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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 담 쌓은 열등생, 이젠 '곤드레'로 억대 버는 농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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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친구 모임 밥·술값 제 몫” … 요즘 가장 ‘핫’한 27세 억대 농부

재배한 곤드레를 들고 활짝 웃는 청년 농부 박상봉 씨.

재배한 곤드레를 들고 활짝 웃는 청년 농부 박상봉 씨.

스물일곱 청년이 태백산맥 골짜기에서 1만6500㎡ 규모 곤드레(고려엉겅퀴) 농사를 짓는다. 도시에 가고 싶지 않냐고 묻자 “공기도 물도 안 좋아 대학 때 피부가 뒤집어졌다. 쓰레기장에서 살기 싫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박상봉(27) 씨는 지난해 농사로만 순수익 1억원을 올린 청년 농부다. 2013년부터 5년째 고향인 강원 정선 여량면에서 고추와 피망, 곤드레를 재배하고 있다.

[사람 속으로] #정선 산골 ‘청년 농부’ 박상봉씨 #중·고교 땐 공부 담 쌓은 열등생 #관광 온 대학생 보고 한농대 진학 #미국 화훼 농장 견학뒤 농사 눈 떠 #오이고추·피망 이어 곤드레 재배 #톡톡 튀는 새 농법 끊임없이 시도 #시세보다 높은 값, 작년 1억 순익

박 씨는 시골 토박이다. 도시에서 살다 귀농한 다른 청년 농부들과는 제반 환경이 다르다. “할아버지는 부모에게 버림받은 소작농이었고 아버지는 16세부터 농사를 지었다”고 했다. 그렇다고 농사를 천직으로 생각한 건 아니었다. “중학교 때 토마토 가격이 뛰어 한 박스에 6만8000원씩 팔려나간 적이 있어요. 누가 장래희망을 물으면 ‘나도 농사지을 거’라고 막연히 대답하긴 했죠.”

작황은 부침이 심했다. 넉넉한 집안 환경이 아니었다. 중고교 시절은 열등생에 가까웠다. 야자(야간 자율학습) 빼먹기를 밥 먹듯 하고 술·담배도 일찍 배웠다. “가세가 기울었는데 한 살 위 형이 사립대에 진학한 뒤라 저는 대학에 안 갈 생각이었어요.”

고3 때 동네 식당에 온 관광버스를 보고 한국농수산대학교(한농대)가 있다는 걸 우연히 알게 됐다. 국립대 학비 전액 지원에 영농활동으로 군 대체복무가 가능했다. 지원 안 할 이유가 없었다. “설립 초기라 내신 30%, 영농기반 70%로 학생을 모집했는데 경쟁률 1.2대 1을 간신히 뚫었습니다.” 2010년 2월 채소학과에 입학했다.

한농대에 갔다고 다 농사로 인생역전을 하는 건 아니다. 그래도 산골 청년에겐 세상 물정에 눈을 뜨는 기회가 됐다. 해외 현장실습 선발에서 뽑혀 미국 올란도 화훼농장에서 6개월간 연수를 했다. “난생처음 코피 나게 공부해서 토익 점수를 300점에서 380점까지 올린 덕에 얻은 기회였어요. 술, 담배를 일찍 다 해봤으니 대학 가서 술 먹는 게 재미가 없더라고요.”

졸업 후 고향으로 돌아온 박 씨는 무거운 현실과 마주했다. 어머니가 집을 나갔고 아버지 앞으로 된 빚이 2억원에 달했다. 그래도 젊음과 배짱이 무기였다. 농사에 대한 열정도 있었다. 어차피 한농대 졸업생 신분이라 군 대체복무를 포함해 최소 6년은 의무적으로 농사를 지어야 했다. 박 씨는 “그때는 빚을 갚아야겠다는 생각보다는 일단 농사를 지어야겠다는 게 먼저였다”고 회상했다. 홀로 무작정 농협에 찾아가 대출을 신청했다. 농림수산업자 신용보증기금(농신보) 담보로 1500만원을 받았다. 기존 빚 이자를 갚는 데만 매달 수백만원이 들었다.

청년창업농

청년창업농

처음 선택한 작물은 상품성이 좋은 고추와 피망이었다. 수요가 많은 홍고추·오이맛고추를 주로 심었다. 첫해 농사는 하늘이 도왔다. 일조량과 강수량이 뒷받침돼 연말에 8000만원가량을 손에 쥐었다. “고추는 한 개 따면 500원, 피망은 한 개 따면 1000원을 벌 수 있었어요. 밤늦게까지 헤드라이트를 쓰고 나가 ‘나무에서 돈을 줍는다’는 생각으로 신나게 수확했죠.”

이듬해 농사는 평작 수준이었다. 연 수익이 절반 수준으로 떨어지자 곤드레 농사에 도전하기로 했다. 강원도 정선은 곤드레 특산지다. 주변 농가 대부분이 곤드레나물을 재배했다. 박 씨는 신선한 아이디어로 다양한 시도를 했다. “톡톡 튀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한 번은 곤드레를 벤 부분에 항생제 계통의 약을 쳐 보기도 했습니다. 기존 살균제를 쳐도 계속 죽길래 남들이 안 하는 걸 한 거죠.”

끊임없이 새로운 도전을 한 덕에 시세보다 비싼 값에 곤드레를 납품할 수 있었다. 2015년 이후 연 수익이 매년 올라 지난해에는 1억원가량을 벌게 됐다.

박 씨는 “요즘 청년농부가 워낙 ‘핫’해서 관심을 갖는 곳이 많다”고 했다. “농협은행 직원, 경찰관, 7급 공무원인 친구들이 있지만 모임에서 밥값, 술값 계산은 대부분 제 몫”이라고도 했다. 하지만 청년창업농 모두가 박 씨 같은 꽃길을 걷는 건 아니다. 이주명 농식품부 농업정책국장은 “초기 설비투자 등에 빚을 많이 질 뿐 아니라 상품성 있는 작물을 선택해 안정적인 판매 활로를 확보하기까지 어려움을 겪는다”고 설명했다.

박상봉

박상봉

국내에는 더 많은 젊은 농부가 필요하다. 성패를 막론하고 청년농의 절대적 숫자가 턱없이 부족해서다. 일자리를 찾는 청년이 많지만 그들에게 농사 도전은 아직 생소하다. 지난해 통계에 따르면 전국 40세 미만 농가 경영주는 1만1000명으로 전체 농가 경영인의 1.1%에 불과한 것으로 집계됐다. 이 추세대로라면 2025년에는 20~30대 청년 농장주 비율은 0.4%로 줄어든다는 게 농식품부 측 분석이다.

박 씨는 “가장 힘들었던 점이 뭐냐”는 질문에 “대출을 잘 해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내년에는 겨울철에 곶감을 만들어 농한기 수입원을 만들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정부는 내년부터 청년창업농 1200명에게 영농정착지원금을 최장 3년간 최대 월 100만원 지원한다. 마상진 농촌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프랑스나 일본 사례처럼 정부 지원을 통해 40세 미만 농가경영주 비중이 감소세에서 증가세로 전환하는 게 국가적으로 중요한 과제”라고 말했다.

세종=심새롬 기자 saero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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