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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절로 좋아지는 관계는 없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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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윤설영 기자 중앙일보 도쿄 특파원
윤설영 도쿄 특파원

윤설영 도쿄 특파원

1월 4일.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신년 기자회견. 한국과 관련해선 어떤 발언이 나올지 귀를 쫑긋 세웠다. 하지만 기대했던 언급은 없었다. “한·중·일 정상회담 조기 개최를 위해 중국, 한국과 협의하겠다”며 딱 한 번 한국을 말했을 뿐이다. 한·일 위안부 합의에 대해선 한국 정부의 정식 발표를 앞두고 있는 터라 섣부른 언급은 삼갔을 것으로 이해가 됐다. 그래도 한·일 관계에 대해 아무 언급이 없었던 점은 아무래도 아쉬웠다. 특히 올해는 ‘김대중·오부치 파트너십 공동선언’ 20주년이 되는 의미 있는 해인데 말이다.

1월 5일 열린 모 언론사 신년하례회. 아베 총리가 참석했다. 그는 연설 도중 ‘일·중 평화우호조약 체결 40주년’을 언급했다. “양국 국민이 일·중 관계가 크게 개선됐다고 인식할 수 있는 한 해로 만들겠다”고 했다. 고노 다로 외상이 이달 중 중국을 방문한다. 핵심 의제는 일·중 정상회담 일정의 조율이다. 중국 잠수함이 센카쿠 지역(중국명 댜오위다오)에 진입하는 등 소란이 있지만 큰 흐름은 중·일 관계 개선임이 틀림없다.

연초부터 겪은 두 사례에서 현재 일본 정부가 한국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 감을 잡을 수 있다. 한국과의 관계는 여전히 꺼리고 중국에는 적극적으로 손을 내밀고 있는 형국이다. 그런데 한국 정부의 대일 인식도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실제 청와대 일각에선 “일본과의 관계가 언제는 좋았나. 한·일 관계는 그냥 내버려 둬도 된다”는 인식을 갖고 있다는 얘기가 들린다.

김대중 대통령은 취임 첫해 국빈으로 일본을 방문해 오부치 게이조 총리와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을 발표했다. 남북 문제를 풀기 위해선 일본과의 우호관계가 우선돼야 한다는 혜안이 있었다. 바꿔 말하면 한·일 관계가 나쁘면 남북 문제도 풀기 어렵다는 판단이었다.

이는 2018년에도 유효하다. 일본은 한국이 주도하는 남북대화 국면을 지켜보고 있다. 어느 시점이 되면 한국은 철저하게 일본을 설득해야 하는 때가 온다. “최대 압박으로 북한의 정책을 바꿔야 할 때”라는 입장을 고수하는 일본이다. 일본의 동의 없인 미국의 동의도 얻기 어렵다. 일본이 만에 하나 북·일 관계 카드를 들고 나올 경우도 배제할 수 없다.

문재인 정부는 한·일 관계를 ‘투 트랙’으로 분리해 관리하겠다고 했다. 일본 정부는 문재인 정부의 위안부 합의 관련 새 방침을 사실상 합의 파기라고 받아들인다. 과거사 이외의 문제를 어떻게 사이좋게 풀어나갈지가 남겨진 과제다. “중국을 생각하는 4분의 1, 5분의 1이라도 일본에 신경 쓰면 좋겠다”(전직 외교관)는 말이 과장되게 들리지 않는다. 그냥 내버려둬도 저절로 좋아지는 상대는 없다. 투자하고 관리하는 만큼 결과가 돌아올 뿐이다.

윤설영 도쿄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