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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150년 조슈 지배 자처하는 아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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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남윤호 기자 중앙일보 미주중앙일보 대표
남윤호 도쿄 총국장

남윤호 도쿄 총국장

2015년 8월 12일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고향에 내려가 이렇게 말했다. “열심히 해서 2018년까지 간다면 (메이지 유신 150주년에도) 야마구치 출신인 내가 총리가 된다는 얘기다.” 메이지 유신 50년엔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内正毅), 100년엔 사토 에이사쿠(佐藤栄作) 등 기념이 될 만한 해엔 모두 야마구치, 즉 조슈(長州) 출신이 총리였다고 하면서다. 메이지 유신을 주도했다는 지역적 자의식이 강하게 담긴 말이다. 시대착오적으로 들리지만 이게 아베의 인식이다.

아베, 신년 초 메이지 유신 예찬 #조슈 정권 자부심 노골화한 셈 #정변으로 얼룩진 19세기 근대사를 #21세기 모델 삼는 건 시대착오 #한·일 모두 미래 얘기가 더 절실

아니나 다를까. 4일의 연두 기자회견에서 그는 메이지 유신을 언급했다. 관저 홈페이지의 연두 소감 역시 메이지 유신으로 시작한다. 150년 전 선조들처럼 국난 극복을 위해 개혁에 나서자는 내용이다.

그의 메이지 유신 예찬론은 좀 따져볼 필요가 있다. 메이지 유신을 고결하고 대쪽 같은 개혁과 동의어로 보는 건 너무 단순하다. 그 과정의 수많은 곡절들을 통째로 건너뛰면 실체가 가려진다.

메이지 유신은 날 잡아 깔끔하게 반포하거나 시작한 게 아니다. 바쿠후의 쇠퇴와 붕괴, 격렬한 권력 쟁탈전, 무력정변을 통한 신정부 수립, 잇따른 내전, 그리고 군국주의…. 메이지 유신은 이런 19세기 중후반 격변기를 두루 담고 있다. 나중에 유신 주체세력들이 근대화를 떼어내 개혁의 랜드마크로 포장한 것이다.

바쿠후 타도를 위한 삿초(薩長)동맹으로 유명한 사쓰마와 조슈는 1600년 전국의 패권을 놓고 벌어진 세키가하라(関ヶ原) 전투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에게 패한 곳이다. 그 뒤 조슈에선 신하가 “새해 바쿠후 정벌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라고 묻고, 영주가 “시기상조”라고 답하는 관습이 매년 정월 초하루 행사로 내려왔다고 한다. 도쿠가와에 대한 원한이 얼마나 컸으면 그랬겠나.

남윤호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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삿초동맹의 본질은 바쿠후 타도와 패권 쟁취다. 그를 위한 대의명분이 왕정복고다. 그렇다고 그들이 천황을 진짜 우러러 받든 건 아니다. 천황 납치 계획을 세우는가 하면, 군사를 풀어 천황 거처로 포를 쏘기도 했다. 자기들끼리는 천황을 교쿠(玉)라고 불렀다. 교쿠는 게이샤를 가리키기도 하는 은어다. 이게 소위 삿초 중심의 근황(勤皇) 세력의 민얼굴이었다.

메이지 정부의 정치적 정당성에도 흠집이 있다. 유신을 주도한 근황지사라는 이들 중엔 과격 테러리스트가 많았다. 시간이 지난 뒤 승자가 쓴 기록에 의해 미화됐을 뿐이다. 바쿠후를 토벌하라는 천황 칙허를 위조했다는 의심도 받는다. 신정부 수립 이후엔 권력형 비리, 오직, 부패 사건도 심심찮았다.

무자비한 토벌전의 상처도 무시하지 못한다. 신정부는 도호쿠(東北) 지역의 투항 의사를 무시하고 대규모 살육전을 벌였다. 1868년의 아이즈(會津) 전쟁이다. 그때의 반감은 지금도 남아 있다. 2007년 4월 후쿠시마 중의원 보궐선거 지원유세에서 아베는 “(조슈) 선배들이 폐를 끼친 데 대해 사과해야겠다”고 했다. 표 때문에 급한 김에 한 말이겠지만, 그 지역 정서를 잘 보여준다.

길게 보면 메이지 유신이 군국주의의 토양이 됐다는 게 정설이다. 그 사상적 근거를 제공한 이가 조슈의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이다. 개명한 선각자로 칭송받지만 원리주의 테러 선동가의 면모도 강하다. 지성(至誠)을 내세우면서도 바쿠후 요인 암살을 주장하며 실행 계획을 짰다. 아시아를 침략해 한반도·만주·타이완·필리핀까지 귀속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게 일본 군국주의에 의해 실행됐다. 우리가 메이지 유신 예찬론을 역사 스토리로만 넘길 수 없는 이유다.

이처럼 메이지 시대는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말끔한 평야가 아니다. 높은 산과 깊은 협곡 탓에 곳곳에서 풍경이 바뀌는 험준한 지형이다. 메이지 유신 덕에 근대화에 성공했다는 말도, 메이지 정변에도 불구하고 근대화를 이뤘다는 말도 다 통한다. 150년이 지나도록 통일된 해석은 굳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일본에선 축제 분위기가 영 뜨지 않는다. 오히려 메이지 유신에 대한 안티 테제가 붐이다. 메이지에 덧씌워진 화장을 지우려는 책들이 베스트 셀러다. 『메이지 유신이라는 과오』 『삿초 사관의 정체』 『메이지 유신의 거짓말』 『메이지 유신의 정체』…. 이게 잘 팔린다는 건 그에 동조하는 사람이 많다는 뜻이다.

이런 분위기에서 메이지 유신을 21세기 일본의 모델로 내세운 아베의 신년 메시지가 얼마나 공감을 살지 의문이다. 그냥 개혁에 대한 각오를 강조한다면 모를까. 새해엔 과거보다 미래에 대한 얘기가 더 절실하다. 하기야 그 얘기는 우리에게도 마찬가지다.

남윤호 도쿄 총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