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2018 이름]'전지현 김태희'가 되는 사람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김지영ㆍ변분돌ㆍ김하녀ㆍ임신ㆍ송아지ㆍ박하늘별님구름햇님보다사랑스런우리ㆍ김태희ㆍ전지현ㆍ도민준…’

세상에는 다양한 사람만큼 다양한 이름이 있습니다. 이름은 ‘나’입니다. ‘이름을 불러줬을 때 꽃이 됐다’는 김춘수의 시구처럼, ‘춥고 모진 날사이로 잊혀진 네 이름을 안다’는 아이유의 노랫말처럼, 이름은 단순한 호칭이 아니라 ‘존재 자체’를 가리킵니다.

‘올 한해 어떻게 살 것인가’ 고민하게 되는 새해 벽두, 그래서 이름 얘기를 해보려 합니다. 이름에 얽힌 네 편의 이야기를 통해 오늘 우리 사회, 우리의 삶을 들여다보겠습니다. 이번 회는 캄보디아에서 한국으로 시집온 ‘캄보디아 댁’ 연유진씨의 이야기입니다.


"안녕하세요, 연유진입니다!" 캄보디아에서 나고 자랐지만 한국인이 되었습니다.

"안녕하세요, 연유진입니다!" 캄보디아에서 나고 자랐지만 한국인이 되었습니다.

 엄마 미워!

“엄마 왔다!” 5일간의 해외 출장에서 돌아와 여행 가방을 내려놓는데, 아들놈이 발을 쿵쿵대며 제방으로 뛰어들어간다. 출장 다녀온 엄마가 밉다는 거다. 이제 초등학교 2학년이 되는 아들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출장 기간 내내 보고 싶어 했던 엄마 속도 모르고….

내 이름은 연유진. 올해 29살이다. 태어난 곳은 캄보디아. 남편과 결혼하며 2008년 한국에 발을 디뎠다. 지금도 생생하게 떠오른다, 처음 한국 땅을 밟던 그 날이.

처음부터 한국 행을 생각했던 건 아니었다. 굳이 핑계를 대자면, 드라마와 눈이 계기였다. 학창시절, TV에서 유독 한국 드라마를 많이 틀어줬다. 배우 권상우ㆍ최지우 주연의 ‘천국의 계단’(2003년), 송혜교와 가수 비가 출연한 ‘풀 하우스’(2004년)에 푹 빠졌다. 한국이란 나라는, 한국 사람들은 저렇게 다정다감하구나. 미지의 땅인 한국에 대한 동경이 생겼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한국에 꼭 가보고 싶었다. ‘눈 ’ 내리는 걸 내 눈으로 꼭 한 번 보는 게 소원이었다. 친구 소개로 남편을 만났고 결혼을 마음먹었다. 부모님은 ‘가족의 연을 끊겠다’며 결사반대했지만 내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다. 2008년 1월 24일. 한국에 도착해 인천공항을 빠져나가는 길에 거짓말처럼 눈이 펑펑 내렸다. 창문을 내리고 손을 뻗어보았다. 운전대를 잡은 남편이 웃었다. 춥지 않냐고 했다. 하얀 솜털 같은 덩어리가 손에 닿았다. 차가운 감촉, 이게 꿈에 그리던 한국이구나 싶었다.

아이들이 제법 제 앞가림을 하기 시작하면서 연유진씨는 어린이집을 돌며 다문화 강사로 일을 하고 있다. 사진 뒷쪽에 보이는 소품들은 이날 수업에 쓰려고 준비한 것들이다.

아이들이 제법 제 앞가림을 하기 시작하면서 연유진씨는 어린이집을 돌며 다문화 강사로 일을 하고 있다. 사진 뒷쪽에 보이는 소품들은 이날 수업에 쓰려고 준비한 것들이다.

 연페이니에서 연유진이 되다

신혼살림을 차렸고, 그해 5월 첫 아이를 가졌다. 딸이었다. 다문화가정 지원센터를 다니며 한국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남편은 자상했다. 하지만 문화가 달라 서러운 일도 있었다. 입덧으로 한창 고생할 때 고향 음식이 먹고 싶다고 했더니 친정엄마가 음식을 보내왔다. 바나나잎으로 싼 일종의 떡인 ‘언섬’이었다. 시부모님은 캄보디아에서 비행기 타고 온 떡이 쉬었을지 모르니 먹지 말라고 했다. 남편이 출근한 뒤 쓰레기통을 뒤져 언섬을 찾아냈다. 꾸역꾸역 입안으로 밀어 넣었다. 시부모님이 아시고 불같이 화를 내셨다.

연년생으로 아이를 하나 더 낳고, 한국 국적을 얻었다. 태극기를 바라보며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는데 목구멍에서 뜨거운 것이 올라오는 것 같았다. 기뻤다. 아, 나는 한국인이구나.

연페이니라는 원래 이름을 바꾼 것도 그때였다. 한국 이름으로 바꾸지 않으면 그러지 않으면 아이들이 어린이집이나 유치원, 학교에서 따돌림을 당한다고 했다. 엄마 이름 적는 칸에 외국어 이름이 있다고 놀림감이 된다는 것이었다. 나 때문에 아이들이 그런 수모를 당하게 둘 수는 없었다. 성은 한국어 ‘연’과 비슷하니 그대로 쓰고, 이름을 유진으로 하기로 했다. 시부모님이 작명소에서 지어오신 이름이다.

