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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논설위원이 간다

"학폭의 두 얼굴…때린 애는 멀쩡, 맞은 나는 괴물 취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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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영유
양영유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양영유의 현장 돋보기

반가운 손님들이 온다기에 달려갔다. 대전역에서도 자동차로 50분을 가야 하는 한적한 농촌 마을. 온통 눈 세상으로 변한 마을의 좁은 도로를 따라 들어가자 아담한 단층학교가 나타났다. ‘해맑음센터’였다. 학교폭력을 당해 고통스러운 트라우마를 안고 사는 아이들의 심신을 치유하는 전국 유일의 기숙형 ‘학교폭력피해 치유센터’다. 주소는 대전시 유성구 대금로 대동마을. 논·밭·비닐하우스로 둘러싸여 있는 해맑음센터는 1997년 폐교한 초등학교를 2013년 리모델링해 만들었다.

전국 유일의 기숙형 학교폭력 치유 학교인 대전시 유성구 해맑음센터 전경. 사진=김성태 프리랜서

전국 유일의 기숙형 학교폭력 치유 학교인 대전시 유성구 해맑음센터 전경. 사진=김성태 프리랜서

대전 해맑음센터, 학폭에 마음 멍든 피해자들  
트라우마 씻어주는 전국 유일의 기숙형 학교

순백의 눈 위에 발자국이 생겼다. 하얀 운동장은 금세 활기가 넘쳤다. 학생들의 표정은 맑고 밝았다. 서로 이름을 부르며 껴안고 도닥이더니 이내 장난기가 발동해 눈싸움을 한다. 가슴을  짓누르던 응어리가 싹 사라진 듯했다. 전국 17개 교육청이 학교폭력 피해학생 교육을 위탁한 해맑음센터에는 지난 10일 중·고생 15명이 찾아왔다. 센터에 입소해 장기간 치유과정을 수료했거나 현재 치유 중인 학생들이다. 고통을 견뎌낸 경험과 희망을 얘기하며 서로 북돋워 주기 위해 방학 중에 마련한 홈커밍데이 행사였다. 센터 업무를 총괄하는 차용복 부장은 “수도권·충청·호남·영남 등 전국에 사는 학생들이 자원해 찾아왔다”며 “자존감을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말했다

지난 10일 학교를 찾은 학생들이 운동장에서 눈싸움을 하고 있다. 사진=김성태 프리랜서

지난 10일 학교를 찾은 학생들이 운동장에서 눈싸움을 하고 있다. 사진=김성태 프리랜서

 해맑음센터는 아늑하다. 교실 세 개에는 이룸터·해냄터·키움터라는 명패가 걸려 있다. 상담실은 채움터, 북카페는 지혜의 샘터, 식당은 배부름터. 여기저기에 “괜찮아, 포기하지 말고 이대로만 달려가” “많이 힘들었지, 쉬었다 가자” “상처 아무는 그 날까지”라고 적힌 캘리그라피가 걸려 있다.

운동장에서 '명랑' 눈싸움을 하던 학생들이 강당에 모여 앉았다. 친구들에게 폭력이나 왕따, 은따(은근한 따돌림), 금품갈취 등을 당한 사연이 있는 학생들이다. 이동원 교사(상담 팀장)가 “스스로 변하지 않으면 트라우마는 극복되지 않는다.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지 얘기해 보자”고 했다. 순간, 밝았던 학생들의 얼굴이 굳어졌다(학생 신분 보호를 위해 이름은 알파벳으로 표기).
-학생 A: 친구가 갑자기 투명인간 취급했어요. 말을 걸어도 대답도 안 하고, 필통으로 허벅지를 때리고. 화가 나서 멱살을 잡았는데 어이없게도 내가 가해자로 둔갑됐어요. 2년 전 그 날만 되면 온몸이 떨려요. 그래서 해맑음센터 선생님 말씀대로 제가 잘하는 성악에 집중하고 있어요. 친구들도 제 실력을 인정하기 시작했어요. 예술고에 진학해 국악인이 될래요.
-학생 B: 친구들이 사소한 오해를 부풀려 ‘사나이가 배신했다’며 때리고 왕따 시켰어요. 맞을 짓을 했다는 묘한 분위기가 지옥 같았어요. 선생님도 저를 이해해주지 않아요. 땅만 보고 다녔고 허무했어요. 곧 학교로 돌아가야 하는데 겁나요.
-학생 C: 여학생은 고통이 더 심해요. 죽을 생각까지 했었죠. 학교는 피해자 말을 귀담아듣지를 않아요. 그러다보니 가해자는 희희낙락 멀쩡히 다니고, 피해자만 괴물 취급받으며 숨죽이며 살아야 하는 일이 벌어져요. 이게 정상적인 나라인가요. 친구들과 섞이려 노력하지만 버거워요. 그래도 부닥칠래요.
 학생들의 격정 토로는 두 시간 넘게 이어졌다. 눈물을 글썽이기도 했다. 이동원 교사가 “용기 있게 한 걸음씩 나가는 게 중요하다. 자신이 자신을 안 보는데 누가 봐줄까. 세상 밖으로 나가 맞닥뜨리자. 자존감을 찾으면 허무가 열정으로 바뀐다”며 다독였다.
 그러자 학생들의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기자가 개인 면담을 한 학생들은 한결같이 "피해자 말을 더 들어 주고 보듬어 주는 곳이 필요하다"며 "제발 우리를 외계인 취급하지 말아 달라"고 했다. 트라우마를 어루만져 주는 선생님, 속내를 받아줄 친구가 필요하다는 거였다.

