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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중생 딸과 서울 구경 왔다가 … 장흥 세 모녀의 비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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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지난 20일 오전 3시쯤 50대 유모씨가 서울 종로 5가의 한 여관에 불을 질러 방학을 맞아 서울로 여행 왔던 모녀 3명 등 6명이 숨지고 4명이 다쳤다. 2층짜리 여관 건물이 불길에 휩싸여 있다. [연합뉴스]

지난 20일 오전 3시쯤 50대 유모씨가 서울 종로 5가의 한 여관에 불을 질러 방학을 맞아 서울로 여행 왔던 모녀 3명 등 6명이 숨지고 4명이 다쳤다. 2층짜리 여관 건물이 불길에 휩싸여 있다. [연합뉴스]

서울 한복판인 종로 5가의 한 여관에서 한밤중에 벌어진 여관 주인과 만취한 손님 간의 감정 싸움이 방화로 번져 애꿎은 세 모녀가 어이없이 화마에 목숨을 잃었다. 지난 20일 새벽 서울 종로구 ‘서울장여관’ 방화로 6명이 숨진 사건을 수사 중인 서울 혜화경찰서는 21일 “세 모녀가 겨울방학을 맞아 서울여행에 나섰다가 허망하게 숨진 것으로 조사됐다”고 밝혔다. 경찰에 따르면 사망자 중 이 여관 105호에 묵었다가 바로 문 앞에서 불이 나면서 같이 숨진 여성 3명은 전남 장흥에서 온 박모(35)씨와 15세 중학생, 12세 초등학생 딸이다. 두 딸의 방학을 맞아 지난 15일부터 지방을 여행하다 19일 서울에 도착한 뒤 이 여관에 투숙해 잠을 자다 변을 당했다고 한다. 경찰 관계자는 “세 모녀가 모두 3도 화상의 중상을 입었다”며 "서울에서의 첫날 밤에 화를 당한 셈”이라고 말했다.

종로구 여관 방화로 6명 사망 #30대 엄마, 15·12세 두 딸과 투숙 #유전자 감식 통해 모녀 밝혀져 #직장일로 동행 못한 남편 오열 #성매매 거절당하자 불낸 50대 구속 #50년 넘은 여관 스프링클러 없어

특히 화재가 진압된 후 엄마 시신은 신촌세브란스병원, 중학생 딸은 국립중앙의료원, 초등학생 딸은 중구 백병원에 옮겨졌다가 유전자 감식을 통해 모녀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안타까움을 더하고 있다. 직장 일 때문에 혼자 장흥에 남았던 남편 A씨는 이날 경찰에 나와 가족관계 등에 대해 조사를 받은 뒤 시신을 확인하고는 오열했다고 한다.

21일 영장실질심사를 받기 위해 서울 종로경찰서를 나서고 있는 유씨. [뉴시스]

21일 영장실질심사를 받기 위해 서울 종로경찰서를 나서고 있는 유씨. [뉴시스]

혜화서는 이날 불을 낸 유모(53)씨를 현존건조물방화치사 혐의로 구속하고 방화 피해자 전원의 신원 확인을 마쳤다. 화재 원인은 여관을 찾은 유씨가 주인 김모(71)씨에게 "성매매 여성을 불러 달라”고 요구했다가 거절당하자 홧김에 저지른 것으로 나타났다. 주인 김씨가 거절하자 유씨는 112에 "투숙을 거절한다”며 신고했다. 당시 출동한 경찰관은 유씨에게 "성매매와 업무방해 혐의로 처벌받을 수 있다”고 경고한 뒤 돌려보냈다. 하지만 유씨는 귀가하지 않고 인근 주유소로 가 휘발유 10L를 구입한 뒤 돌아왔다. 이어 오전 3시쯤 휘발유통을 여관 1층 출입구에 던지고 불을 붙였다. 1층에서 시작된 불은 순식간에 건물 3층 전체로 번졌다. 여관 주인 김씨는 "여관으로 돌아온 유씨가 처음에는 물을 끼얹는 줄 알았다. 이어 펑 소리가 나더니 순식간에 불길이 치솟아 올랐다”고 말했다. 불은 순식간에 여관 전체를 덮치면서 여관 투숙객 6명이 숨지고 4명이 크게 다쳤다. 5명은 현장에서 숨진 채 발견됐고 중상을 입고 병원으로 옮겨진 김모(54)씨는 21일 오후에 숨졌다.

경찰과 소방 당국은 인명 피해가 컸던 이유에 대해 건물의 노후화를 지목했다. 경찰 관계자는 "휘발유에 불을 붙이면 유증기가 번져 불이 순식간에 퍼진다. 늦은 시간 손님들이 자고 있었던 데다 건물 자체가 오래됐고 통로가 좁았던 이유도 피해를 키웠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해당 건물은 1964년 처음 사용승인을 받았고 등기부등본상 89년에 소유권이 기록돼 있다. 1층과 2층이 벽돌·슬래브 식으로 이뤄진 건물 옥상에는 샌드위치 패널 소재의 가건물이 얹혀 있다. 내부에는 나무로 된 구조물이 많았지만 화재에 대비한 스프링클러는 설치돼 있지 않았다. 경찰 관계자는 "소형 건물이라 스프링클러 설치 대상도 아니었다”고 설명했다.

지은 지 50년이 넘은 여관은 객실과 창고 등을 합해 총 10개의 방이 있을 정도로 좁았다. 객실 투숙비는 하루 5만원대. 월 45만원(1박당 1만5000원)이면 장기 투숙이 가능했다. 인근 주민들은 "해당 여관은 여관바리(성매매)로 돈을 버는 곳으로 소문나 있다”고 말했다. 여관 측은 "성매매로 돈을 번 적이 없다”며 부인했다.

여관의 유일한 출입구인 1층 입구가 막혔던 점도 피해를 키운 원인으로 지적된다.

최규진·송우영·여성국 기자 choi.kyuj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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