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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 보이스피싱 60명 검거 … 중앙지검선 지금 양안 전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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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지난해 말 검거된 대만인 보이스피싱 범죄단이 제주도의 ‘콜 센터’에서 사용한 휴대전화 158개. [뉴시스]

지난해 말 검거된 대만인 보이스피싱 범죄단이 제주도의 ‘콜 센터’에서 사용한 휴대전화 158개. [뉴시스]

9일 오전 서울중앙지검 형사3부(부장 이진동) 소속 8개 검사실 안팎은 포승줄에 묶인 황토색 수의 차림의 대만인과 중국인들로 북적였다. “여기 녹취 파일이 있는데 본인 목소리 아니라고요?” 수사관들은 중국어 민간 통역사의 도움을 받아 이들을 취조했다. 이름과 나이, 출생지 등 기본적인 인적사항을 묻고 한국에 입국하게 된 경위, 입국 후 무슨 일을 했는지 등을 캐물었다. 검찰 수사팀 관계자는 “대부분 혐의를 부인하는 데다 통역을 거쳐야 해서 조사 시간이 두 배 넘게 걸리고 있다”고 말했다. 이들은 경찰이 지난해 12월 20일 제주도 서귀포시에서 일망타진한 대만인 A씨(36·총책) 주도의 대규모 보이스피싱 범죄단 조직원들이다. 대만인 51명, 중국인 7명, 한국인 2명이며 같은 달 29일 검찰로 넘겨졌다.

중국인 상대 범죄조직 제주서 검거

서울로 이송해 수사, 통역만 16명

지난해 말 검거된 대만인 보이스피싱 범죄단이 제주도의 ‘콜 센터’에서 사용한 피해자 협박용 원고. [뉴시스]

지난해 말 검거된 대만인 보이스피싱 범죄단이 제주도의 ‘콜 센터’에서 사용한 피해자 협박용 원고. [뉴시스]

이들의 송환 문제를 둘러싸고 서울중앙지검에서 때아닌 중국과 대만의 ‘물밑 외교 분쟁’이 벌어지고 있다. 주한 중국 대사관과 대만 대표부는 대검찰청과 서울지검 측에 ‘범죄인 인도’를 비공식적으로 요청하고 있다. 대만 대표부 참사관은 수사팀을 방문하거나 전화·문자를 통해 수사 상황을 문의 중이다. 한국 검찰이 중국 측으로 자국민들을 송환할 것을 우려해서다. 대만 대표부의 한 참사관은 9일 “대만인 피의자들이 중국에 송환되지 않도록 막는 것이 최우선 과제”라며 “우리 측이 인도받으면 좋겠지만 그게 안 된다면 한국에서 사법 처리했으면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중국 측은 한·중 수사협의체를 통해 ‘대만인들까지 모두 중국 사법체계에서 처리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청하고 있다고 한다. 검찰 수사팀 관계자는 “중국인 피의자가 섞여 있는 데다 이번 보이스피싱 피해자 대다수가 중국인들이라서 그런 요구를 하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양안(兩岸·중국과 대만)이 국제무대에서 보이스피싱 범죄로 얽힌 건 처음이 아니다. 대만인들이 주도하는 보이스피싱 범죄단은 세계 곳곳에 퍼져 있다. 홍콩 빈과일보 등에 따르면 대만인 보이스피싱 범죄 연루자는 약 10만여 명으로 추산된다. 5~6년 전부터 케냐·우간다·말레이시아·캄보디아 등지에 대규모 콜센터를 만들고 중국 본토 중국인들을 범죄 대상으로 삼아 왔다. 지난해엔 일본과 한국으로도 진출했다. 수법과 운영 방식은 통상적인 보이스피싱 범죄와 유사하다. 대만인 총책을 중심으로 피해자를 속일 ‘시나리오’를 만들고 본토 중국어를 구사할 줄 아는 중국인들이 전화를 건다. 중국 공안요원이나 검사, 통신국 직원 등을 사칭한다.

대만 “중국에 넘기지 말아 달라”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중국인 보이스피싱 피해는 최근 수년 새 큰 폭으로 늘었다. 중국 당국은 지난해 60여만 건의 보이스피싱 피해 사례가 접수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2011년(10만여 건)보다 여섯 배가 증가했다. 피해액은 약 220억 위안(3조6060억원)을 웃도는 것으로 추산된다. 이 때문에 중국 정부는 해외에서 검거된 대만인 보이스피싱 조직원의 신병을 확보하는 데 주력해 왔다. 케냐 수도 나이로비에서 붙잡힌 대만인 용의자 45명을 2016년 4월 송환받은 게 첫 성과였다. 지난해 12월까지 중국 측이 확보한 대만인 용의자는 288명에 달했다. 국교 수립이 잘돼 있지 않은 대만은 힘을 쓰지 못했다. 중국 측에 “대만인 수감자들을 인도해 달라”는 요청을 했지만 거절당했다.

검찰은 양안의 외교 분쟁에 휘말리지 않을 묘수를 고민 중이다. 대만과는 민주·시장주의 체제를 공유하고 있는 공통점이 있다. 하지만 외교는 단절된 상태다. 중국이 1992년 ‘92공식(九二共識·‘하나의 중국’을 인정하되 중국과 대만이 각자의 명칭을 사용하기로 한 합의)’을 내세우며 한국에 수교 조건으로 대만과의 국교 단절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검찰 입장에선 사드 문제로 중단됐다 지난해 9월 다시 복원된 한·중 수사협의체도 고려해야 할 부분이다. 대검 관계자는 “간신히 회복한 관계가 서툰 판단 하나로 손상을 입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검찰 내부적으론 “우리 관할권에서 벌어진 범죄이니 우리가 처리하는 게 가장 합리적이다”는 방침이 섰다고 한다.

중 "피해 많은 중국서 처리해야”

이번 사건은 국내에서 적발된 외국계 보이스피싱 조직으로는 최대 규모였다. 주한 대만 대표부가 지난해 9월 초 “보이스피싱 조직 총책이 서울에 거주 중”이라는 첩보를 제공하면서 수사가 시작됐다. 3개월간 잠복 수사와 총책의 출입국 기록, 통신·계좌 추적 등을 벌인 끝에 제주도 서귀포시의 4층짜리 빌라 두 동이 ‘콜센터’로 지목됐다. 검거 과정에서 인명피해가 없도록 치밀한 작전이 수립됐다. 경찰은 소방당국, 출입국관리소 등과 수일간 검거 작전을 세워 지난해 12월 20일 현장을 덮쳤다. 이날 압수한 휴대전화는 158대에 달했다. 이들을 서울로 이송하는 데도 애를 먹었다. 검거 당일 오후 비행기 편 2대를 예약해 한 편에 20~30여 명을 보내려고 했다. 조직원 1명을 경찰 2명이 담당케 했다. 하지만 대규모 좌석 조정에 놀란 일반 승객들이 “무서워서 싫다”고 했다. 결국 이들을 2~3명씩 한 조로 묶어 21일부터 22일 사이 28편의 비행기에 태웠다. 비행기값으로만 1200여만원이 들었다.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23일에 열린 구속 전 피의자심문(영장실질심사)도 영장전담판사 두 명이 온종일 매달렸다. 그 결과 한국인 여성 1명을 빼고 구속영장이 청구된 59명 중 58명이 구속됐다. 검거 당일 조직에 합류한 1명만 영장이 기각돼 대만으로 추방됐다.

윤호진 기자 yoongo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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