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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쓸로얄] 아시아의 비너스로 불린 이란 왕비와 망명 왕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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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번 [알쓸로얄] 1편 ‘보석 1541개 박힌 왕관 썼던 이란 황후의 몰락’에선 1979년 이슬람공화국 혁명 이전에 팔라비(팔레비) 왕조가 어느 정도 위용이었나 전해드렸습니다. 이번엔 미국에서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팔라비 일가와 그들이 고국 이란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알아보려 합니다. [알쓸신세-고 보면 모 있는 기한 계뉴스]의 왕실·왕족 시리즈 [알쓸로얄] 2편 시작합니다.

해외 도피한 왕비 재산 1억 달러

1986년 이란의 전 왕세자 레자 팔라비(팔레비)와 자스민의 결혼식. 왼쪽은 어머니 파라 디바 전 이란 황후. [사진 핀터 레스트]

1986년 이란의 전 왕세자 레자 팔라비(팔레비)와 자스민의 결혼식. 왼쪽은 어머니 파라 디바 전 이란 황후. [사진 핀터 레스트]

1979년 이란에선 이슬람 종교지도자 아야톨라 알리 호메이니가 이끄는 원리주의 무슬림 세력이 팔라비(팔레비) 왕조를 쫓아내고 공화국을 수립했습니다.

당시 무함마드 레자 팔라비 국왕의 장남 레자 팔라비는 미국에서 공군 조종사 과정 중이었습니다. 이듬해 부왕이 이집트에서 사망하자 21세 왕세자 레자 팔라비는 허울뿐인 왕실의 대통을 계승하게 됐습니다. 하지만 스스로를 국왕으로 칭하지는 못했습니다. 1906년 제정된 이란 구헌법에 따르면 왕위 계승자는 이란 의회에서 선서를 해야 인정받기 때문입니다.

레자 팔라비의 모친은 국왕의 세 번째 아내 파라 디바 팔라비입니다. 1967년 보석 1541개가 박힌 왕관을 쓰고 이란 황후 칭호를 받았던 호화 대관식의 주인공이죠. 비록 이란에서 쫓겨나긴 했지만 해외에 재산을 상당히 빼돌리고 있었나 봅니다. 2016년 포브스 등 보도에 따르면 미국에 거주 중인 파라 팔라비의 재산은 약 1억 달러(약 1000억원)로 추정됐습니다.

1950년 2월 16일 이란 테헤란의 상원 의회에서 국왕(Shah) 취임 선서를 읽는 무함마드 레자 팔라비(팔레비). [사진 위키피디아]

1950년 2월 16일 이란 테헤란의 상원 의회에서 국왕(Shah) 취임 선서를 읽는 무함마드 레자 팔라비(팔레비). [사진 위키피디아]

팔라비 첫 왕비 '아시아의 비너스'로 불려 

잠시 팔라비 국왕의 전 부인들을 살펴보겠습니다. 팔라비는 왕세자 시절이던 1939년 이집트의 공주 파우지아와 첫 결혼을 했습니다. 팔라비가 20세, 파우지아가 18세였는데(일각에선 16세로 주장) 파우지아 공주는 제2의 클레오파트라라고 불릴 정도로 미인이었습니다. 왕가의 정략 결혼이라 해도 팔라비 왕세자로선 거부할 이유가 없었겠지요. 결혼식은 카이로에서 한번, 테헤란에서 한번 열렸습니다.

이집트 공주이자 무함마드 레자 팔라비(팔레비) 이란 국왕의 첫번째 부인이었던 파우지아. '클레오파트라의 환생' '아시아의 비너스'로 불릴 정도의 미인이었다. [사진 위키피디아]

이집트 공주이자 무함마드 레자 팔라비(팔레비) 이란 국왕의 첫번째 부인이었던 파우지아. '클레오파트라의 환생' '아시아의 비너스'로 불릴 정도의 미인이었다. [사진 위키피디아]

이란 팔라비(팔레비) 왕조의 두번째 국왕 무함마드 레자 팔라비의 첫번째 왕비였던 파우지아 푸아드(Fawzia Fuad). '아시아의 비너스'라고 불릴 정도의 미모의 소유자로 1942년 9월 21일 발간된 미국 '라이프'지 표지를 장식하기도 했다. [사진 위키피디아]

이란 팔라비(팔레비) 왕조의 두번째 국왕 무함마드 레자 팔라비의 첫번째 왕비였던 파우지아 푸아드(Fawzia Fuad). '아시아의 비너스'라고 불릴 정도의 미모의 소유자로 1942년 9월 21일 발간된 미국 '라이프'지 표지를 장식하기도 했다. [사진 위키피디아]

2년 후인 1941년 팔라비는 연합국의 압력을 받아 양위한 부왕의 뒤를 이어 이란의 샤(Shah, 국왕)가 됐습니다. 이듬해인 1942년 미국 잡지 『라이프』 는 파우지아 왕비를 9월 21일자 커버에 실으면서 ‘아시아의 비너스’라고 표현했습니다. 계란형 얼굴과 꿰뚫는 듯한 푸른 눈이 조각품 같다는 찬사도 곁들였습니다.

