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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운 세계] "비밀경찰 지원해놓고…" 이란·미국은 왜 철천지원수 됐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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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스마트폰만 들면 먼 나라 소식들이 들려옵니다. 중동의 자살 테러, 아프리카의 독재자, 지중해를 떠도는 난민들의 이야기가 실시간으로 전해집니다. 뉴스를 볼 땐 착잡하다가도 다른 기사를 클릭하다 보면 어느새 무뎌지곤 하죠.

그런데, 같은 이야기를 영화로 보면 어떠신가요. 스크린 속 인물들에 몰입해 함께 웃고 울다 보면 그 상황이 그저 남의 일로만 느껴지진 않을 겁니다. 먹먹한 감정이 며칠이나 일상 속에서 일렁이기도 하죠.

제가 국제 뉴스를 ‘영화’ 이야기를 통해 소개하려는 이유입니다. 머나먼 곳에서 일어난 일이라 해도 우리와 무관한 일은 없으니까요.

이제 [임주리의 영화로운 세계]로 초대합니다.

그 첫 번째 편은 ‘이란과 미국’입니다. 때로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일이 펼쳐지기도 했던, 중동의 맹주와 세계 최강국의 수십 년에 걸친 애증의 역사는 어땠을까요.

알리 하메네이 이란 최고지도자 [AFP=연합뉴스]

알리 하메네이 이란 최고지도자 [AFP=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연합뉴스]

최근 이란과 미국 관련 뉴스를 질리도록 보셨을 겁니다.

요약하면, 이란에서 경제난 등의 문제로 반정부 시위가 일어났는데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옳다구나’하고 시위대를 지지, 이란 정부가 인권을 탄압한다며 마구 비판한 일입니다.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 이란 최고지도자도 지지 않고 트럼프가 ‘정신병 환자’라 비난했죠. 날 선 공격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쏟아지는 뉴스 속에서 혹시 이런 궁금증이 들진 않으셨나요.

‘이란과 미국은 도대체 왜 이렇게 사이가 나쁠까? 설마… 나만 몰라?’

두 나라는 왜 이리 철천지원수가 됐을까요? 믿을 수 없겠지만, 이란과 미국은 한때 혈맹이라 할 정도로 가까웠는데 말이죠.
그 애증의 역사를 알려면 시간을 되돌려 1979년으로 가야 합니다. 할리우드 톱스타 벤 애플렉이 감독과 주연을 겸한 영화 ‘아르고’(2012)를 먼저 보시죠.

◇ ‘스파이의 소굴’ 미국 대사관을 점거하라!

영화 '아르고'의 한 장면. 성난 시위대가 미국 대사관 앞으로 향했다.

영화 '아르고'의 한 장면. 성난 시위대가 미국 대사관 앞으로 향했다.

1979년 11월 이란 테헤란의 미국 대사관.

건물 앞을 가득 메운 성난 시위대를 창문 너머 바라보는 미국인 직원들이 덜덜 떨고 있습니다. 이란 독재 정권 팔레비 왕조를 무너뜨리자는 ‘이슬람 혁명’의 불길이 활활 타오르던 때였죠. 사람들은 독재자 무함마드 레자 샤(‘샤’는 페르시아어로 왕을 뜻함) 팔레비의 망명을 받아준 미국에 ‘샤를 내놓으라’며 시위를 벌이다 급기야 대사관을 점거했습니다.

그런데 이 난리 통을 틈타 직원 6명이 몰래 탈출해 캐나다 대사관으로 향합니다. 들키면 처형될 것이 뻔해 꼼짝없이 이곳에 숨어있어야 했죠. 미국 정부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을 때 중앙정보국(CIA) 요원 토니(벤 애플렉)가 묘안을 냅니다.

“이 6명을 캐나다 영화 제작자로 속입시다. 할리우드 SF 영화를 찍기 위해 이란에 로케이션 헌팅을 간 거라고 하자구요!”

