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빈자 병원과 거액 기부자, 표도르가 본 돈의 양면성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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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7호 14면

러시아 국립도서관 앞에 세워진 도스토옙스키 동상. 인민 예술가이자 예술 아카데미 회원인 알렉산더 루카비슈니코프의 작품이다. 모스크바 정도(定都) 850주년 기념 행사의 일환으로 1997년 제막됐다.

러시아 국립도서관 앞에 세워진 도스토옙스키 동상. 인민 예술가이자 예술 아카데미 회원인 알렉산더 루카비슈니코프의 작품이다. 모스크바 정도(定都) 850주년 기념 행사의 일환으로 1997년 제막됐다.

표트르 스미르노프는 1831년 모스크바 북동쪽의 두메 산골에서 농노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밭일과 허드렛일로 힘든 소년 시절을 보냈지만 부지런하고 명민한 아버지 덕분에 1857년 농노신분에서 해방되어 모스크바로 올라왔다. 처음에는 선술집에서 잔심부름을 하며 일을 익히다가 아버지가 개업한 자그마한 주류 잡화점에서 점원으로 일했다. 그러다가 1863년 직원 9명을 고용해 양조장을 설립했다. 일설에 의하면 어느 부인이 아버지의 가게에 왔다가 표트르의 해사한 미소가 마음에 들어 복권을 선물했는데, 그것이 당첨되는 바람에 창업 자금을 조달할 수 있었다고 한다.

석영중의 맵핑 도스토옙스키 #<3> 모스크바: 돈을 읽다

표트르는 가장 싸고 가장 맛있는 보드카를 만들기 위해 미친 듯이 일했다. 후대의 역사가들은 그를 ‘마케팅의 귀재’로 평가한다. 그는 길바닥 거지들을 데려다 술과 밥을 공짜로 먹인 다음 푼돈을 쥐여주며 선술집에 들러 스미르노프네 술을 청하라고 시켰다. 모스크바 싸구려 주점에서 시작된 스미르노프 보드카 열풍은 몇 년 새 러시아 전역에 들불처럼 번졌다. 요즘 식으로 하면 ‘바이럴 마케팅’이다.

타고난 사업 마인드와 근면함과 공격적인 마케팅 덕분에 그는 10년 만에 러시아 비즈니스계의 거두로 우뚝 솟아올랐다. 스미르노프 상회는 명실상부 러시아를 대표하는 보드카 브랜드로서의 입지를 굳혔고 나중에는 황실에 독점적으로 납품하는 영예까지 누렸다. 농노의 아들이 19세기 말 러시아에서 가장 부유한 사업가 중 하나가 된 것이다. 오늘날 130여 국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스미르노프 보드카(Smirnoff Vodka·현재는 영국 회사)의 창업주, ‘보드카의 제왕’으로 기억되는 사람 얘기다.

1893년 러시아 신문에 실린 스미르노프 회사 광고

1893년 러시아 신문에 실린 스미르노프 회사 광고

스미르노프 이야기는 러시아 상인계층을 설명하는데 의미심장한 출발점이 된다. 그토록 화려한 성공 드라마에도 불구하고 동시대인들은 스미르노프가를 모스크바의 뼈대 있는 ‘상인 가문’으로 인정해주는데 인색했다. 러시아어로 ‘쿠페체스트보(kupechestvo)’라 불리는 상인계층은 전통적으로 모스크바를 중심으로 번성했다. 문학 속에서 상인계층은 종종 고루하고 무식하고 포악한 부류로 묘사되곤 했다.

그러나 소위 ‘비즈니스 엘리트’로 분류되는 유서 깊은 상인 가문은 얘기가 달랐다. 그들은 중소 상인들과도, 우랄의 광산주나 남러시아의 설탕 재벌이나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졸부와도 격을 달리했다. 그들은 자기 계발에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인 끝에 번듯한 교양과 나름의 철학을 갖추게 된, 이를테면 후천적 지식인이자 만들어진 귀족이었다. 그들의 관록은 재력보다는 양식과 박애주의와 사회에 대한 기여를 척도로 완성됐다. 대부분의 엘리트 상인 가문이 어느 정도 부를 축적하면 예외없이 성당 건축이나 개축, 이콘 봉헌, 그리고 기부를 실행에 옮긴 것도 이 때문이다.

