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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치된 손자 … 인색한 갑부 할아버지의 선택은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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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7호 30면

세계 최고 부호 존 폴 게티 회장(크리스토퍼 플러머)의 해결사인 전 CIA요원 플래처(마크 월버그)는 회장의 긴급 호출을 받고 대저택에 도착한다. 거기엔 이미 게티의 며느리 게일(미셸 윌리엄스)이 초조하게 줄담배를 피우는 중이다. 게일은 아들, 곧 게티 가(家)의 3세인 폴 게티가 이탈리아 마피아에 납치돼 혼이 나가 있는 상황. 그런데도 시아버지인 존 폴 게티 1세는 몸값을 지불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 돈은 어마어마하게 많지만 자기 집에 오는 사람들이 전화 쓰는 게 아까워 저택 안에 공중전화를 설치해 놨을 정도로 인색한 인물이다. 게일은 울화가 치민다. 돈을 잃느니 손자가 죽건 말건 상관하지 않을 냉혈한이기 때문이다.

영화 ‘올 더 머니’ #감독: 리들리 스콧 #주연: 미셸 윌리엄스 #크리스토퍼 플러머 #마크 월버그 #등급: 15세이상 관람가

그런 그녀의 마음을 아는 척 모르는 척 회장 면담을 기다리며 거실을 왔다 갔다 하던 플래처는 작은 그림 앞에서 걸음을 멈춘다. “이건 못 보던 거네. 베르메르 그림치고는 작군요.” 그의 중얼거림에 게일 역시 지나가는 말투로 답한다. “베르메르는 원래 작아요.”

베르메르의 16세기 걸작, 냉랭한 대부호의 거실에 걸려 있는 작은 그림, 상상을 초월하는 그림의 가격, 그리고 유괴사건, 어쩌면 그림 값 정도에 불과한 손자의 몸값…. 모든 것의 의미와 느낌이 응축돼 있는 이 장면은 영화가 우리를 어디로 인도할지 가늠케 해준다. 리들리 스콧 감독의 신작 ‘올 더 머니’를 보는 사람들은 1973년이 상징하는 혼돈의 시대로 들어 갈 준비를 해야 한다.

모든 것이 돈이면 해결될 수 있을 줄 알았던 시기. 원제 ‘올 더 머니 인 더 월드(All the money in the world)’가 의미하듯 ‘세상의 모든 돈(은 내것)’이라고 착각하며 살았던 시대.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트남전에서는 패하고, 자신의 대통령은 불명예스럽게 하야했으며(리처드 닉슨), 남미에서는 반공(反共) 블록을 형성하려고 서서히 마약 카르텔 같은 범죄 집단과 손을 잡으려던 때. 민권과 인권 따위는 후순위로 밀려나던 시절이었는데, 생각해 보면 그러지 않았던 시기가 있었나 싶다. 미국, 세계 모두는 야만의 시대를 거쳐 지금에 이른 셈이다.

미국은 ‘무지막지한 돈=자본주의의 왕국’을 건설했지만 그 돈을 올바로 쓸 줄 아는 ‘왕=지도자=아버지’는 갖지 못했다. 역사적 인물이자 영화 속 인물인 존 폴 게티는 바로 그런 시대를 대표한다. 그는 종종 이렇게 떠벌인다. “부자가 되는 게 어려운 것이 아냐. 부자로 사는 게 어려운 거지!” 정작 부자가 됐을 뿐, 그 역시 부자로서 부자처럼 제대로는 살지 못했다.

노(老)감독은 영화를 통해 바로 그 얘기를 하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인다. 자본주의가 풍요로운 세상을 만든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는 것. 하지만 그 자본의 풍요가 과연 우리 모두를 함께 풍요롭게 만들었느냐, 그건 아니지 않았느냐는 자성(自省)이다.

자본주의가 지난 반세기 동안 우리에게 가르쳐 준 유일한 점이 있다면 돈에 대한 인간의 탐욕이란 존 폴 게티처럼 끝이 없다는 것이며, 그 늪에 빠지면 도저히 헤어 나올 수 없다는 점이다. 자본이 인간성을 회복하기까지 우리가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 처방을 알고 싶다는 욕망이 리들리 스콧으로 하여금 역사의 시간을 45년으로 되돌려 게티 3세 유괴 사건을 다시 한번 파헤치게 했다.

존 폴 게티는 그가 남겨 놓은 유적인 게티 미술관으로 유명하며, 그것 때문에 후세에 가까스로나마 꽤나 괜찮은 억만장자의 이미지로 남았다. 그러나 그가 정작 만들고 싶었던 것은 미술관 옆에 있는 헤르큘라네움 시대의 파피루스 저택이었다. 그는 자신을 로마의 황제로 착각하며 살았다. 그러니까 게티 미술관은 일종의 덤이었던 셈이다.

사람이 나이를 먹으면 몸과 마음이 좀 굽게 마련이지만 올해 여든하나인 리들리 스콧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얘기다. 그는 노익장을 넘어 오히려 절대적 회춘기에 들어선 듯이 보인다. 올해만 해도 ‘올 더 머니’를 포함해 ‘에이리언 커버넌트’ ‘블레이드 러너 2049’ ‘오리엔트 특급살인’ 등 일곱 편의 영화를 감독하거나 제작했다. 이 영화는 73년 벌어졌던 존 폴 게티 3세 유괴사건을 통해 지금의 우리는 예전의 그때보다 단 한 치도 진화하거나 진보하지 못했음을 강조한다.

리들리 스콧은 명장(名匠)을 맞는 사람들의 기대를 배신하지 않는다. 압도적인 이야기 전개방식으로 낙지 빨판처럼 사람들을 빨아들여 2시간 여 동안 집중하게 한다. 그리고 끝나고 잠시나마 말을 잃게 한다. 정통의 영화란 바로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

글 오동진 영화평론가 ohdjin@hanmail.net
사진 판씨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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