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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서소문 포럼

폭력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라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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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김수정
김수정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김수정 정치국제 담당

김수정 정치국제 담당

하루가 멀다고 대형 뉴스가 터지는 세상에서 한 달 전 일은 구문이다. 담아 놓을 새가 없이 잊힌다. 지난해 12월 14일 발생한 중국 경호원들의 청와대 사진 기자 폭행사건도 그중 하나다. 그 일을 상기시킨 건 지난 10일 문재인 대통령의 신년 기자회견이었다. 문 대통령은 ‘대통령 지지자들이 정부 정책에 대한 비판 기사에 격한 댓글을 쓴다’는 질문에 “저보다 많이 악플이나 문자 비난을 받은 정치인은 없을 것”이라며 “기자들도 담담하게 생각하면 되지 않을까 싶다. 너무 예민할 필요는 없지 않나”라고 말했다.

중국서 폭행 당한 사진 기자 댓글 폭력에 더 큰 상처 #현업 복귀 못하고 암자에서 요양하며 정신과 치료 중

타국의 국빈급 정상을 수행하는 기자를 현지 치안관계자들이 폭행한 일은 국제사회에서 전례를 찾기 힘든 일이었지만, 자국민 일부가 상대국 가해자가 아닌 폭행 피해자를 오히려 맹렬히 비난한 일도 희한한 일이었다. 폭행을 당한 두 기자의 안부를 들어봤다. 코뼈와 안와(눈 주변 뼈)골절 중상을 입은 매일경제 이모(45) 기자는 수술 20일 뒤 퇴원했지만 회사에 복귀하지 못하고 있다. 가족과 떨어져 경남 밀양의 암자에서 요양 중이라고 했다. 극심한 트라우마로 잠을 못 자고 어지럼증이 생겼다. 외부와의 전화를 끊고 지낸다. 정신과 치료를 받을 때만 가족들을 만난다고 한다. 후유증으로 미각·후각의 90%를 잃었다. 요리책 ‘더치 오븐’을 내고, 블로그에 아이들과 함께 만드는 요리법도 올리던 그였다. 회사 동료들의 걱정은 컸다.

또 한 사람. 중국 경호원들에 의해 메다 꽂혀 흉추(미세골절)를 다친 한국일보 고모(52) 기자는 지난 2일부터 청와대 출입기자로 복귀했다. “현장을 뛰어다니는 사진 기자들에게 부상은 흔한 일이지만 대통령 해외 순방 행사에선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전날부터 공안이 거칠게 제지해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는 물리적 폭행보다 더 힘들었던 것은 쏟아진 비난이었다고 했다.

“대한민국이 폭행당했다”며 분노한 여론을 “기레기들이 맞을 짓을 했다” “시원하다” “기자들에게 손해배상을 청구하라” 같은 댓글이 뒤덮었다. 포털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청와대의 청원 게시판을 도배했다. 두 기자의 신상 정보가 털리고 소속 회사로 전화 공습이 이어졌다. 이 기자의 동료는 “당사자는 물론, 부인과 초등학교에 다니는 남매가 받은 충격이 컸다”고 전한다. 고 기자는 “그 집요함에 섬뜩하고 참담했다”고 했다.

한·중 정상회담 홀대 논란 기사에 대해 불만을 가진 문 대통령의 일부 강성 지지층의 집단 공격이었다. 이런 점을 비판한 안희정 충남도지사, 서민 교수 등도 그들의 공격 좌표가 됐다. “머리통을 갈아버리겠다” “네 자식들 조심시켜라” 등 그들이 보내는 e-메일, 문자 폭탄의 내용은 인성 파괴 수준의 폭력이다. 그런데 ‘나도 받는 일이니 담담하라’고 대통령이 얘기했다. 지지자들에겐 그런 행위를 계속하라는 뜻으로 읽힐 법한 말이다.

사진 기자 폭행 사건 직후 청와대는 코트라(KOTRA)가 고용한 경호원이라며 중국 측에 문제 제기를 강하게 하지 않았다. 누가 고용했건 중국 땅에서 한국인에게 벌어진, 그것도 대통령 수행 기자들에게 벌어진 ‘폭력’ 그 자체로 중국 당국에 엄중히 항의했어야 할 사안이다. 중국은 경호원 1명만 구류하면서 집단 폭행이 아닌 개인의 우발적 사건으로 한정했다. 지난 5일 쿵쉬안유 외교부 부부장이 임성남 외교부 1차관과 만나 “국빈 방문 중의 불상사에 대해 유감스럽게 생각한다”며 뒤늦게 간접 사과했지만 집단 폭행에 대한 철저한 수사와 엄중 처벌 등 우리 측 요구엔 고개를 돌리고 있다.

14일 북한 관영매체는 문 대통령을 ‘남조선 당국자’라 폄하하고 “얼빠진 궤변” “(트럼프에) 주제넘게 발라맞추는 비굴한 처사는 눈뜨고 못 볼 지경”이라며 대통령의 신년사를 특유의 저급한 언어로 조롱했다. 하루 뒤 남북 판문점 회담 브리핑에서 통일부 대변인은 이와 관련해 “북측도 나름대로 가진 사정과 입장이 있다고 본다”고 했다. 역시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김수정 정치국제 담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