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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종의 평양 오디세이] 김정은의 ‘노래폭탄’ … 올림픽 잔칫상 뒤흔든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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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예술단 파견을 앞세운 북한의 대남 공세가 거칠어질 기세다. 평창 겨울올림픽에 대표단을 보내겠다던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은 선수 구성보다 관현악단 파견에 더 관심을 쏟는 모양새다. 남북한이 그제 당국 접촉에서 맨 먼저 합의한 게 140명의 북측 가수·연주자 등이 서울·강릉에서 공연을 갖는 방안이다. 올림픽이 국제스포츠 행사란 점을 고려하면 말 그대로 본말전도다. 김정은이 이처럼 각별히 공을 들이는 이유는 뭘까. 북한의 속사정과 김정은 ‘음악정치’의 내막을 들여다본다.

“혁명적 노래는 적의 심장 꿰뚫어” #올림픽에 선수보다 예술단 더 챙겨 #‘자극 말자’ 김정은 신년사 뒤엎고 #북, “잔칫상이 제삿상 될 것” 막말 #공연 레퍼터리 둘러싼 갈등 우려 #분란 초래할 ‘트로이 목마’ 막아야

북한 김정일은 생전에 전자음악단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1985년 보천보전자악단을 만들었고, 당시 금기시되던 일본과 서방 악기까지 듬뿍 선물했다. 6년 뒤에는 아예 일본 순회공연까지 보냈다. 사실상의 부인인 고용희(김정은의 생모)가 배우로 있던 만수대예술단 악단을 탈바꿈시킨 것이다. 이 악단의 가수 전혜영은 남한에서도 한때 유행한 가요 ‘휘파람’ 을 히트치며 폭발적 인기를 끌었다. 우상화와 체제 찬양, 세뇌에 음악이 결정적 역할을 한다는 걸 간파한 김정일이 전폭적 지원을 한 때문이다. 김정일은 “음악이 때로는 수 천, 수 만의 총포를 대신했고 수 백, 수 천만 톤의 식량을 대신했다”고 말하곤 했다.

북한의 역대 악단들

북한의 역대 악단들

이런 인식의 뿌리는 북한이 선전하는 이른바 ‘김일성 항일 빨치산’ 활동에서 찾을 수 있다. 일본군의 토벌을 피해 깊은 산 속 밀영(密營, 비밀캠프)에 머물던 이들은 작식대원(식사와 바느질을 도운 부녀자)과 아동들이 꾸민 노래와 연극으로 시름을 달랬다는 게 북한 측 주장이다. 혁명가극 ‘피바다’ 와 가요 ‘적기가’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김일성은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서 “혁명적인 노래는 총칼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서도 적의 심장을 꿰뚫을 수 있다는 것은 항일혁명 시기의 문학예술 활동을 통하여 우리가 도달한 진리”라고 밝히고 있다.

3대 세습을 통해 권력을 넘겨받은 김정은도 김일성·김정일의 노선과 궤를 같이한다. 집권 첫해인 2012년 7월 그의 지시로 모란봉악단이 만들어졌다. 베일에 싸여있던 자신의 부인 이설주를 창단공연 관람석에 동반해 처음 외부에 알렸다. 은하수관현악단 가수로 평범한 공군 조종사 집안의 딸인 이설주가 ‘평양 신데렐라’로 등극한 자리였다. 이후 모란봉악단은 승승장구했다. 관영 매체에는 “원수님(김정은을 지칭)의 음악정치를 앞장서 받들어 나가는 제일 근위병”이란 찬사와 함께 “모란봉악단은 ‘노래폭탄’을 싣고 달린다”는 표현까지 등장했다. 김정은의 통치코드가 가장 잘 반영된 친솔(親率, 김정은이 직접 챙긴다는 의미)악단으로 우뚝 선 것이다.

삼지연악단이 지난해 3월 동평양대극장에서 세계 여성의날(국제부녀절) 107주년 기념 공연을 하고 있다. [사진 노동신문]

삼지연악단이 지난해 3월 동평양대극장에서 세계 여성의날(국제부녀절) 107주년 기념 공연을 하고 있다. [사진 노동신문]

창단 초기 모란봉악단은 김정은식 개혁·개방의 애드벌룬으로 해석됐다. 미니스커트 차림에 하이힐을 신은 서구적 스타일의 가수들은 파격이었다. 무대에는 백설공주와 곰돌이푸 같은 미국 자본주의 상징 캐릭터가 등장했다. 하지만 그 뿐이었다. 몇달 뒤 군복차림으로 복귀한 악단 가수들의 어깨엔 소위 계급장이 달렸다. 노래를 마치면 거수경례를 잊지 않았다. 단장인 현송월은 대좌(대령) 군사칭호가 부여됐다. 병영국가 체제 문선대(文煽隊)로서의 정체가 고스란히 드러난 것이다.