속이려면 제대로 해야겠죠.
토니는 영화 제작자의 도움을 받아 할리우드에 사무실을 차리고, 배우를 캐스팅하고, 미디어를 초청해 파티를 여는 등 온갖 ‘쇼’를 벌입니다.

영화 '아르고'의 한 장면. 가짜 영화 '아르고'를 열심히 준비하는 모습.

영화 '아르고'의 한 장면. 가짜 영화 '아르고'를 열심히 준비하는 모습.

영화 '아르고'의 한 장면. CIA 요원 토니(벤 애플렉) 뒤로 호메이니의 초상화가 보인다.

영화 '아르고'의 한 장면. CIA 요원 토니(벤 애플렉) 뒤로 호메이니의 초상화가 보인다.

모든 준비를 마치고 테헤란을 찾은 토니의 눈 앞에 펼쳐진 풍경은 살벌합니다. 총을 든 혁명수비대가 곳곳에서 감시하고 있고, 처형된 사람들의 시신이 크레인에 걸려있죠. 어쨌든 토니의 작전은 성공합니다. 말도 안 된다고요? 그러나 엄연히 실화입니다. (물론 미국인의 시각에서 그린 탓에 이란에선 크게 분개했죠.)

영화는 여기서 끝나지만, 나머지 인질 수십 명은 무려 444일이나 억류돼 있었습니다. 미국으로선 참으로 체면을 구긴 일이었고, 이란과 미국의 관계는 나빠질 대로 나빠졌죠.

◇ 소련과 석유 때문에 독재자 지원한 미국

영화 '아르고'의 한 장면

영화 '아르고'의 한 장면

그런데 말입니다.

단지 미국이 샤의 망명을 받아줬다는 이유만으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요?
사실 미국을 향한 이란인들의 분노는 수십 년간 쌓인 것이었습니다.

좀 더 시계를 돌려보지요.

제국주의가 전 세계를 삼킨 20세기 초, 페르시아 제국의 영광을 쓸쓸히 흘려보낸 이란은 러시아와 영국의 반식민지 상태에 있었습니다. 지정학적 요충지였을 뿐 아니라 석유가 펑펑 솟아나는 땅이었으니까요. 이란은 신생 강대국 미국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싶었지만, 러시아와 영국이 틈을 줄 리가 있나요.

그러다 제2차 세계대전이 터집니다. 영국ㆍ소련ㆍ미국은 같은 편이 됐죠. 미국은 소련에 전쟁 물자를 공급해야했는데, 가장 안전한 보급로가 이란이었습니다. 레자 샤는 이때를 놓치지 않고 그토록 동경하던 미국을 받아들입니다. 군대를 비롯한 모든 걸 ‘미국식’으로 바꾸기 시작했죠. 이란과 미국의 밀월 관계가 시작된 겁니다.

1950년 2월 16일 이란 테헤란의 상원 의회에서 국왕(Shah) 취임 선서를 읽는 무함마드 레자 팔라비(팔레비). [사진 위키피디아]

1950년 2월 16일 이란 테헤란의 상원 의회에서 국왕(Shah) 취임 선서를 읽는 무함마드 레자 팔라비(팔레비). [사진 위키피디아]

전쟁이 끝나자 이번엔 미국과 소련의 냉전이 시작됐습니다.

미국은 중동에 소련의 세력이 뻗는 걸 막기 위해 이란을 ‘절대 방어’해야 했습니다. 영원한 우방 이스라엘 또한 지켜야 했고, 석유야 말할 필요도 없었죠. 미국과 이란 관계는 더욱 끈끈해졌습니다.

그런데 1951년. 샤의 독재를 비판하던 무함마드 모사데크 총리가 ‘이란 석유를 이란인의 손에 주겠다’며 석유 국유화를 단행합니다. 원유를 헐값에 가져가던 영국 석유 기업들과 미국은 깜짝 놀랐죠.

결국, 미국과 영국은 막강한 자금으로 쿠데타를 부추겨 모사데크를 제거, 망명했던 레자 샤를 다시 불러와 친미 정권을 세웠습니다. 엄청난 군사ㆍ경제적 원조를 해주고 석유회사도 세웠죠.

