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이름] 최새미씨의 '싸이미' 탈출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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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영ㆍ변분돌ㆍ김하녀ㆍ임신ㆍ송아지ㆍ박하늘별님구름햇님보다사랑스런우리ㆍ김태희ㆍ전지현ㆍ도민준…’
세상에는 다양한 사람만큼 다양한 이름이 있습니다. 이름은 ‘나’입니다. ‘이름을 불러줬을 때 꽃이 됐다’는 김춘수의 시구처럼, ‘춥고 모진 날 사이로 잊혀진 네 이름을 안다’는 아이유의 노랫말처럼, 이름은 단순한 호칭이 아니라 ‘존재 자체’를 가리킵니다.
‘올 한해 어떻게 살 것인가’ 고민하게 되는 새해 벽두, 그래서 이름 얘기를 해보려 합니다. 이름에 얽힌 네 편의 이야기를 통해 오늘 우리 사회, 우리의 삶을 들여다보려 합니다. 두 번째 이야기는 여권 영어 이름을 바꾸려 소송까지 하게 된 최새미(33)씨 이야기입니다.

부모님은 투명한 샘물같은 아이가 되라고 한글이름 '최새미'를 주셨다. 가족여행을 위해 여행사를 통해 여권을 만들면서, 내 영어이름은 새미가 아닌 '싸이미'가 됐고, 난 영어 이름을 되찾으려 소송을 하고 있다.

부모님은 투명한 샘물같은 아이가 되라고 한글이름 '최새미'를 주셨다. 가족여행을 위해 여행사를 통해 여권을 만들면서, 내 영어이름은 새미가 아닌 '싸이미'가 됐고, 난 영어 이름을 되찾으려 소송을 하고 있다.

나의 싸이(SAI) 탈출기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강남스타일', 비트에 맞춰 신나게 말춤을 추는 가수 싸이(PSY) 이야기 말이다. '싸이' 소리를 귀에 인이 박이도록 들을 수밖에 없는 사연은 이렇다. 내 이름은 최새미. 나를 낳아주신 부모님은 맑고 투명한 샘물 같은 아이라는 뜻에서 '새미'란 순 한글 이름을 지어주셨다. 불행(?)의 씨앗이 뿌려진 것은 200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중학생 시절이던 그때, 우리 집은 가족여행을 계획했다. 엄마의 친구가 사는 미국 로스앤젤레스가 목적지. 첫 해외여행이니 여권부터 만들었다. 여행사를 통해 여권을 만들고 우리 가족은 2주에 걸쳐 미국여행을 했다. 행복했다.

무언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 것은 내가 머리가 굵어진 뒤였다. 여느 수험생처럼 밥 먹고 공부하는 시간을 보냈다. 서울대 산림환경학과(06학번)에 진학했다. 컴퓨터공학을 부전공하면서 처음으로 친구와 함께 해외여행 계획을 세웠다. 마침 전에 쓰던 여권 사용기한이 지나 재발급을 받아야 했다. 여권을 들여다보던 나는 그제야 내 이름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내 이름은 '새미'인데, 영문 표기는 싸이미(SAIMI)로 되어 있는 게 아닌가. 아뿔싸. 토익 시험을 볼 때도, 여권에 적힌 영어표기를 생각지 않고 새미(SAEMI)라고 써왔는데. 기왕 재발급을 받을 때 영문 표기를 바꿔보자 싶었다. 하지만 여권발급 창구에선 안 된다고 잘랐다. 따져 묻고 싶었지만, 엄두가 나지 않아 포기하고 돌아섰다. 친구와의 여행도 무산되면서 이름 이야기는 잠시 잊었다.

영어 이름은 최새미씨에게 한글 이름만큼 중요하다. 소송을 준비하면서 그는 놀랐다. 자신과 같은 사람들이 뜻밖에도 많이 있었다.

영어 이름은 최새미씨에게 한글 이름만큼 중요하다. 소송을 준비하면서 그는 놀랐다. 자신과 같은 사람들이 뜻밖에도 많이 있었다.