이런 멤버를 주축으로 한 북한 예술단이 곧 우리 땅을 밟는다. 판문점에서 연일 실무회담이 열리고 북측 손님맞이에 부산하다. 지난해 핵과 미사일 도발, 대남위협을 일삼던 김정은이 마치 평화의 전도사로 행세하는 데 대해 마뜩지 않아하는 시각도 있다. 하지만 올림픽 정신과 남북관계 진전이란 대승적 견지에서 단일팀 구성이나 공동입장 등에 머릴 맞대고 있다.

그런데 북측에서 들려오는 불협화음이 심상치 않다. 이런저런 터무니 없는 트집을 잡아 분위기를 깨트리려 들더니 결국 위험선을 넘어버렸다. 올림픽 잔칫상에 뒤늦게 뛰어들어 아예 상을 엎을 기세다. 지난 14일엔 문재인 대통령에게 ‘얼빠진 궤변’, ‘가련한 처지’ 같은 표현을 써가며 비방을 퍼부었다. A4 용지 3쪽짜리 비난 보도에 비하와 조롱, 인신공격이 모두 25차례나 등장한다. 한·미 동맹을 강조한 문 대통령의 언급엔 “(트럼프에) 주제넘게 발라 맞추는 비굴한 처사는 눈뜨고 못 볼 지경”이라고 비난했다. 김정은이 신년사를 통해 “상대방을 자극하면서 동족간 불화와 반목을 격화시키는 행위는 종식하자”고 제안한 지 보름도 지나지 않아 벌어진 일이다. 북한은 문 대통령을 ‘남조선 당국자’로 지칭했다. 통상 ‘최고위 당국자’나 ‘수뇌부’로 표현되는 관례를 깬 의도적 비하다.

그런데도 청와대와 정부 당국자들은 못 들은 척 행동했다. 북한의 비난 이튿날 열린 판문점 남북 실무협의에서 우리 대표단은 이를 거론조차 못 했다. 주무부처인 통일부 대변인은 공식 브리핑에서 “북측도 나름대로 갖고 있는 사정과 입장이 있다고 본다. 그런 것들을 표현한 것으로 본다”고 답했다. 지난 3일 북측 조국평화통일위원장 이선권이 대남 입장을 내놓자 “우리 국가 원수를 2차례나 ‘문재인 대통령’이라고 공식 호칭했다”며 반색할 때와는 달라진 분위기다. 남북대화에 관여했던 원로인사는 “북한이 ‘김정은 동지께서’라며 깍듯한 표현을 한 것과 달리 문 대통령에게는 존칭 없이 ‘문재인 대통령’으로 지칭한 점을 유의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정은의 신년사를 청와대와 문 대통령이 “지지 환영”한 대목을 부각시키고, 김정은이 이를 “긍정적으로 높이 평가하셨다”고 주장함으로써 문 대통령을 깎아내린 것이란 얘기다.

모란봉악단이 2014년 3월 4.25문화회관에서 제9차 전국예술인대회 참가자들을 위한 축하공연을 하고 있다. [사진 노동신문]

모란봉악단이 2014년 3월 4.25문화회관에서 제9차 전국예술인대회 참가자들을 위한 축하공연을 하고 있다. [사진 노동신문]

북한의 안하무인식 행태는 절정을 치닫고 있다. 15일엔 북한 기자동맹 간부를 동원해 “남조선 당국이 여론관리를 바로 못 하고 입 건사를 잘못하다가는 잔칫상이 제사상으로 될 수 있다”고 겁박했다. “평화올림픽이 대결올림픽으로 변질 될 수도 있다”는 주장까지 담았다. 북한은 관영 조선중앙통신의 보도를 ‘공화국의 공식입장’으로 간주한다. 김정은 지시나 재가 없이는 이뤄지기 힘든 비난이란 얘기다.