연유진이라는 이름이 박힌 주민등록증. 대한민국 국적을 얻은 뒤 국기에 경례를 했을 때, 뛸 듯이 기뻤다.

연유진이라는 이름이 박힌 주민등록증. 대한민국 국적을 얻은 뒤 국기에 경례를 했을 때, 뛸 듯이 기뻤다.

억척 어멈 유진씨, 한국인으로 산다는 것

많은 다문화가정 엄마들은 형편이 어려워서, 돈을 벌어야 해서 한국어 공부를 못한다고 했다. 우리 아이들에겐 그런 엄마가 되기 싫었다. 기를 쓰고 한국어 공부를 했다. 아이들이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 나는 여느 한국 엄마와 똑같이 살기 시작했다. 유진이란 이름으로 엄마 모임에도 나가고 ‘반 대표 엄마’도 자원했다. 모르는 엄마가 없을 정도로 열심히 학교 활동에 참여했다. 내 고향 캄보디아에선 부모가 학교에 가지 않지만, 한국에선 그래야 한다고 했다. 아이를 위해선 못할 일이 없잖은가. 한국인 엄마들은 아이들에게 공부를 많이 시켰다. 뒤질 수 없었다. 가정통신문 챙겨보고 아이들 숙제도 봐주기 시작했다.

아이들이 제 앞가림을 하기 시작하면서 일감도 얻었다. 다문화 강사로 어린이집과 초ㆍ중ㆍ고등학교를 돌면서 캄보디아 소개를 한다. 고향을 알리는 일이라 자랑스럽다. 처음 수업을 맡게 된 날엔 밤을 새워 준비했다. 한국어가 서툴다고 할까 봐 대본을 써서 달달 외웠다. 요즘은 아산병원에서 캄보디아어 의료 통역 봉사를 한다. 더러 캄보디아와 무역을 하는 회사의 통역 일도 맡는다.

요즘은 집에서 아이들에게 캄보디아어로 말을 건다. ‘옷 입자’처럼 간단한 말을 제법 알아듣는 수준이 됐다. “미래에 너희들이 할 일이 많아. 사람들이 영어를 배우지? 너희들이 캄보디아어를 열심히 하면 엄마처럼 캄보디아어 통역사가 될 수도 있고, 무역회사에도 들어갈 수 있어!” 아이들은 뭔가 알아듣는 눈치다. 지난해 5월에는 연수 삼아 아이들을 캄보디아 부모님 댁에 보냈다. 나는 한국인 연유진이다. 당당한 한국인인 것이 자랑스럽다.

 '내 이름'으로 개명한 한국인은 있을까? 몇 명이나 될까? 궁금하시다면 이미지를 클릭하세요. '신기방기 대한민국 개명 검색기'를 만나볼 수 있습니다. 만약 링크가 작동되지 않는다면 주소창에 개명검색기 주소(URL)를 복사해 붙여넣으세요. http:www.joongang.co.kr/Digitalspecial/247

'내 이름'으로 개명한 한국인은 있을까? 몇 명이나 될까? 궁금하시다면 이미지를 클릭하세요. '신기방기 대한민국 개명 검색기'를 만나볼 수 있습니다. 만약 링크가 작동되지 않는다면 주소창에 개명검색기 주소(URL)를 복사해 붙여넣으세요. http:www.joongang.co.kr/Digitalspecial/247

관련기사

전지현ㆍ김태희가 되는 사람들

“결혼이주여성들이 모이는 행사장에는 유독 ‘김태희’ ‘전지현’이란 이름을 가진 여성이 많아요. 한국 드라마의 영향으로 연예인 이름을 따서 개명을 많이 하는 거죠.

아름다운 드라마 주인공 이름을 선호할 수는 있지만,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 여기에 있습니다. 왜 이들은 자신의 문화적 기원인 이름을 한국식으로 바꾸는 것일까요? 해외 이민을 한 한국인도 해당 지역에서 부르기 쉽게 이름을 바꾸지만, 출신지 표식인 성은 한국 성을 유지하는 경향이 많잖아요. 그런데 한국의 결혼이주민들은 왜 성과 이름을 모두 바꿀까요? (김현미 연세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대법원(2007~2017년 10월 말 기준)에 따르면 한국 국적을 취득해 성과 본을 변경한 6만3167명 대다수가 김(22.91%)ㆍ이(17.66%)ㆍ박(6.34%)ㆍ정(3.55%)ㆍ최(3.34%)씨가 됐다. 한국에서 가장 흔한 성을 자신의 새 성으로 선택했다는 의미다. 어떻게든 ‘튀지’ 않기 위해서다. 김 교수는 이를 두고 “문화 다양성에 대한 한국의 낮은 인식 탓”이라고 풀이했다. “가족관계등록부에 외국인 이름이 등장하면 차별을 하고, 결혼이주민을 쉽게 사회적 취약계급이나 결핍된 존재로 규정하는 것이 문제”라는 것이다. 그는 “다문화 사회를 인정하지 않고 결혼이주민들에게 종족적 뿌리, 정체성마저 삭제하도록 하는 우리의 낮은 문화 수용성을 되돌아봐야 한다”고 말했다.

디지털콘텐트랩 특별취재팀=김현예ㆍ정선언ㆍ정원엽 기자,사진=김경록ㆍ우상조 기자, 데이터분석=배여운, 영상=조수진, 디자인=김은교ㆍ김현서ㆍ임해든, 개발=전기환 hykim@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