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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호의 사람 풍경] 김두한·정주영도 단골이었지 … 면도는 수염 0.1mm 남게 해야 최고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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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국내 여성 이발사 1호 이덕훈 할머니

이덕훈 할머니는 살아 있는 ‘가위손’이다. ’일하고 먹고사는 이발소가 내 집이다. 여든넷이 됐지만 언제나 동심“이라고 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이덕훈 할머니는 살아 있는 ‘가위손’이다. ’일하고 먹고사는 이발소가 내 집이다. 여든넷이 됐지만 언제나 동심“이라고 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평생 거울을 보며 살았다. 손에서 가위와 빗을 놓지 않았다. 10대 초반부터 이발사 아버지를 도왔다. 물을 긷고, 걸레를 빨고, 밥을 날랐다. 여든이 넘은 지금에도 매일 오전 9시에 가게 문을 연다. 손님이 있든, 없든 자리를 지킨다. 그 정도면 물릴 만도 한데 “앞으로 100년은 거뜬히 할 것 같다”고 한다. 진심일까, 허풍일까? 그 속내를 알아채는 건 어렵지 않았다. 자기 일에 대한 무한 사랑이 넘쳐났다. 심지어 스스로를 ‘깡패’라고 불렀다. 철인을 자처했다. 한마디로 ‘지독한 여자’라고 했다.

84세 현역 최고령 이발사 #맨주먹으로 시작한 가위질 60여 년 #지금까지 옮겨 다닌 가게만 28곳 #미니 박물관 같은 ‘새이용원’ #부친이 물려준 바리캉 100년 넘어 #가위·빗·면도칼도 30~50년 사용 #곳곳 최고수에게 배운 기술 #남자 머리칼 층이 안 나게 자르고 #드라이는 1㎝ 정도 세운 뒤 넘겨야 #세계 최고라는 ‘명랑할머니’ #우주 정복할 두뇌 보호하는 모발 #그걸 다루는 이발은 대단한 기술

깡패는 과한 표현 아닌가요.
“누구에게도 약점을 잡히지 않았어. 싸워서 질 일이 없으니까, 깡패 비슷한 거지. 돈을 빌리고 안 주었다면 빚쟁이고, 누구를 속였다면 거짓말쟁인데, 둘 다 아니거든. 가난하지만 떳떳하게 살었어.”

할머니는 당당했다. 체중 45㎏ 자그만 몸피에도 세상에 무서울 게 없다는 태도다. 살짝 자기 자랑도 꺼냈다. “나하고 있으면 중독이 돼. 연재소설만큼 사연이 많거든. 눈물도 숱하게 흘렸지. 나보다 이상한 사람도 드물 거야. 미련스럽고, 바보 같고, 야무지고, 똘똘하고….”

이 할머니가 아버지가 물려준 ‘피대’에 면도칼을 닦고 있다.

이 할머니가 아버지가 물려준 ‘피대’에 면도칼을 닦고 있다.

주인공은 이덕훈(84) 할머니다. 국내 첫 여성 이발사다. 현역 최고령 이발사로도 꼽힌다. 그의 활동 무대인 서울 성북동 새이용원을 찾았다. 출입문에 할머니 사진과 함께 안내문이 붙어 있다. ‘60년 전통 이발관. 명랑할머니 이발사’. 그가 이용사 면허증을 딴 해는 1958년, 올해로 딱 60돌을 맞았다. 상호 새이용원과 달리 이발소에는 ‘헌’ 물건이 가득하다. 13㎡(약 4평) 남짓 공간에 놓인 이발용 의자는 고작 두 개. 미니 박물관에 들어온 듯하다. 가위며, 빗이며, 면도칼이며 물건 대부분이 30~50년은 기본이다. 선친이 물려준 바리캉(이발기)과 피대(皮帶·면도칼을 닦는 가죽띠)는 100년이 넘었다.

이발소 거울 옆에 걸려 있는 ‘바리캉’도 100년이 넘은 것이다.

이발소 거울 옆에 걸려 있는 ‘바리캉’도 100년이 넘은 것이다.