북한에 얕잡힌 정부가 까탈스런 손님을 제대로 맞을 수 있을까 하는 걱정도 앞선다. 회담 테이블 곳곳에 지뢰 투성이다. 15일 북측 통일각 실무접촉 때는 미리 통보했던 회담 대표를 바꾸더니, 회담장에는 아예 사전 협의도 거치지 않은 인물을 더 데려와 남측 4명, 북측 5명이 회담을 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북한의 공연 레퍼토리를 놓고도 우려가 제기된다. 북측은 “통일 분위기에 맞고 남북이 잘 아는 민요와 세계명곡으로 구성하겠다”고 알려왔다는 게 우리 측 설명이다. 하지만 찜찜한 대목이 적지 않다. 모란봉악단 공연을 살펴보면 김정은 찬양과 체제 우상화·선전이 압도적이다. 공연이 절정에 이를 때 뒤편 대형 스크린에 핵 실험과 미사일 발사를 지켜보는 김정은의 얼굴이 클로즈업된다. 이때 모든 관객이 일어나 박수를 친다. 북한이 공연장에서 이런 상황을 돌발 연출하거나 찬양·선전 공연을 고집할 경우 우리 측이 곤혹스러운 입장에 빠질 수 있다. 대북정보 관계자는 “북한이 실무 대표에 무대설치 전문가를 보강하고, 사전 점검단의 조속한 파견을 요구한 대목에 조심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북한의 대남 유화공세에 대응하는 우리 사회의 역량도 미덥지 못하다. 언론은 북한의 숨은 의도나 남북관계에서의 함의보다는 지엽적인 사안에 매달린다. 예술단 실무협의 북측 대표인 현송월 모란봉악단 단장을 둘러싼 보도가 대표적이다. 회담장에 들고 온 그녀의 핸드백이 2500만원 짜리 H브랜드 명품이란 추측성 기사는 해당 업체가 “우리 제품이 아니다”고 밝히며 해프닝으로 끝났다. 현송월이 김정은 위원장의 숨겨진 애인이고 출산까지 했다는 얘기도 말초신경을 자극한다.

하지만 그녀가 2012년 3월 북한TV에 등장한 영상만 살펴봐도 ‘애인설’은 난센스임을 확인할 수 있다. 당시 객석에 앉아있던 현송월은 사회자 권유로 무대에 오른다. 만삭에 한복 차림인 그녀는 “아들을 원하는 데 산원에 가보니 딸이더라”고 말해 좌중에서 웃음이 터졌다. 최고지도자의 여인은 철저하게 은둔을 강요받는 북한 체제의 특성을 감안하면 루머라는 걸 단박에 알 수 있다. 한때 이런저런 소문이 나돌았다 해도 그녀가 회담 대표로 나오고 평창행 인솔 멤버로 거론된다면 다시 한번 검증해보는 신중함이 필요하다. 종편 등 TV방송에서는 단골 출연 변호사가 북한 모란봉악단에 대해 장광설을 늘어놓고, 범죄 전문가가 현송월의 패션스타일을 분석하는 등 마치 ‘아무말 막하기 대회’가 열린 듯한 분위기다.

북한의 평창 겨울올림픽 대표단 파견 제의로 북새통을 이룬지 이제 보름 남짓 지났다. 개막까지는 앞으로 23일, 패럴림픽(북한은 ‘장애자올림픽’으로 표현)을 포함한 경기 기간도 38일에 달한다. 북한의 올림픽 참가 결정은 환영할 일이다. 꽉 막혔던 남북관계 물꼬를 트고 한반도 평화의 단초를 마련할 수 있다면 금상첨화다. 하지만 긴장을 늦춰선 안 된다. 김정은의 ‘노래폭탄’이 가져올 파급력 때문이다. ‘서울 핵 불바다’를 위협하고 “남조선 것들 쓸어버리라”고 극언을 서슴지 않던 ‘말폭탄’보다 면밀한 대처가 필요하다. 굳이 서울까지 북한 예술단을 불러들여 우상화와 찬양·선전 막장극을 볼 이유는 없다. 북한에선 수령 한 사람만을 ‘최고존엄’으로 떠받들지만, 우리는 5000만 국민이 모두 절대적 존재라는 당당함과 결연한 의지가 정부 당국과 국민 모두에게 필요하다. 김정은이 파견할 예술단이 우리를 곤경에 빠트리고 사회를 이간하는 트로이의 목마가 되는 건 막아야 한다.

이영종 통일북한전문기자 겸 통일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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