샤는 반발하는 시민들을 비밀경찰 ‘사바크’를 동원해 폭력으로 짓밟았습니다. 그런데 사바크에 끔찍한 고문 기술을 알려준 건 누구였을까요?

“CIA는 ‘해외 내부안보프로그램(Overseas Internal Security Program)’이라는 프로젝트를 통해 25개국에서 군과 경찰 77만 1217명을 훈련시키는 한편 이란, 이라크 등 (기타 수많은 나라)의 비밀경찰 창설을 지원했다.”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 中)

이란 '이슬람 혁명'을 이끈 지도자 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 [사진=위키피디아]

이란 '이슬람 혁명'을 이끈 지도자 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 [사진=위키피디아]

마침내 종교 지도자 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를 중심으로 혁명이 발발합니다.
미국의 지원, 석유 수출 등으로 경제성장률은 연 40%에 달했지만, 빈부 격차는 심했고 서민들의 삶은 나락으로 떨어졌기 때문이었죠.

“이란의 반(反)샤 운동은 20세기에서, 아니 인류사에서 최대 규모의 대중운동이었다”(『이란과 미국』 中)

혁명은 성공했지만, 혼란은 계속됐습니다. 자유주의자들과 보수적 종교 세력 등 여러 집단 간 싸움이 격렬해진 거죠. 당시 상황이 어땠느냐고요?

애니메이션 영화 ‘페르세폴리스’(2007)는 이 시절을 온몸으로 통과한 소녀 마르잔을 통해 당시 분위기를 보여줍니다. 이란 출신 감독 마르잔 사트라피의 자전적 이야기이기도 하죠.

영화 '페르세폴리스'의 한 장면. 미국이 괴물처럼 묘사돼 있다.

영화 '페르세폴리스'의 한 장면. 미국이 괴물처럼 묘사돼 있다.

독재자를 쫓아냈다는 소식에 마냥 신나던 소녀는 자유를 위해 싸워온 삼촌이 처형당하자 혁명에 의문을 품기 시작합니다. 아디다스와 이소룡을 좋아하던 마르잔은, 차도르와 정숙을 강요하는 문화에 적응하지 못하죠. 억압적인 분위기 속에서 몰래 파티를 열고 암시장에서 서방 팝가수들의 음반을 사는 사람들의 모습이 소녀의 눈을 통해 전해집니다.

영화 '페르세폴리스'의 한 장면.

영화 '페르세폴리스'의 한 장면.

그러다 진짜 큰일이 터집니다.

1980년 9월, 이웃 나라 이라크가 침공해온 거죠.

◇ 이란-이라크 전쟁, 미국은 또 이란을 버렸다

이라크 후세인 정권은 이란이 내분을 겪자 이때다 싶었습니다. 종교ㆍ영토 문제에 유전 지대를 두고 벌어진 전쟁이었죠. 이라크군의 위력은 가공할 만했습니다. 게다가 이란군 동향을 샅샅이 찍은 위성사진도 이라크의 손에 있었죠. 누가 줬을까요?

네, 미국이었습니다.

이란 사람들은 미국이 이라크를 조종한다고 여겼습니다. 그리고 종교 지도자 호메이니 아래 단결해 치열하게 싸웠죠.

그런데 미국은 이 전쟁 중에 이상한 짓을 벌입니다.

분명 이라크에 최첨단 무기를 지원하면서도 뒤로는 이란에도 몰래 무기를 판 겁니다. 당시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은 적국인 이란에 무기를 판 돈으로 니카라과에 있는 ‘콘트라 반군’을 지원했습니다. 바로 이란-콘트라 스캔들입니다. 니카라과에서 좌파 혁명이 성공하자 친미 우파 반군을 지원하기 위해 필요한 자금을 이란에서 뽑은 거죠.

영화 '페르세폴리스'의 한 장면. 이란과 이라크의 전쟁을 묘사하고 있다.

