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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취재일기

일본이 ‘관방장관 기밀비’를 다루는 방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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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서승욱 기자 중앙일보 정치국제외교안보디렉터
서승욱 일본지사장

서승욱 일본지사장

지난 19일 일본 사회의 이목은 관방기밀비 공개에 대한 일본 최고재판소의 판결에 쏠렸다. 관방기밀비는 정권의 2인자로 총리를 보좌하는 관방장관이 ‘국정 운영에 필요하다고 판단해’ 쓰는 돈이다. 구체적인 용처를 안 밝혀도 되고, 영수증도 필요 없다. 일본에서 ‘권력의 윤활유’로도 불리는 ‘일본판 특수활동비’다.

정보수집비, 해외출장 의원 격려금, 국회대책비 등에 쓰인다지만 공개된 적이 없어 정확히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 그래서 과거엔 “여야 의원 포섭에 썼다” “양복을 사고 동창회비를 냈다”는 폭로와 정쟁의 소재가 됐다. 야당도 그 필요성 자체는 인정한다. 2009년 정권교체에 성공했던 민주당도 집권 전엔 ‘기밀비 대폭 삭감, 일정 기간뒤 용처 공개’를 약속했다. 하지만 정권을 잡은 다음엔 “모든 걸 오픈해야 할 근거가 없다”고 딴소리를 해 비난을 샀다.

관방기밀비의 항목은 크게 3가지다. 정책 관련 ‘정책추진비’, 정보수집비인 ‘조사정보대책비’, 정보수집을 돕기 위한 경조사비 등 ‘활동관계비’다. 매년 14억6000여만엔(약 140억원) 정도다. 한 번도 쓰임새가 공개된 적이 없는 눈먼 돈에 대해 시민단체가 지출 시기·용처·금액을 밝히라는 소송을 냈고, 사법부의 최종 판결이 나온 것이다.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판결은 기밀비의 이월액과 총 잔액, 월별 사용액 관련 일부 문서는 공개토록 했다. 또 기밀비 항목 중 상대적으로 비밀 유지 필요성이 적은 정책추진비의 경우, 목적별 지출액 문서 중 일부를 공개하라고 판결했다. 반면 조사정보대책비와 활동관계비는 공개 대상에서 빠졌다. 결과적으로 ‘모든 문서의 비공개는 안 된다’면서도 누구에게, 어떤 목적으로, 얼마를 줬는지에 대해선 비공개 원칙을 견지했다.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모두 공개하라”는 시민단체의 주장과 “국정 수행을 위해 아무것도 공개 못 한다”는 정부 입장을 절충해 수용한 모양새다. 보수냐 진보냐를 떠나 언론들도 ‘이상과 현실을 모두 끌어안았다’는 평가를 내놓았다. 당사자들도 마찬가지다.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관방장관은 “판결을 무겁게 받아들이며 적절히 대응하겠다”고 했고, 소송을 제기했던 시민단체 측도 “아직 부족하지만 한 걸음은 앞으로 나갔다”고 했다.

일방적 승리도, 일방적 패배도 없는 ‘일보 전진’에서 의미를 찾는 것이다. 특수활동비를 둘러싸고 신구(新舊) 정권과 검찰, 정치권이 얽혀 진흙탕 싸움을 벌이고 있는 한국의 모습을 보자니 일본 사회의 이런 차분함이 오히려 어색하게 느껴진다.

서승욱 일본 지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