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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키 헬멧은 죄가 없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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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김한별 기자 중앙일보 Product 담당
김한별 디지털콘텐트랩장

김한별 디지털콘텐트랩장

세밑 경남 양산의 스키장에서 큰 사고가 났다. 초보 스키어가 앞서가던 스노보더를 들이받아 숨지게 했다. 안타까운 마음에 관련 기사·댓글을 찾아보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피해자가 헬멧을 안 쓴 것도 문제’라는 질타 때문이다. ‘이참에 헬멧 착용을 의무화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다. 과연 그럴까.

2년 전 이맘때, 2010년 겨울올림픽이 열렸던 캐나다의 휘슬러에서 스키를 탔다. 인근의 밴쿠버에서 연수 중에 누린 호사였다. 휘슬러 스키장은 높고 거칠다. 가장 높은 곳이 해발 2284m로, 한라산(해발 1947m)보다 높다. 슬로프가 200여 개나 되는데, 그중에는 길이 10㎞가 넘는 것도 있다. 그런데도 심심하다며 정규 슬로프가 아닌 ‘야생 눈 비탈’에서 오프 피스트(off-piste) 스키를 타는 사람들이 있다. 대부분 헬멧을 쓰지만 야구모자·비니 차림도 종종 눈에 띈다. 모두 안전불감증일까.

캐나다는 스키 헬멧 착용을 적극 권장한다. 대대적 캠페인을 통해 2003년 32%였던 착용률을 2015년 85%까지 끌어올렸다. 하지만 헬멧 착용이 의무는 아니다. 스키 탈 때 꼭 지켜야 하는 ‘안전 십계명(Alpine Responsibility Code)’은 따로 있다. 1번은 “항상 (스키를) 통제 가능해야 한다. 반드시 정지할 수 있고, 사람이나 장애물을 피할 수 있어야 한다”이다. 한마디로 실력에 맞게 스키를 타란 얘기다. 앞사람을 피하지 못하는 초보라면 무모하게 상급자 코스에 올라가지 말란 의미다.

캐나다스키협회(CSC)는 이런 ‘기본’을 지키는 게 헬멧 같은 안전장비를 갖추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고 말한다. 섣불리 헬멧 착용을 의무화하면 ‘나는 필요한 조치를 다했다’는 생각에 오히려 안전의식이 떨어질까 걱정한다. 근거도 있다. 스키 헬멧은 저속(시속 22.5㎞) 충돌 사고 때만 효과가 있는데, 헬멧을 쓰면 그보다 과속(시속 40~60㎞)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멀게는 세월호부터 가깝게는 제천 화재, 양산 스키 사고까지 우리는 숱한 안전 사고를 경험했다. 사고 재발을 막기 위해 법·제도를 정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하지만 그걸로 충분할까. 법에 있건 없건 나와 이웃의 안전을 위해 할 일은 하고 하지 말아야 할 일은 안 해야 한다. 그게 시민정신이고 안전의식이다. 이런 의식 변화 없이 법·제도만 뜯어고치는 건 공허하다. 캐나다 예를 하나만 더 들어 보자. 스키 헬멧과 달리 자전거 헬멧은 의무 착용 대상이다. 하지만 착용률(65%)이 스키 헬멧(85%)을 밑돈다. 법·제도는 중요하지만 전부는 아니다. 한 해를 시작하며 다시 ‘기본’을 생각한다.

김한별 디지털콘텐트랩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