영화 '페르세폴리스'의 한 장면. 이란과 이라크의 전쟁을 묘사하고 있다.

‘페르세폴리스’에서 마르잔의 아버지는 이렇게 말합니다.

“서방세력은 이라크와 이란 양쪽에 무기를 팔았단다. 우린 농간에 놀아난 셈이지.”  

그러다 1988년 7월, 미군이 이란 민간 항공기를 폭격기로 ‘오인’해 격추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물론 이란 사람들은 ‘오인’임을 믿지 않았죠. 그러나 이 전쟁을 끝내기로 합니다. 울며 겨자 먹기로 유엔(UN) 결의안을 받아들입니다.

◇ 두 나라는 화해할 수 있을까

이후에도 여러 갈등이 있었지만, 두 나라의 관계가 좋아질 기회는 있었습니다.

미국-이라크의 걸프전(1991년) 때 이란은 중립을 지켰고, 2001년 미국이 아프가니스탄 탈레반 정권과 전쟁을 벌일 때, 탈레반과 대립하는 북부동맹을 도왔죠. 이유야 어찌 됐든 미국에는 도움이 되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한번 틀어진 관계는 쉽게 회복되지 못했습니다.

2002년 이란 핵 관련 시설 위성사진이 공개된 이후에는 악화일로로 치달았습니다. 버락 오바마 정부 시기인 2015년 핵 협정을 맺으며 잠시 해빙기를 맞았지만, 트럼프 대통령 집권 이후 핵 협정 이행 여부를 놓고 다시 대립이 격화되는 중입니다.

이란 테헤란의 아자디 타워. 아자디(Azadi)는 페르시아어로 '자유'라는 뜻이다. [AFP=연합뉴스]

이란 테헤란의 아자디 타워. 아자디(Azadi)는 페르시아어로 '자유'라는 뜻이다. [AFP=연합뉴스]

그러나, 이란은 미국이 결코 함부로 할 수 없는 나라입니다.

이 나라는 레바논의 헤즈볼라, 팔레스타인의 하마스,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시리아의 아사드 정권 등에 큰 영향력을 가진 역내 강국입니다.

무엇보다 이란 사람들은 ‘대(大) 페르시아 제국’의 후손이라는 자긍심이 엄청납니다. 혁명을 이뤄낸 자부심도 커서 ‘아랍의 봄’(2011년 아랍권 민주화 운동) 또한 이란 혁명 정신의 영향이라 보죠.

2013년 부산을 찾은 모흐센 마흐말바프. [사진제공=라희찬(STUDIO 706)]

2013년 부산을 찾은 모흐센 마흐말바프. [사진제공=라희찬(STUDIO 706)]

2013년 가을, 저는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이란의 거장 영화감독 모흐센 마흐말바프를 인터뷰한 적이 있습니다.

그의 작품은 이란 문화에 대한 자긍심과 함께 현실에 대한 통렬한 비판으로 유명하죠. 10대 시절 레자샤 정권에 치열하게 맞섰다던 그는 말했습니다.

“경찰에 총을 맞아 병원에 입원하기도 했고 심한 고문도 받았죠. 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 처절하게 싸웠습니다. 이후에는 영화와 예술에 빠졌어요. 그러나 그 무엇을 하든 제게 중요한 것은 항상 사람, 사람이었습니다.”

사실 그는 혁명 이후에도 억압적인 종교 보수 세력에 비판의 날을 세운 탓에 갖은 핍박을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이란 민중에 대한 사랑과 조국에 대한 자긍심을 늘 가슴에 품고 있었던 거죠.

최근 시위를 벌인 이란 사람들은 어쩌면 또 다른 마흐말바프, 마르잔일지 모릅니다. 단순히 ‘세계 최강대국의 적국’에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요.

‘페르세폴리스’에서 마르잔은 결국 이란을 떠납니다. 공항에 선 마르잔의 귓가엔 아버지의 말이 맴돕니다.

“네가 누군지, 또 어디서 왔는지 잊지 말거라.”

임주리 기자 ohmaj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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