고 돌아가셨어요. 하지만 나는 강했어요. 가수 이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고, 정말 한길만 걸어왔어요. 가장으로서 힘들었지만 맏이로서 부끄럽지 않은 언니·누나였습니다. 친구들나이가 여든 살쯤 됐을 때 그 모임에 가서 노래 부르고 싶어요. 나는 가수니까요.”

최경호 월간중앙 기자(squeeze@joongang.co.kr)
사진 원동현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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