손 닿는 것마다 세월이 묻어납니다.
“맨주먹으로 시작했는데, 벌써 60년이 훌쩍 넘었네. 이 넓은 천지에 아무것도 믿을 게 없었어, 오로지 내 손 하나만 믿고 살았지. 어제처럼 오늘을 살고, 오늘처럼 내일을 살면 되는 거야.”
마치 도인 같은 말씀이네요.
“내가 살아 보니 구구단만 잘 외면 돼. 기본만 잘하면, 양심적으로 살면 아무 문제가 없어. 부모에 감사하고, 나라에 감사하고, 세상에 감사하고…. 충남 홍성에서 태어났는데 일곱 살 때 아버지를 따라 북만주로 건너갔어. 학교에서 조선말을 쓴다고 벌을 받았지. 그때 일찍이 애국심을 배웠어.”
일제강점기 얘기군요.
“아버지가 일본 군속 이발소로 차출됐었지. 해방 후 신설동에 이발소를 차리셨는데 나도 손님들 머리 감기고, 잔심부름을 했어. 6·25가 끝나고 지금 을지로 입구에 있던 보건사회부 구내 이발관에서 일했는데, 공무원 한 분이 이발사 시험이 처음 열리니 ‘미스 리, 한번 응시해봐’라는 거야. 여자 셋 포함 총 69명이 시험을 봤는데 31명 합격에 여자는 나 하나였어.”
초등학교밖에 안 나왔는데요.
“위생학 책자의 절반이 한자였지. 하나하나 옥편을 찾아가며 공부했어. 지금도 모르는 한자가 나오면 옥편을 들춰봐. 시험 문제에 국방·납세의 의무도 있었지. ‘전기절약에 대해 써라’는 논술 문제도 나왔어. 그래도 부모님 덕분에 한글은 뗐으니 감사할 뿐이지. 남동생에게 돈을 줘가며 영어 알파벳도 익혔고. 사람은 죽을 때까지 공부해야 하는 거야.”
그때 일을 어떻게 다 기억하죠.
“다섯 살 때 일도 생각나는데, 뭐. 어릴 적 할아버지가 들려준 ‘장화홍련전’ ‘심청전’ ‘놀부전’을 그대로 옮길 수 있었으니까. 공부가 짧으면 기억력이 좋아. 너무 많이 배우면, 즉 백지에 너무 많은 걸 쓰면 종이가 까맣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야.”(웃음)
새이용원 밖에 덩그라니 놓인 의자에는 그간 얼마나 많은 이들이 쉬었다 갔을까. 65세 이상 어르신들은 이용료 50%를 할인 받아 5000원에 머리를 깎을 수 있다.

새이용원 밖에 덩그라니 놓인 의자에는 그간 얼마나 많은 이들이 쉬었다 갔을까. 65세 이상 어르신들은 이용료 50%를 할인 받아 5000원에 머리를 깎을 수 있다.

성북동에는 얼마나 계셨나요.
“2003년부터 이곳에 있었어. 길 건너편 다른 가게에서 28년 있었으니, 성북동 생활만 40년이 훨씬 넘었네. 지금까지 서울에서 옮겨 다닌 가게만 28군데야. 수첩에 다 적어 놓았지. 그간 월셋집도 13번 이사다녔어. 어때, 들을 만해?”
결혼도 했을 것 아닙니까.
“아버지가 나를 계속 부려먹으려고 시집을 보내려 하지 않았지. 스물여섯에 ‘속도 위반’으로 겨우 결혼했는데, 남편 사업이 폭삭 망하는 바람에 단칸방에서 시부모를 모시고 살았어. 다시 이발소로 나가야 했지. 그렇게 지금까지 온 거야. 아들 넷을 뒀지만 둘이나 먼저 보냈어. 하루하루 봉지쌀을 사가며 키운 자식들인데… 신랑이 집을 돌보지 않아 아이들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지. 그래도 상감마마처럼 모시고 살았어. 내겐 가장 잘생긴 신랑이니까.”
이 할머니 이용사 면허증.

이 할머니 이용사 면허증.