하지만 결혼은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딸 샤나즈가 태어난 후 파우지아는 1945년 테헤란의 왕궁을 떠나 이집트에서 이혼소송을 제기했습니다. 1948년 11월 이혼이 성립되면서 파우지아는 다시 이집트 공주로 돌아갔고 이혼 이듬해에 이집트 대령과 재혼했습니다.

무함마드 레자 팔라비(팔레비) 국왕(오른쪽)과 그의 첫번째 왕비이자 이집트 공주 출신인 파우지아. [사진 위키피디아]

무함마드 레자 팔라비(팔레비) 국왕(오른쪽)과 그의 첫번째 왕비이자 이집트 공주 출신인 파우지아. [사진 위키피디아]

둘째 왕비 이혼 위자료로 파리 대저택 

팔라비는 1951년 두 번째 아내를 맞습니다. '소라야' 라는 이름의 새 왕비는 유럽에서 교육 받은 자유분방한 여성이었습니다. 소라야는 16세인 1948년 팔라비를 처음 만났고 팔라비는 그에게 22.37캐럿에 이르는 다이아몬드 반지를 선물하며 청혼했습니다. 두 사람의 결혼식 역시 화려했습니다. 소라야 왕비는 크리스찬 디오르가 디자인한 깃털과 진주로 장식된 드레스를 입었습니다.

1951년 무함마드 레자 팔라비(팔레비) 국왕과 두번째 부인 소라야의 결혼식. 소라야 왕비는 크리스천 디오르가 디자인한 깃털과 진주로 장식된 웨딩드레스를 입었다. [사진 위키피디아]

1951년 무함마드 레자 팔라비(팔레비) 국왕과 두번째 부인 소라야의 결혼식. 소라야 왕비는 크리스천 디오르가 디자인한 깃털과 진주로 장식된 웨딩드레스를 입었다. [사진 위키피디아]

무함마드 레자 팔라비 이란 국왕(오른쪽)과 그의 두번째 왕비 소라야. [사진 위키피디아]

무함마드 레자 팔라비 이란 국왕(오른쪽)과 그의 두번째 왕비 소라야. [사진 위키피디아]

팔라비 국왕이 가장 사랑한 여인으로 꼽히는 소라야는 불행히도 아이를 갖지 못했습니다. 왕위를 계승할 아들이 급했던 왕은 결국 1958년 두 번째 이혼을 선언합니다. 왕에게 아들을 낳아줄 둘째 왕비를 들이는 방안도 검토됐지만 소라야는 깨끗이 물러나는 쪽을 택했습니다. 이혼 위자료로 당시 가격으로 300만 달러에 이르는 파리의 최고급 펜트하우스와 롤스로이스 및 벤츠 자가용, 각종 보석과 매달 7000달러의 연금이 주어졌습니다. 소라야는 파리에서 살면서 몇몇 영화에 출연하는 등 배우로서 인생 후반부를 보냈습니다.

혁명 전후로 수십만명 미국에 망명 

 세 번째 부인이 된 파라 디바는 자손이 귀했던 팔라비 국왕에게 왕자 둘, 공주 둘을 안겨줬습니다. 1967년 황후 칭호까지 받게 된 것도 이러한 ‘다산’의 공로가 작용했을 겁니다. 하지만 지난 편에서 말씀드렸듯 혁명으로 쫓겨난 뒤 막내딸 레일라는 약물과다복용으로, 차남 알리 레자는 권총 자살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한때 최고의 부와 명예를 누렸던 이란 왕가의 비극적 몰락이지요.

 1967년 파라 디바 팔라비(팔레비) 왕비를 황후(Shabanu)로 추대하는 대관식에서 무함마드 레자 팔라비 국왕이 왕비에게 왕관을 씌워주고 있다. 보석 1541개가 박힌 왕관은 세계적인 브랜드 반클리프 아펠이 왕궁의 요청에 따라 특별 제작했다. [사진 위키피디아]

1967년 파라 디바 팔라비(팔레비) 왕비를 황후(Shabanu)로 추대하는 대관식에서 무함마드 레자 팔라비 국왕이 왕비에게 왕관을 씌워주고 있다. 보석 1541개가 박힌 왕관은 세계적인 브랜드 반클리프 아펠이 왕궁의 요청에 따라 특별 제작했다. [사진 위키피디아]

그러나 파라 디바와 장남 레자 팔라비는 현재까지도 미국에서 윤택한 망명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이란 혁명 전후로 해외로 도피했던 이민자들, 이른바 ‘디아스포라’가 이들의 든든한 지지자들이기도 합니다. 일각에선 이란 디아스포라가 LA에만 60만명 정도 된다고 추정합니다.

11분간 '깜짝 방영'…미 CIA가 기획

1986년 9월 이란 TV에 갑자기 해적 전파가 끼어들었습니다. 11분 간 전파를 탄 영상에선 미국에 살고 있는 레자 팔라비 왕세자가 모습을 드러내 “나는 돌아갈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란 정부와 국민들을 놀라게 한 이 이벤트는 미 중앙정보국(CIA)이 기획했던 것으로 훗날 밝혀졌습니다. 80년대 CIA가 이란 왕실의 망명 생활을 금전적으로 후원했다는 폭로도 나왔습니다.

