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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비트코인 두 번째 단추를 잘못 끼웠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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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이철호
이철호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이철호 논설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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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일은 정치가 다시 한번 경제를 압도한 날이었다. 이날 문재인 대통령은 최종구 금융위원장을 데리고 거제도 대우조선해양을 찾았다. 문 대통령은 “금융이 빠지면 일이 안 됩니다”라고 말했다. 주변에서 웃음이 터졌고 최 위원장 얼굴은 빨개졌다. 대우조선에 돈을 대주라는 공개적인 압박이었다. 대통령의 ‘확실히 살린다’는 선물을 받은 대우조선 주가는 이날 12.5% 폭등했다.

암호화폐 파문에 당황하는 청와대 #‘불로소득=투기·범죄’ 이념적 접근 #댓글 싸움에 처음 패배한 뒤 반성 #시장보다 정치만 믿다가 역풍 맞아

청와대 586 참모들은 대개 시장과 자유경쟁을 불신한다. 보이지 않는 손보다 문 대통령의 개인기를 믿는다. 70%대 국정지지율에다 친문댓글부대(문꿀오소리)가 뒤를 받쳐주기 때문이다. 정치만 버텨주면 웬만한 경제 실패는 다 덮을 수 있다고 여긴다. 그런데 이런 자신감이 갑자기 흔들리고 있다. 비트코인 때문이다. 그제 암호화폐 대책을 논의한 청와대 회의에서 문 대통령은 “오늘은 먼저 말씀드릴 게 없다”며 모두발언을 생략했다. 청와대 대변인도 회의 내용을 브리핑하지 않았다. 그만큼 비트코인 역풍에 신경이 곤두서 있다.

청와대는 “우리가 암호화폐에 지나치게 나이브했다”고 반성하는 분위기다. 특히 “둘째 단추를 잘못 끼웠다”고 땅을 치며 후회한다. 정부는 재작년 금융위 주도로 ‘가상통화 태스크포스(TF)’를 출범시켰다. 하지만 정국이 요동치면서 아무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지난해 9월 중국의 암호화폐 금지와 함께 그 풍선 효과로 서울 시장이 요동치면서 다시 긴장감이 감돌았다.

청와대는 대학생과 중고생의 ‘코인폐인’까지 생겨나자 두 번째 단추를 끼웠다. 586 참모들은 지난해 12월 4일 박상기 법무부 장관을 ‘가상통화 TF’ 책임자로 앉힐 때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노동가치설을 신봉해 온 만큼 땀 흘리지 않는 ‘암호화폐=불로소득’으로 간주한 것이다. 그들의 이념으론 투기였고, 불법이며 범죄였다. 당연히 법무부에 규제하고 처벌하라며 칼을 쥐여주었다. 검찰은 곧바로 ‘빗썸’과 ‘이더리움’의 해킹 및 다단계 사건을 파헤쳤고, 국세청은 무더기 세무조사에 나섰다.

이철호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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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1일 박 법무장관이 “(암호화폐)거래소 폐쇄까지도 목표로 하고 있다”고 밝힌 건 무리가 아니었다. 최 금융위원장도 “(폐쇄는) 부처에서 조율된 얘기”라고 맞장구쳤다. 하지만 그 다음 예상치 못한 역풍이 불어닥치면서 일이 꼬였다. 암호화폐 시장의 역습이 시작된 것이다. 비트코인 가격이 순식간에 25% 곤두박질하자 돈을 잃은 2030들이 청와대 게시판에 몰려가 “대한민국에서 처음 가져본 행복과 꿈을 뺏지 말아 달라”며 난리를 부렸다.

청와대가 가장 심각하게 여긴 건 네이버 등 사이버 공간에서의 여론 역전이었다. 초기에는 여느 때처럼 문꿀오소리가 동원돼 온라인을 장악했다. “암호화폐는 도박이고 투기”라며 “코인충(비트코인 투자자를 비하하는 말)들아, 정신 차려!”라고 비난했다. 댓글에는 7000~1만 개의 좋아요가 달렸다. 하지만 이른바 ‘코인좀비(폐인)’들이 떼로 몰려와 “문재인도 탄핵으로 가즈아(가자)~” “지방선거, 여소야대로 가즈아~” 같은 댓글을 도배하면서 순식간에 상황이 역전됐다. 이 댓글들엔 ‘좋아요’가 2만여 개나 달렸다. 사이버 여론의 지배자 문꿀오소리가 처음 완벽하게 패배한 것이다. ‘댓글로 흥한 자 댓글로 망한다’는 불길한 댓글까지 어른거렸다.

청와대는 7시간 만에 “박 장관의 발언은 확정된 사안이 아니다”며 꼬리를 내렸다. 하지만 급변침도 이런 급변침이 없다. 금감원은 이날 오전까지 은행들에 “가상계좌 개설 및 입금 금지”를 압박하다가 저녁 무렵엔 “계좌를 터주고 실명제로 전환하라”고 지시를 변경했다. ‘암호화폐=불법’에서 ‘실명제 전환=합법화’로 정부 입장이 완전히 뒤바뀐 것이다.

이번 사태의 후유증은 넓고 깊다. 이른바 ‘코인 유저’들은 “이명박이 4대 강으로 22조원 날렸다면 문재인은 7시간 만에 100조원을 날렸다” “박근혜가 삼성 돈을 빼앗아 최순실에게 넘겼다면 문재인은 내 주머니 용돈까지 털어갔다”며 분노를 가라앉히지 못한다. 이들이 올리는 울분의 댓글은 최저임금 인상, 평창올림픽 남북 협상에까지 번져가고 있다.

청와대는 난감할 수밖에 없다. 심정적인 정치적 지지에 비해 자기 돈을 빼앗겼다는 원한은 감정의 차원이 다르기 때문이다. 요즘 청와대에 가장 자주 호출되는 관료는 기획재정부 세제실장과 예산실장이라고 한다. 청와대가 최저임금 인상, 탈원전 등을 일단 저질러놓은 뒤 문제가 생기면 세금을 깎아주고 예산을 퍼붓기 때문이다. 하지만 암호화폐 피해자들을 세금이나 예산으로 달랠 수 없다. 그렇다고 수백만 명의 피해자를 청와대로 초청해 오찬을 하면서 위로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만큼 비트코인 파문은 수습하기 어려운 악성이다. 정치로 경제를 요리해왔던 청와대의 긴장감도 높아지고 있다.

이철호 논설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