끝나지 않는 찜찜함, 그리고 싸이(PSY)의 대박

영문 이름이 골칫거리가 되기 시작한 것은 2008년부터다. 바이오에탄올(사탕수수ㆍ감자 같은 작물에서 알코올을 추출해 석유제품과 혼합한 바이오 연료)을 연구하며, 미국 공공기관과 연구소를 탐방하기로 했다. 목적지는 시애틀에 있는 워싱턴 주립대와 미국 국립신재생에너지 센터, 시러큐스대학 등으로 잡았다. 이들 기관에서 출입허가를 받으려면 신분이 확실해야 했다. 한데 학교 영문 재학증명서의 이름(SAEMI)과 여권 명(SAIMI)이 달랐다.

결국 여권 이름에 맞춰 서류를 꾸민 뒤 연구소 탐방을 했다. 찜찜했다. 취업한 뒤에도 이름은 해외에 일을 보러 갈 때마다 발목을 잡았다. 2011년 과학 칼럼니스트로 일을 하기 시작하면서 해외 세미나에 갈 때마다 ‘싸이미’로 불렸다. 2012년 가수 싸이가 ‘강남스타일’로 소위 글로벌 스타가 되면서부터는 고통이 가중됐다. 외국 친구들은 나를 부르며 ‘싸이’라고 농담을 했다. 웃고 넘기면 그만이라고 생각했지만, 괜히 놀림당하는 게 억울했다. 나는 ‘싸이미’가 아니라 ‘새미’라고!

논문을 해외 여러 학회에 제출하면서 최새미씨는 미래와 직업을 위해서 반드시 '이름을 되찾아야만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됐다. 1심은 승소했지만 외교부가 항소해 소송은 이어질 전망이다.

논문을 해외 여러 학회에 제출하면서 최새미씨는 미래와 직업을 위해서 반드시 '이름을 되찾아야만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됐다. 1심은 승소했지만 외교부가 항소해 소송은 이어질 전망이다.

‘싸이미’ 탈출과 소송

석사학위 논문을 쓰면서부터는 ‘싸이미’는 꼭 고쳐야 할 대상이 됐다. 논문에 제1 저자 이름을 쓰는데 ‘SAE MI’로 표기했다. 논문은 해외 여러 저널과 학회에 제출하는 것인데, 논문에 쓴 이름이 여권 명과 달라서는 안 됐다. 논문을 쓴 나와, 여권에 있는 내가 다른 사람으로 취급받기 때문이었다. 나는 더 이상 ‘싸이미’로 남아 있어선 안 됐다. 2017년 초 여권 영문명을 바꿔 달라고 했지만, 외교부는 거절했다.

결국 가족과 상의해 소송을 냈다. 소송 과정에서 나와 같은 사람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리고 지난해, 11월 서울행정법원은 외교부를 상대로 낸 여권 영문성명 소송에서 내 손을 들어줬다.

“여권 영어 이름 바꿔주세요” 커지는 목소리  

최새미씨 사건에서 법원은 2005~2017년 6월까지 여권 발급받은 사람들 가운데 이름 가운데 글자가 ‘새’인 사람(2만5449명)의 예를 들었다. 영문 표기로 ‘SAE’를 쓰는 사람이 93.06%인데 반해, ‘SAI’를 쓰는 사람(1.28%)은 적다는 것이다. 1986년 미국에 자동차 수출을 시작한 현대자동차는 영문 표기 때문에 상당 기간 ‘현다이(HYUNDAI)’로 불리다가, 시장 점유율이 높아지고 광고ㆍ홍보 등의 노력으로 2010년 이후 ‘현대’로 불리게 된 점도 근거로 들었다.

법원은 “여권에 기재되는 (성명) 로마자 표기는 신분증명 기능을 해 개인이 자신의 동일성을 표상하는 수단”이라며 “새로이 발급받는 여권에 기존에 발급받은 여권과 다른 영문성명을 사용하는 것을 엄격하게 제한할 경우 헌법상 개인의 인격권과 행복추구권을 침해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최새미씨처럼 여권 영문 이름을 바꾸려는 사람들은 매년 늘어나고 있다. 외교부에 정보공개를 청구해 여권 영문명 변경 신청 추이를 들여다봤다. 2007년부터 지난해 11월 말까지 총 3만 5195건이 접수됐다. 2007년 3269건에 불과했던 신청 건수가 지난해 11월 말 6095건으로 2배 가까이 늘었다.

