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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 전 단일팀 만들어 선수도 실력대로…독일식 평화올림픽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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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 도쿄올림픽 개회식에서 오륜마크를 새긴 삼색기를 앞세워 입장하는 독일 선수단 [사진 IOC 홈페이지]

1964 도쿄올림픽 개회식에서 오륜마크를 새긴 삼색기를 앞세워 입장하는 독일 선수단 [사진 IOC 홈페이지]

 지금으로부터 62년 전인 1956년 1월. 코르티나 담페초(이탈리아)에서 열린 겨울올림픽 개회식에 독일선수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남자 선수 52명과 여자 선수 11명. 여느 대표팀과 다를 바 없는 63명의 선수들이었지만, 전 세계가 이들을 주목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동독과 서독으로 나뉜 독일이 하나의 깃발 아래 올림픽에 모습을 드러낸 첫 무대였기 때문이다. 이들은 단일팀의 명칭을 '독일(Germany)'로 정했다. 검정과 빨강, 노랑의 삼색기를 국기로 썼다. 베토벤 교향곡 9번 '합창'의 하이라이트 '환희의 송가'를 국가 대신 사용했다.

1956년 코르티나 담페초 겨울올림픽에서 독일은 스키점프 종목에서 동메달을 목에 걸었다. [사진 IOC 홈페이지]

1956년 코르티나 담페초 겨울올림픽에서 독일은 스키점프 종목에서 동메달을 목에 걸었다. [사진 IOC 홈페이지]

동·서독이 올림픽 단일팀을 구성한 과정은 2018 평창올림픽 단일팀을 준비 중인 남·북한보다 체계적이었다. 논의는 올림픽 개막 2년 전인 1954년부터 시작했다. 국제올림픽위원회(IOC)가 단일팀 구성의 디딤돌을 놓았다. IOC 비가맹국이던 동독을 올림픽 무대에 끌어들이기 위해 '동·서독 단일팀'이라는 아이디어를 냈고, 두 나라가 이를 받아들였다. 동·서독은 1956년 겨울올림픽과 여름올림픽 모두 단일팀을 파견한다는 목표 아래 세부사항을 조율해나갔다. 이듬해 단일팀 구성 원칙에 합의하자마자 곧장 선수단 구성을 위한 실무 작업에 착수했다.

선수 선발 기준은 간단했다. '정치적 안배 없이 오직 실력만으로 뽑는다'는 원칙 하나만 정했다. 이는 동독과의 단일팀 구성에 반대하는 일부 서독 국민들을 달래기 위한 결정이었다. 당시 서독 내 일각에는 "우리 선수들이 힘들게 따낸 올림픽 출전권을 왜 무임승차한 동독 선수들에게 나눠줘야 하는지 모르겠다"거나 "우리가 낸 세금으로 동독 선수들이 올림픽 무대에 나서는 걸 원치 않는다"는 불만의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두 나라는 '단일팀 구성이 경기력을 높이는데 도움이 된다'는 단순명확한 논리로 국민들을 설득했다.

동서독 단일팀이 1960년과 1964년 올림픽에서 국기 대신 사용한 삼색기. [사진 IOC 홈페이지]

동서독 단일팀이 1960년과 1964년 올림픽에서 국기 대신 사용한 삼색기. [사진 IOC 홈페이지]

'동·서독 단일팀'은 첫 대회인 코르티나 담페초 겨울올림픽에서 부진했지만, 이후 참가한 여름올림픽에서는 승승장구했다. 1956 멜버른대회에서 금메달 6개, 은메달 13개, 동메달 7개를 거둬들여 종합 7위에 올랐다. 서독이 홀로 참가한 4년 전 헬싱키대회에서 금메달 없이 은 7개 동 17개에 그친 것과 비교되는 결과다. 독일은 1960년 로마대회에서 금 12개, 은 19개, 동 11개를 수확해 순위를 4위로 끌어올렸다. 단일팀의 마지막 무대가 된 1964 도쿄대회에서도 금 10개, 은 22개 동 18개로 4위 자리를 지켰다. 김동선(60) 경기대 스포츠경영학과 교수는 "사회체육 위주로 성장한 서독과 달리 동독은 국가 주도의 엘리트 체육이 발전한 나라였다"면서 "두 나라의 스포츠 기조가 서로 달랐지만, 충분한 준비 기간과 객관적인 선수 선발을 통해 사회적 갈등을 최소화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1991년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 출전한 남북한 단일팀 현정화(오른쪽)와 북한 이분희. [중앙포토]

1991년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 출전한 남북한 단일팀 현정화(오른쪽)와 북한 이분희. [중앙포토]

남·북한이 올림픽 등 국제 스포츠대회에 단일팀 파견 논의를 시작한 건 1964 도쿄올림픽 무렵부터다. 그 이후 첫 단추를 꿰는 데만 27년이 걸렸다. 지난 1991년에야 비로소 탁구와 축구에서 단일팀을 만들어 국제무대에 선보일 수 있었다. 독일이 반세기 전에 성사시킨 종합대회 단일팀은 여전히 먼 이야기다. 평창올림픽 개막을 앞두고 남북이 여자아이스하키 단일팀 운영에 합의했지만, 이 또한 '정치적 이해 관계에 따라 급조했다'는 비판에 시달린다.

남북 스포츠 교류도 독일처럼 시간적 여유를 갖고 진행할 땐 의미 있는 결과를 만들어냈다. 1991년 두 번의 남북단일팀은 그 뿌리가 1년 전으로 거슬러올라간다. 1990년 베이징아시안게임을 앞두고 남북이 공동 응원단 구성을 준비하며 활발히 접촉한 게 '단일팀'이라는 유산으로 이어졌다. 19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에도 남북이 단일팀을 구성하진 못했지만, 또 한 번 공동 응원단을 꾸려 체육 교류의 명맥을 이어갔다.

91년 일본 지바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서 남북단일팀 선수로 참가, 우정을 나눴던 유남규(左)와 북한의 김성희가 훈련장으로 이동하는 버스에서 만나 안부를 묻고 있다. [중앙포토]

91년 일본 지바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서 남북단일팀 선수로 참가, 우정을 나눴던 유남규(左)와 북한의 김성희가 훈련장으로 이동하는 버스에서 만나 안부를 묻고 있다. [중앙포토]

지난 2000년 시드니올림픽 남북한 선수단 개회식 공동 입장과 함께 부활한 체육 교류 흐름은 2년 뒤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에 북한이 대규모 선수단과 응원단을 파견하는 계기가 됐다. 김 교수는 "현재는 평창올림픽 남북 단일팀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이 우세하지만, 새로운 체육 교류의 신호탄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기대가 되는 것도 사실"이라면서 "올림픽 이후에도 국제대회 단일팀 구성과 관련한 논의가 이어진다면, 충분한 준비 기간과 객관적인 선수 선발로 논란을 잠재운 독일의 사례를 참고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송지훈 기자 milkyman@joongang.co.kr

평창올림픽에서 단일팀을 이룰 한국 여자 아이스하키(왼쪽)와 북한 여자 아이스하키. [연합뉴스]

평창올림픽에서 단일팀을 이룰 한국 여자 아이스하키(왼쪽)와 북한 여자 아이스하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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