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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양성희의 시시각각

문화를 ‘진흥’한다는 낡은 프레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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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양성희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양성희 논설위원

양성희 논설위원

지난해 말 방탄소년단이 미국 아메리칸 뮤직 어워드 무대에 섰을 때 한류 전문가인 홍석경 서울대 교수는 분통을 터트렸다. 미국 언론에 실린 한 재미학자의 인터뷰 때문이었다. “방탄소년단이 정부의 지원책과 적극적인 홍보 덕으로 성공했다고 말하고 있어요. 한류가, 소프트파워로 키워낸 국가주도 대중문화라는 거죠. 이 재미학자뿐 아니라 서구 언론이 한류에 대해 흔히 갖는 오해죠.”

시효 다한 정부 주도 문화산업진흥책 #편 가르기식 지원 대신 인프라 구축을

홍 교수의 말처럼, 이는 절대로 사실이 아니다. 역대 정부가 나서서 문화콘텐트산업을 ‘진흥’해 왔지만, 사실 대부분의 성취는 민간 영역에서 자율적으로 이뤄졌다. 심지어 방탄소년단은 데뷔 초 국내 음악계에서조차 제대로 인정 못 받는 ‘흙수저’ 아이돌이었다.

홍 교수는 한 글에서 “모든 정부가 문화산업을 위해 투자하고 해외 진출을 지원하지만, 세계적인 성공은 그것의 효과가 아니다. 정부는 물길이 트이도록 도울 수는 있지만 흐르는 물길을 이루는 것은 아니다”고 했다.

지난 연말 문체부는 제1차 문학진흥계획을 발표했다. 지난해 8월 시행된 문학진흥법에 의거해서다. 2018~2022년 제1차 계획에 이어, 제2차 계획을 짤 문학진흥미래정책포럼(가칭) 운영 계획도 밝혔다.

그간 문화산업 진흥에서 기초예술 분야가 홀대받은 것을 생각하면 진일보한 조치다. 또 콘텐트산업의 핵심이 이야기라는 점에서도 문학 살리기는 주요 과제다. 그러나 마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떠올리게 하는 문학진흥 5개년 계획이 난센스라는 지적이 많았다. 출판평론가 표정훈씨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문학에 진흥 개념이 가당한지도 의문이지만, 정부가 나서서 해당 분야의 진흥을 이끈다는 마인드 자체가 블랙리스트의 토양이 아니었을지”라고 썼다.

실제 우리에게는 많은 문화 ‘진흥’ 기관들이 있다. 콘텐츠진흥원, 영화진흥위원회, 출판문화산업진흥원 등이다. 경기콘텐츠진흥원 등 지자체 단위에도 있다. 출판문화산업진흥법에 의거해 문체부 장관은 5년마다 출판진흥 기본계획을 세워야 한다.

혹 이처럼 정부 기관명에 ‘진흥’이라는 단어를 내세우는 것이 한류를 정부 주도 문화수출산업의 산물로 오해하게 한 것은 아닐까. 아니 도대체 문화가 진흥하려면 진흥되기는 하는 걸까. 더 중요한 것은 이것이 문화계에 가져온 여파다. 진흥을 위해 지원을 하고, 지원을 위해 돈을 나눠주는 과정에서 정치적으로 내 편, 네 편을 가르며 블랙리스트 사태의 싹이 텄음은 부정할 수 없다.

문화에 대한 정부의 가장 좋은 태도는 ‘지원은 하되, 간섭은 최소화’라는 원칙이다. 이때의 지원은 정부가 “해당 분야의 발전을 이끈다(진흥)가 아니라 그저 지지하여 돕는(지원) 데 머무는 것이 좋다. 진흥이 되고 안 되고는 해당 분야의 자체 소관”이라는 표정훈씨의 말에 동감한다. 정부는 건강한 생태계가 조성될 수 있도록 인프라를 갖추는 데 주력해야 한다. 인프라 갖추기에는 진보·보수가 따로 없다. 홍석경 교수 역시 “정부가 무언가 하고 싶다면, 대중문화 속에서 꿈을 이루려는 젊은이들의 노동과 삶의 조건을 개선하기 위한 기초를 정책적으로 마련해주는 것이 최선”이라고 말했다. 아직도 열악한 촬영현장에서 스태프가 사망하고, 방송시간을 맞추지 못해 온에어 중 중단 사고가 일어나며, 갑질에, 착취 수준의 열정페이를 강요받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새해가 밝았다. 블랙리스트 파문 등으로 내홍을 겪은 문화계가 문화정책의 큰 그림을 짤 때다. 코드인사 논란이 있었지만 새 수장을 맞은 콘텐츠진흥원에 이어 여타 기관장 인사도 마무리될 것이다. 부디 문화를 ‘진흥’한다는 낡은 프레임부터 벗기를….

양성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