외교부는 10년간 전체 신청 건의 83.64%를 승인했다. 영어 오리를 뜻하는 ‘DUCK’을 ‘DEOK’으로 바꾸거나, 살인을 뜻하는 ‘KILL’을 ‘GIL’로 바꾸는 등 부정적인 의미의 영문 표기를 변경 신청한 경우였다. 남궁 기 세브란스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해외여행이 자유로워지고 글로벌화가 진행되면서 청년층을 중심으로 영문 이름도 한글 이름처럼 자기 정체성을 드러내는 수단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강해지고 있다”며 “이런 차원에서 자신의 이름에 맞는 영문 철자를 갖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것”이라고 풀이했다.

 '내 이름'으로 개명한 한국인이 있을까? 몇 명이나 될까? 궁금하시다면 이미지를 클릭하세요. '신기방기 대한민국 개명 검색기'를 만나볼 수 있습니다. 만약 링크가 작동하지 않는다면 주소창에 개명검색기 주소(URL)를 복사해 붙여넣으세요. http:www.joongang.co.kr/Digitalspecial/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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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권 영어이름 바꾼다면?

 여권은 우리 땅을 벗어나면 '대한민국 국민'을 인정받을 수 있는 신분증 역할을 한다. 외국 출입국사무소에서 여권이름을 중시하는 것도, 해외에서 신용카드로 쇼핑을 할 때 카드에 박힌 영문 이름과 여권 이름이 같아야만 쓸 수 있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외교부는 영어 이름을 폭넓게 바꾸도록 허용하면 우리나라의 '대외신인도'에 문제가 될 수 있다고 본다. 한국인 입장에서는 같은 사람인데 영문 표기를 달리하면, 외국에선 '다른 사람'으로 인식하기 때문에 국가 신뢰도와 직결된다는 것이다.

 오모씨 역시 최새미씨처럼 소송을 했다. 오씨는 이름에 들어가는 글자 '정'의 영어 표기를 바꾸려(JUNG→JEONG) 했다. 하지만 외교부는 오씨의 신청에 대해 "여권에 있는 영문 이름이 한글 성명 발음과 명백하게 일치하지 않는 경우에 해당하지 않는다"며 거부했다. 오씨는 2014년 소송을 냈다. 1심을 맡았던 서울행정법원은 "대학 및 대학원 졸업증명서와 보험·신용카드 서류 등 사문서에 기재된 영문 성명을 여권에 수록된 것과 동일하게 바꾸기 어렵다는 사정이 보이지 않는다"며 기각했다. 현재 오씨의 소송은 대법원에 가 있다.

외교부는 어떤 상황일 때 영어 이름을 바꿀 수 있도록 하고 있을까. 외교부의 설명이다.
"가장 많은 영문 이름 변경 신청 사유는 '발음 불일치'다. 하지만 영문 이름을 쉽게 변경하도록 허용하면 출입국 심사가 어렵고 범죄악용 소지도 있어 시행령에 따라 변경 허가를 하고 있다." 외교부는 헌법에서 보장하고 있는 행복추구권의 일환으로 미성년(만 18세 미만) 시절 사용하는 영문 이름을 1회에 한해 성인이 된 뒤 변경할 수 있도록 하는 여권법 시행령 개정안을 지난해 말 입법예고했다. 올 3월부터 시행될 예정이다. 이하는 여권법 시행령으로, 아래의 경우에 한해서는 이름 영문 표기를 바꿀 수 있다.

1. 영문 이름이 한글 발음과 명백히 다를 때
2. 영어 이름이 부정적인 의미를 가질 때
3. 18세 미만 사용한 영문 이름은 1회에 한해 변경 가능*
4. 해외에서 여권 이름과 다른 영어 이름을 취업이나 유학 등을 이유로 장기간 사용한 경우
5. 여권 영문 성에 배우자의 영문 성을 추가하거나 변경, 삭제하는 경우
6. 한글 성명을 개명한 경우
7. 최초로 발급받은 여권을 사용하기 전에 영문 이름 변경
8. 기타 외교부장관이 인도적 사유를 고려해 필요하다고 인정할 때
(*2018년 3월 시행 예정)

특별취재팀=김현예ㆍ정선언ㆍ정원엽 기자,사진=김경록ㆍ우상조 기자, 데이터분석=배여운, 영상=조수진, 디자인=김은교ㆍ김현서ㆍ임해든, 개발=전기환 hyk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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