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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춘식의 寫眞萬事]박근혜에 비추지 말고 김대중에 비추라

중앙일보

입력

1997년 15대 대통령선거에서 김대중 후보는 득표율 40%로 38.7%를 얻은 이회창 후보를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됐다. 당시 유권자 중 58%가 이른바 ‘반 김대중’ 진영에 서 있었고, 6.25 이후 최대 위기라는 외환위기까지 덮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김대중 대통령이 내건 승부수는 ‘통합’이었다. 김 대통령은 이와 관련해서 1998년 2월 25일 대통령 취임 연설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오늘의 난국은 여러분의 협력 없이는 결코 극복할 수 없습니다. 저도 모든 것을 여러분과 같이 상의하겠습니다. 나라가 벼랑 끝에 서있는 올해 1년 만이라도 저를 도와주셔야 하겠습니다. 저는 온 국민이 이를 바라고 있다고 믿습니다. … ‘국민의 정부’는 어떠한 정치보복도 하지 않겠습니다. 어떠한 차별과 특혜도 용납하지 않겠습니다. …제가 선두에 서겠습니다. 우리 다 같이 손잡고 힘차게 나아갑시다. 국난을 극복합시다. 재도약을 이룩합시다. 그리하여 대한민국의 영광을 다시 한 번 드높입시다.”

2003년 2월 25일 노무현 대통령이 국회에서 취임식을 마친 뒤 단하에 내려와 김대중 전 대통령을 환송하고 있다.[중앙포토]

2003년 2월 25일 노무현 대통령이 국회에서 취임식을 마친 뒤 단하에 내려와 김대중 전 대통령을 환송하고 있다.[중앙포토]

 취임사에서 천명한 통합에 대한 그의 다짐은 빈말이 아니었다. 취임사 이전 이미 김대중 대통령은 당선자 신분일 때 김영삼 대통령에게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의 사면을 건의했고 김영삼 대통령은 김 당선인의 건의를 받아들여 1997년 12월 20일 두 전직 대통령을 사면했다.

 집권 후기에 측근 인사를 기용함으로써 빛이 바래긴 했지만 김대중 대통령은 집권 초 인사를 통해 통합에 대한 그의 의지를 분명하게 확인시켜 줬다. 당선 직후 첫 인사에서 노태우 정권에서 정무 수석을 지낸 경북 출신의 김중권 씨를 비서실장에 임명하는 예상 밖의 승부수를 던짐으로써, 대선 과정에서는 물론이고 그전부터 일관되게 그에게 적대감을 보인 TK, PK 지역의 국민들은 물론이고, 새 정권의 통합의지가 어떻게 작동되는지 지켜보던 모든 국민들에게 신선한 감동을 안겼다. 김대중 대통령은 또 강력한 경쟁자이던 이회창 신한국당 후보를 밀었던 이헌재 씨를 금융감독원장에 기용해 능력이 진영보다 우선이라는 인사원칙을 깔끔하게 보여줬다.

김대중 대통령과 김 전 대통령의 초대 비서실장인 김중권 실장.[중앙포토]

김대중 대통령과 김 전 대통령의 초대 비서실장인 김중권 실장.[중앙포토]

 말과 행동이 일치했던 집권 초기 김대중 대통령의 이런 노력은 세계 역사상 유례가 없는 전 국민적 차원의 자발적 ‘금 모으기’ 운동으로 연결되는 등 안정적 국정 운영의 동력을 확보하면서 외환위기 조기 극복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김대중 대통령은 또 동서화합을 위해 정적이던 박정희 전 대통령 기념관 건립에 국비 200억 원을 지원하겠다고 약속하고, 그 자신이 기념사업회 명예회장으로 참여했다. 평생의 경쟁자이자 정적이고 심지어 자신의 목숨까지 노리던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김대중 대통령의 이 같은 관용적 태도는 그를 사상적으로 의심하고 적대감을 드러내던 반대 진영의 국민들을 부끄럽게 했다.

2006년 10월 (왼쪽부터)노무현 대통령이 전두환대통령, 김대중대통령,김영삼대통령 등 전직 대통령들을 청와대로 초청해 함께 걸어가고 있는 모습.[중앙포토]

2006년 10월 (왼쪽부터)노무현 대통령이 전두환대통령, 김대중대통령,김영삼대통령 등 전직 대통령들을 청와대로 초청해 함께 걸어가고 있는 모습.[중앙포토]

 박근혜 대통령의 실정을 딛고 새로 출범한 문재인 정부가 집권 2년차에 접어들고 있다. 5월 10일 41%의 지지율로 대통령에 당선된 문재인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그를 지지한 41%의 유권자는 물론 그를 지지하지 않은 59%의 유권자를 향해 다음과 같이 국민 통합 의지를 밝혔다.