80대 중반, 쉴 때도 됐습니다.
“아니야, 나는 서서 일해야 아프지 않아. 앉아 있으면 병이 나. 지금도 깡총깡총 뛰어다닐 수 있는 건 할 일이 있기 때문이야. 기계도 계속 돌아야 망가지지 않잖아. 나는 움직이는 기계야. 어제는 ‘비극의 여왕’이었지만 오늘은 ‘희극의 여왕’이 되고 싶어. 세상에 나만한 기술을 가진 이도 없다고 자부해. 마음은 언제나 부자야.”
이발이 그리 대단한 기술인가요.
“당연하지. 이보다 더한 재간은 없어. 나는 세계 최고 기술을 가지고 있다고 믿어. 왜냐고? 우주를 정복할 수 있는 두뇌를 보호하는 모발을 다루는 거잖아. 그만큼 뛰어난 기술이 어디 또 있겠어. 세상만물에서 가장 수승(殊勝)한 게 머리 아니야.”
26세에 시집 가던 모습과 19세 젊은 시절 모습.

26세에 시집 가던 모습과 19세 젊은 시절 모습.

말솜씨가 보통이 아닙니다.
“이발은 머리칼 150만 개를 다듬는 일이야. 하루 평균 100개가 빠졌다 났다 하지. 남자 머리는 층이 안 나게 하는 게 가장 중요해. 앞으로 빗어도, 뒤로 빗어도 항상 고르게 해야 해. 길고 짧은 게 없어야 하지. 드라이는 두피에서 머리칼을 1㎝ 정도 세운 다음 넘겨야 하고, 면도는 수염이 피부에서 0.1㎜ 정도 남을 만큼 해야 해. 모두 여기저기 최고수를 찾아 다니며 배운 거야.”
세상도 그렇게 고르다면 좋겠죠.
“다들 욕심이 많아서 어려울 거야. 교통법규 지키면 교통사고 날 일이 없듯 정직하게 살면 세상도 공평해지겠지. 남에게 비겁할 필요도 없고…. 또 누구를 원망해선 안돼. 다 내가 있기 때문에 생긴 일이니까. 여태껏 나를 힘들게 했던 사람들을 스승으로 생각하면 불평할 것도 없어.”
잊지 못할 단골도 많겠어요.
“종로를 주름잡던 김두한이 생각나고, 정주영 현대 회장도 기억나지. 정 회장 젊었을 때 사무실이 남산 외인아파트에 있었어. 나는 그곳 이발소에서 일했고. 그보다 하루하루 손님이 고마울 뿐이야. 물고기는 물을 떠나 살 수 없잖아. 세월 따라 낙엽 따라 사라진 옛 고객들이 은인이지. 황천을 떠돌 나이에 일할 수 있는 건 그분들 덕분이야.”

박정호 문화전문기자·논설위원 jhlogos@joongang.co.kr

[S BOX] 할머니 보물 1호는 15년 간의 비망록

15년 간의 비망록

15년 간의 비망록

“자식 보기 미안해서, 아내 보기 미안해서 그 긴긴 하루 해를 어찌 보내셨는지. 취해도 안 취해도 취한 척 그렇게 살다 가신 님. 오늘에 생각해 보니 얼마나 힘겹게 산 한 평생인가.” 8년 전 현충일에 이덕훈 할머니가 먼저 간 남편을 기리며 쓴 글이다. 손때 묻은 노트에 또박또박 적었다.

지난해 11월 30일자에는 이런 대목도 나온다, “항상 기죽어 살던 세상 지나고 풍요로운 세상이 되어 가난하던 할매가 돈이 남아 옛날 고마웠던 사람 찾아 신세를 갚고 싶어 효선 엄마 호출하여 돈도 주고 옷도 주고 약도 주니 내가 부자가 됐나 보다.”

이 할머니의 보물 1호는 비망록이다. 일기장 비슷하다. 15년 전 교통사고를 당한 남편을 200여 일 돌보면서 한 자 한 자 옮기기 시작한 게 지금은 노트 10권 정도 됐다. “어려서부터 글쓰기를 좋아했어. 생각날 때마다 적었지. 친구가 많은 것도 아니고, 어디 하소연할 데도 없고, 답답한 마음을 털어놓는 게지. 이제 펜이 가장 가까운 친구야.”

할머니의 공책(사진)은 이발소 서랍에 차곡차곡 쌓여 있다. “그래도 이게 어디야. 글을 몰라 책을 읽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잖아. 내 마음 속을 털어놓다 보면 혼자 있어도 심심하지 않아. 그럼 행복한 거지, 안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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