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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능은 공짜가 아닙니다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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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7호 29면

수년 전, 한 건축가에게 들은 이야기다. 당시 진행되던 서울 영등포구 쪽방촌 재단장 사업 관련 경험담이었다. 사업을 진행하던 지자체가 그에게 “재능기부로 해달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어렵게 사는 어르신들에게 보금자리를 만들어 주는 좋은 일이니 무료 봉사를 하라는 이야기였다.

반갑다, 공공디자인 창작 보수제

하지만 좋은 일을 위한 대가는 컸다. 설계비는 물론, 다른 업체에 맡겨야 하는 소방ㆍ전기 등 설계 하도급 비용까지 건축가가 알아서 감당해야 했다. 설계를 위해 들여야 하는 시간과 노동력은 물론이고, 하도급 비용까지 셈하면 수천만 원의 돈이 드는 일이었다. 그는 “결국 거절했지만 앞으로 해당 지자체의 일을 못 할까봐 두렵기도 했다”며 “예산이 있는 지자체가 노동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지급하지 않고, 재능기부 운운하며 공짜로 일해 달라고 강요해서야 되겠느냐”며 분통을 터뜨렸다.

재능 기부, 그야말로 개인이 가진 재능을 기부해 사회 발전에 기여하는 행위다. KAIST 정재승 교수가 2010년 “소도시 청소년들을 위한 ‘과학 강연 기부’ 프로젝트를 하자”며 SNS에 올린 글이 화제가 되면서 더욱 주목받기 시작했다. 1회성으로 끝나기 쉬운 금전 기부보다 다양한 재능을 필요로 하는 곳에 지속적으로 기부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진화된 기부 형태로 꼽혔다. 재능 기부를 하려는 사람과 받는 사람을 연결하는 재능기부 코디네이터가 새로운 직업으로 떠오를 정도였다.

하지만 요즘 재능 기부 사례는 미담보다는 “나도 당했다”는 제보로 귀결되는 모양새다. 재능인이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게 아니라, 재능 기부를 요구당하기 시작하면서다. 최근 인천시는 ‘재능기부형 시민공원 사진가’를 모집하면서 시민 사진가로부터 사진 사용권을 받아 홍보물을 제작하거나 전시회를 열겠다고 밝혀 눈총을 샀다. 모집 안에는 시민 사진가의 전문성 강화를 위해 전문 작가의 재능기부를 받아 사진 교육을 하겠다는 내용도 있었다. 앞서 2016년에는 인천시내 일대 버스킹존을 지정하면서 예술가들에게 의무 공연을 재능기부로 하라고 요청하기도 한 터였다. 지자체의 공공사업 계획서 안에 ‘재능기부로 진행하겠다’는 문구가 들어가는 순간, 선의는 사라지고 착취만 남게 될 우려가 크다.

그나마 18일 문화체육관광부가 고시한 ‘공공디자인 용역대가 산정 기준’ ‘공공디자인 제안서 보상 기준 및 절차’ 등에서 개선의 여지가 보인다. 정부가 운영ㆍ관리하는 공공디자인 분야에서 창작 활동에 대한 정당한 보수를 받고 요구할 수 있는 기준이 만들어진 것이다.

고시 내용에 따르면 정부나 공공기관에서 발주한 공공디자인 사업에 참여하는 디자이너는 직급에 따라 일정 수준의 월급을 보장받게 된다. 아이디어의 대가를 ‘창작료’로 지급하게 한 것도 눈에 띈다. 또 공모전에 당선되지 않았더라도 우수한 제안서를 제출한 응모자에게 최소한의 비용을 보전할 수 있게 했다. 완벽하지 않더라도, 인식의 전환을 위한 마중물은 부어졌다. 예술노동도 노동이다. 재능은 공짜가 아니다. ●

글 한은화 기자 onhwa@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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