가해자 치유기관 6813곳, 피해자는 28곳 불과
사회가 피해자를 이상한 눈으로 보니 괴로워

 학교폭력 트라우마는 마음의 주홍글씨 같다. 영국 옥스퍼드대 연구팀이 13~18세 학생 6000명을 추적 관찰한 결과, 13세 때 일주일에 한 번 이상 왕따를 당하면 5년 후에도 15%가 우울증을 앓았다. 피해자의 트라우마 치유가 중요하다는 결론이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선 그런 노력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다. 학교폭력이 2014년 2만1130건, 2015년 2만1459건, 2016년 2만4761건으로 매년 늘고 있는데도 그렇다. 가해자가 있으면 피해자가 있는 법. 그러나 2011년 극단적 선택을 한 대구 중학생 사건이나, 지난해 부산 여중생 집단폭력 사건이 터졌을 때도 초점은 가해 학생이었다.

자료=국민의당 송기석 의원실

자료=국민의당 송기석 의원실

 그런 사회 분위기 탓에 피해자 치유시스템은 엉성하기 짝이 없다. 교육부에 따르면 피해 학생 전담 지원기관은 전국 28곳에 불과하다. 그나마 기관에 머물며 전문 상담·치유를 받을 수 있는 곳은 해맑음센터가 유일하다. 27곳은 하루 한 시간 방문 상담이 전부인데, 서울조차도 두 곳뿐이다.
 반면 가해 학생 상담·치유기관은 전국에 6813곳이 있다. 단순 수치상으론 6813대 28로 243배 차이가 난다. 학교폭력 정부 지원 예산은 어떨까. 연간 290억원에 불과하다. 그나마 피해 학생 지원용은 해맑음센터를 포함해 15억원뿐이다. 뭔가 잘못돼도 한참 잘못된 현장의 모순이란 생각이 들었다. 2004년 제정된 학교폭력 예방법에는 가해 학생은 교육감이 지정한 특별교육 기관에서 일정 시간 교육을 받도록 의무화했다. 하지만 피해자 지원에 대한 의무규정은 없다. 이에 국민의당 송기석 의원이 피해학생 지원을 위한 전문기관 설치·운영을 의무화한 개정 법률안을 냈지만, 국회에서 낮잠을 자고 있다. 조정실 해맑음센터장은 “아이들의 트라우마를 씻어주려면 마라톤 같은 장기적인 관찰과 치유가 필수인데 우리 사회가 그 수준까지 가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강당에 모여 앉아 학교폭력 트라우마 극복 경험을 나누는 학생들. 사진=김성태 프리랜서

강당에 모여 앉아 학교폭력 트라우마 극복 경험을 나누는 학생들. 사진=김성태 프리랜서

 해가 뉘엿뉘엿 지기 시작했다. 해맑음센터 학생들의 얼굴이 다시 밝아졌다. 강당에서 림보게임을 하다가 삼삼오오 모여 왁자지껄했다. 그런데 이상한 게 있었다.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는 학생이 한 명도 없었다. 이정희 교사는 “휴대폰은 모두 학교에 맡기고 집에 갈 때 찾아가는 게 철저한 원칙”이라며 "홈커밍데이도 예외가 없다"고 말했다. 센터의 정원은 남녀 중·고생 15명씩 30명, 교직원은 11명이다. 기본 적응 기간은 2주, 길게는 한 학기 또는 1년도 가능하다. 전원 기숙사 생활을 하는데 학비·기숙사비가 다 무료다. 센터 생활은 원래 다니던 학교의 출석으로 인정돼 복교에 문제가 없다. 지금까지 300여 명이 그런 과정을 밟았다.

당당히 세상과 마주치게 응어리 풀 시간 필요  
자존감 심어주고 아픔 치유해주는 시설 늘려야   

 프로그램은 소통·체험·치유 중심으로 운영된다. 교과수업도 하지만 음악·미술·체육·체험학습 비중이 높다. 학생들은 지난해 8월 네팔에서 히말라야 등반과 봉사활동을 했고, 국내에선 해남·충주·내장산을 답사했다. 자신감과 자존감을 찾아가는 체험이다. 진희(가명·19)는 “세상을 밝게 보고 책을 읽었는데 전국 독후감 대회에서 은상까지 받았다”며 “대학에 진학해 간호사가 되는 꿈이 생겼다”고 했다.

 학교폭력 피해 학생들의 소망은 뭘까. 마음껏 응어리를 터뜨릴 공간과 시간을 달라는 것이었다. “잊으려 발버둥 쳐도 트라우마가 다시 공격해요. 터놓고 얘기할 상대가 없거든요. 그러다 보면 '내가 진짜 괴물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어요. 저희들의 손을 잡아주세요.” 한 여고생이 순백의 눈 위로 떨구는 눈물이 가슴을 아리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