레자 팔라비 이란 왕세자. 1979년 이슬람 혁명으로 축출된 팔라비(팔레비) 왕조의 생존해 있는 계승자다. 1960년 무함마드 레자 팔라비 국왕의 장남으로 태어났고 현재는 미국에 거주하고 있다. [사진 위키피디아]

레자 팔라비 이란 왕세자. 1979년 이슬람 혁명으로 축출된 팔라비(팔레비) 왕조의 생존해 있는 계승자다. 1960년 무함마드 레자 팔라비 국왕의 장남으로 태어났고 현재는 미국에 거주하고 있다. [사진 위키피디아]

왕세자는 이같은 주장을 “근거 없는 것”이라고 부인했습니다. 마땅한 직업 없이 미국에서 살아갈 수 있는 것에 대해선 “애국적인 지지자들 덕분”이라고 했습니다. 팔라비 왕세자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취임 후에 언론 인터뷰에서 “이란에 혁명이 일어나야 한다” “이란에 돌아가고 싶다”는 열망을 다시 드러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란에선 미국에 있는 파라 디바 왕비나 레자 팔라비 왕세자의 근황을 TV로 종종 볼 수 있다고 합니다. 중앙정부가 통제하는 국영방송은 아니고 해외에서 송출되는 위성채널을 통해서죠.

 이란 내에서 방송되는 해외발 위성채널은 파르스(PARS) TV(미국), BBC 페르시안(영국), 파르시(PARSI) 1 등 수십여개나 됩니다. 이런 채널은 위성 수신기만 달면 가정에서 볼 수 있는데 2000년 초만 해도 단속이 심했지만 이젠 걷잡을 수 없는 지경이라 당국도 사실상 묵인해주고 있다는군요(구기연 『이란 도시 젊은이들, 그들만의 세상 만들기』 참조).

위성 채널 맞서 '대장금' 등 한류 방송 

해외 거주 이란인들에 의해 주로 운영되는 이들 채널은 상당수가 옛 왕가에 호의적이라 새해만 되면 왕비와 왕세자의 인사를 방영해준답니다. 또 왕정 시대 인기를 끌었던 왕년의 스타 뿐 아니라 LA에서 활동하는 1.5세대, 2세대 교포 가수의 쇼도 방영하고요. 그 시절을 기억하는 장년 세대에겐 향수를, 종교적 규제의 틀 안에 갇힌 젊은 세대에겐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내용들이죠.

조선 중종 시기를 배경으로 한 MBC 역사 드라마 '대장금'. 이란에서 한류를 일으켰다.

조선 중종 시기를 배경으로 한 MBC 역사 드라마 '대장금'. 이란에서 한류를 일으켰다.

이영애 주연의 드라마 ‘대장금’이 이란에서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것 알고 계시지요. 2006년 이란 국영 IRIB방송을 통해 방영됐을 때 비공식적인 시청률이 80%를 넘었다고 알려집니다. 그런데 이란에서 한류가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은 어찌 보면 이런 위성 미디어 덕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위성 채널을 통해 할리우드나 미국 드라마가 퍼져 나가자 이란 국영방송은 이를 견제하는 차원에서 한국 드라마를 틀었습니다. 그 결과 ‘대장금’을 시작으로 ‘주몽’ ‘고맙습니다’ ‘해신’ ‘하얀 거탑’ ‘동이’ 등이 잇따라 히트했지요. 이란 당국의 보수적인 입맛에 맞게 주로 사극이나 가족 드라마를 수입한 것도 눈여겨 볼 대목입니다.

최근 이란에서 반정부·반기득권 시위가 들불처럼 일었을 때 정부가 가장 먼저 한 일이 메시저 앱 ‘텔레그램’의 서비스 차단을 시도한 것입니다. 텔레그램을 통해 시위 정보를 공유하고 비판 여론이 결집하는 것을 막으려 한 거죠. 일주일 넘게 이어졌던 시위는 21명이 사망하고 1000여명이 구금되는 것으로 일단락되고 있지만, 이게 끝이라고 단정하긴 이릅니다.

 인터넷·위성채널 등으로 세계와 접속하는 젊은이들, 이른바 제3세대(나슬레 세봄)가 이란에서 변화의 주역으로 나서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난해 12월 30일(현지시간) 이란 수도 테헤란대학교에서 경찰이 반정부 시위에 참가한 학생들의 출입을 막기 위해 교문을 봉쇄하자 학생들이 항의하며 이를 스마트폰으로 찍고 있다. [AP=연합뉴스]

지난해 12월 30일(현지시간) 이란 수도 테헤란대학교에서 경찰이 반정부 시위에 참가한 학생들의 출입을 막기 위해 교문을 봉쇄하자 학생들이 항의하며 이를 스마트폰으로 찍고 있다. [AP=연합뉴스]

강혜란 기자 theothe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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