요컨대 엘리트 상인 가문에게는 출신이나 부의 규모보다 내적 성장이라는 의미에서의 ‘숙성’이 더 중요했다. 보드카 재벌 스미르노프가 모스크바 상인가문 축에 끼지 못한 것은 한마디로 ‘숙성’이 안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거액의 돈을 성당과 성직자들에게 기부했지만 그것은 빈민구호를 위해서가 아니라 교회를 중심으로 번져가고 있던 금주 운동을 저지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니까 그의 기부는 철학이 아닌 약삭빠른 투자였고, 민중은 그것을 간파하곤 혀를 찼던 것이다.

존경받는 상인가문으로 시집간 이모를 통해 배운 것  

도스토옙스키의 외가쪽 친척으로 대부호였던 쿠마닌의 옛 저택. 정원에 여류시인 안나 아흐마토바의 동상이 있다.

도스토옙스키의 외가쪽 친척으로 대부호였던 쿠마닌의 옛 저택. 정원에 여류시인 안나 아흐마토바의 동상이 있다.

19세기 중엽 모스크바에서는 우샤체프·돌고프·모스크빈 그리고 쿠마닌 가문이 존경받는 상인가문으로 꼽혔다. 이 중 쿠마닌 가문은 도스토옙스키의 삶과 깊이 연관돼 있다. 이모가 거상 알렉세이 쿠마닌가의 차남 알렉산드르와 결혼하는 바람에 그는 대부호를 외가 쪽 친척으로 두게 되었다. 아버지는 쿠마닌가의 주치의이기도 했다. 알렉세이 쿠마닌은 상인의 신분으로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지위인 모스크바 시장에까지 오른 입지전적 인물이었다. 이모네 식구들은 모스크바 남쪽의 으리으리한 저택에 살았으며, 호화스러운 사륜마차를 타고 종종 도스토옙스키가 살던 병원에 들르곤 했다.

어린 표도르는 빈민병원에 늘어서있던 극빈자를 엿보던 바로 그 눈으로 이번에는 화려하고 유복한 사람들을 훔쳐보았다. 그는 돈을 보았다. 쿠마닌 사람들이 빈민을 위해 기부한 거액의 희사금을 보았고, 그들이 가져오는 고급 선물도 보았다. 아버지는 이모네 식구들을 경원시했다. 언젠가는 이모부와 대판 싸우기도 했다.

훗날 도스토옙스키는 “돈은 주조된 자유다”라는 유명한 말을 했다. 어린 시절 느낀 돈의 속성을 그대로 담고 있는 말이다. 돈은 인간을 질병과 빈곤, 그리고 심리적 억압에서 해방시켜줄 수 있는 실질적이고 막강한 힘이었다. 또 그래서 돈의 부재는 부자유와 굴종, 육체적이고 정신적인 사망을 의미했다.

도스토옙스키와 돈의 관계는 책 한 권을 써도 모자랄 만큼 복잡하다. 그는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연민을 멈춘 적이 없지만 또 그렇다고 해서 부자라고 무조건 비난하지도 않았다. 탐욕과 인색을 혐오했지만 돈 자체를 악으로 치부하지도 않았다.

도스토옙스키가 돈과 관련해 일관되게 우려했던 것은 병적인 집착에서 촉발되는 맹목적인 ‘축적’이었다. 도스토옙스키 사전에서 축적이 의미하는 바는 쿠마닌가의 저택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모스크바 도심에서 그린라인 전철을 타고 남쪽으로 한 정거장만 가면 전통적으로 상인들이 군집해 살던 ‘자모스크바레치예’ 지역이 나온다. 그저 강 하나 건넜을 뿐인데 전철역 밖은 분위기가 많이 다르다. 크고 작은 옛 성당, 고풍스러운 건물과 가게, 꼬불꼬불한 골목은 현대의 도시문명으로부터 한걸음 떨어져 있는 듯 보인다.

이곳 볼샤야 오르딘카 거리 17번지에 남아있는 우중충한 건물이 한 때 쿠마닌가가 소유했던 저택이다. 혁명 이후 증축과 개축을 거치면서 옛날의 화려한 면모는 간데없고 그저 회색 시멘트로 땜질한 흉물스러운 공동주택처럼 보일 뿐이지만, 그 문학적 의의는 상당하다. 무엇보다도 20세기 러시아를 대표하는 여류시인 안나 아흐마토바가 거주했던 곳으로 유명하다. 마당에는 그녀의 동상도 있다.

그러나 이곳은 도스토옙스키의 문학적 원천 중 하나이기도 하다. 어린 시절 이 집을 종종 방문했던 도스토옙스키가 훗날 건물 외관에 철학을 입힌 뒤 소설 『백치』 속으로 들여왔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와 돈의 윤리를 다각도에서 탐색하는 이 소설에는 온갖 부류의 사업가와 상인들이 등장하는데, 그 중 가장 핵심 인물은 상인 가문의 아들 로고진이다. 그는 인색한 아버지한테 물려받은 돈을 아무리 쏟아 부어도 사랑하는 여자를 소유할 수 없다는 걸 깨닫자 그녀를 죽여 버린다. 로고진가의 집은 소설에서 페테르부르크의 사도바야 거리와 고로호바야 거리가 교차하는 지점에 있다고 명시되지만, 실제로는 쿠마닌 저택이 그 모델이라고 알려져 있다.

세상과 담쌓고 돈만 세다가 죽는 부자 형상화

“그런 집들은 도시 자체의 변화를 쫓아가지 못하고 거의 옛 모습 그대로 남아있었다. 견고하게 세워진 이 집들의 벽은 두꺼웠고 창들은 아주 띄엄띄엄 드물게 나있었다. 아래층 창문에 창살이 끼워져 있는 집도 더러 보였다. 아래층은 대부분 환전상들이 차지하고 있었고 위층에는 환전상에서 일하는 거세파 교도들이 세를 살고 있었다. 이런 집들은 안이나 밖이나 별로 인심이 좋아 보이지 않고 메말라 보였다. 모든 것이 숨어들어가 은밀하게 보였다. 왜 집들이 하나같이 그런 인상을 풍기는지는 설명하기 곤란하다. 물론 건축에서 선의 결합은 나름대로의 비밀을 간직하고 있었다. 이런 집들에서는 거의 예외 없이 상인들이 살고 있었다.”

쿠마닌 가문의 문장

쿠마닌 가문의 문장

쿠마닌은 명망 높은 모스크바 상인이고 『백치』의 로고진은 수전노의 아들이자 살인범이므로 두 가문을 동급으로 놓고 보는 것은 부당하다. 게다가 쿠마닌 이모의 관대한 원조 덕에 몇 번인가 심각한 경제적 위기에서 빠져나온 도스토옙스키로서는 쿠마닌가를 어떤 식으로든 폄하할 입장이 아니다. 쿠마닌 저택을 소설 속으로 옮겨온 것은 그 집의 외관에서 연상되는 ‘축적’ 때문이다.

소설 속에서 로고진의 아버지는 세상과 담을 쌓은 채 이 집에 들어앉아 평생 돈만 세다가 눈을 감는다. 두꺼운 벽과 작은 창문과 창살은 즉각적으로 건물의 안과 밖을 분리한다. 변화를 거부하는 집, 거기 사는 인간, 그리고 그가 차곡차곡 쌓아올리는 돈은 어느 순간 일체가 된다. 높이 올라가는 부와 점점 더 안으로 들어가는 인간-수직적인 축적과 수평적인 단절은 사실상 하나다. 축적과 단절이 도스토옙스키 소설에서 언제나 함께 가는 이유다. 흐르지 않는 시간과 막힌 공간은 정체된 인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돈, 죽음 같은 삶에 대한 환유다.

한 마디 덧붙이자면, 로고진 저택의 두꺼운 벽과 작은 창문은 아이러니하게도 러시아 성당 건축의 가장 기본적인 조건이다. 빛은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게 아니라 성당 안에서 밖으로 퍼져나간다는 것이 그 신학적 의미다. 상인의 집과 성당은 최소한 건축학적 조건을 공유하는 셈이다.

이런 시각에서 보면 부는 빛처럼 퍼져나갈 수 있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실제로 쿠마닌가는 길 건너편 성당 증축에 거금을 봉헌했다. 볼샤야 오르딘카 거리는 이 성당 때문에 도스토옙스키의 삶과 더욱 긴밀하게 연결된다. 1836년 가을 쿠마닌가의 봉헌금으로 증축된 이 성당의 축성 미사에 도스토옙스키 부자도 참석했다. 이듬해 모스크바를 떠났던 도스토옙스키는 22년 뒤 마치 자석에 이끌리듯 다시 이 집과 성당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그건 다른 얘기이니 때가 되면 하기로 하자. ●

석영중 : 고려대 노문과 교수. 『도스토예프스키, 돈을 위해 펜을 들다』 『자유, 도스토예프스키에게 배운다』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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