“…오늘부터 저는 국민 모두의 대통령이 되겠습니다. 저를 지지하지 않은 국민 한 분 한 분도 저의 국민이고, 우리의 국민으로 섬기겠습니다. 저는 감히 약속드립니다. 2017년 5월 10일, 이날은 진정한 국민통합이 시작되는 날로 역사에 기록될 것입니다. … 분열과 갈등의 정치도 바꾸겠습니다. 보수와 진보의 갈등은 끝나야 합니다.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직접 대화하겠습니다. 야당은 국정 운영의 동반자입니다. … 전국적으로 고르게 인사를 등용하겠습니다. 능력과 적재적소를 인사의 대원칙으로 삼겠습니다. 저에 대한 지지 여부와 상관없이 유능한 인재를 삼고초려해 일을 맡기겠습니다.… 약속을 지키는 대통령이 되겠습니다. … 대통령부터 신뢰받는 정치를 솔선수범해야 진정한 정치발전이 가능할 것입니다. … 잘못한 일은 잘못했다고 말씀드리겠습니다. 거짓으로 불리한 여론을 덮지 않겠습니다. … 나라를 나라답게 만드는 대역사가 시작됩니다. 이 길에 함께해 주십시오. 저의 신명을 바쳐 일하겠습니다.”

 집권 7개월여가 지난 지금 얼마나 많은 국민들이 문 대통령의 말대로 우리 사회가 현재 분열과 갈등을 끝내고, 오로지 능력에 따라 인사가 이루어진다고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여론조사기관 리얼미터가 28일 발표한 문재인 대통령 국정수행평가 지지도는 67.7%다. 얼핏 들으면 국민의 67.7%가 문 대통령과 이 정부의 정책을 지지하는 것처럼 들리지만 조금만 들여다보면 사정이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67.7%라는 대문짝만한 제목과 지지율 그래프 아래 보일 듯 말 듯 조그만 글씨로 부기된 응답률 4.9%란 숫자를 주목해 보자.

2017년 10월 16일 박근혜 전 대통령이 사실상 재판 보이콧을 선언한 뒤 서울중앙지법을 나서고 있다.[중앙포토]

2017년 10월 16일 박근혜 전 대통령이 사실상 재판 보이콧을 선언한 뒤 서울중앙지법을 나서고 있다.[중앙포토]

 응답률 4.9%란 숫자에는 전화속의 어떤 상대방이 던진 “문재인 대통령의 국정수행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냐?”란 질문에 1000명 중 49명만 대답하고 나머지 951명은 대답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포함돼있다. 전화를 받은 1000명 중 951명의 사람들이 먹고 살기 바빠 여론조사에 응할 시간이 없다거나 아니면 이러쿵 저러쿵 말하고 싶지 않다는 의사표시를 했다는 의미다. 바쁜 건 그렇다 치고 왜 그 많은 사람들이 말하고 싶지 않다는 것일까. 침묵의 의미는 간단하지 않을 것이다.

 물론 조사기관은 통계학적으로 이 숫자만으로도 충분히 여론을 반영한다고 주장한다. 일리 있는 주장일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도널드 트럼프와 힐러리 클린턴이 맞붙었던 2016년 11월 미국 대선에서 미국의 여론조사기관들과 언론매체들은 90:10의 압도적인 확률로 힐러리가 당선된다고 예측했다. 트럼프 당선의 1등 공신인 ‘힐 빌리’들은 여론조사기관의 질문에 보여주지 않던 그들의 부끄러운 진심을 투표소 커튼 속에서 조용하게 꺼내들었다.

 적폐는 청산되어야 한다. 그것은 대의다. 그러나 대의를 이용해 복수를 하고 있다는 의심이 합리적으로 보인다는 수군거림이 사그러들지 않고 있다. 과거 지우기만큼 격렬한 복수는 없다. 미움은 사랑의 다른 모습이다. 잊혀진 인생이야 말로 진정한 비참한 인생이다. 잊혀진 정권, 잊혀진 정책은 전임 권력에게 죽음보다 더 지독한 치욕이다.

 바둑은 인생과 같다. 바둑에서 좋은 수는 먼저 둔 수의 효용을 극대화하는 수다. 직전에 둔 한수의 효용을 극대화하는 다음 한수들이 누적되어 잘 둔 바둑 한판을 만든다. 명국은 그런 것이다. 대통령이 바뀌었다고 역사 해석이 달라지고 전 정부와 전전 정부와 성향이 다른 그전 정부들의 거의 모든 주요 정책들이 부인되고 무효화되고 있다. 이것은 전임 대통령을 선택한 국민들의 의사가 부인되는 것임과 동시에 정권과 관계없이 존재해야 할 국가라는 상위 차원의 유기체가 가져야 할 계속성이 부인되고 무효화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얼음과 끓는 물 사이에 차가운 물, 미지근한 물, 뜨거운 물이 있다. 이것 아니면 저것이고, 이것과 저것 사이에는 아무 것도 없다고 보는 극단주의자의 시각이 맞다면 물은 얼음과 뜨거운 물 밖에 없어야 한다. 무슨 말을 해도 여기에 동의할 수는 없는 일이다.

 박근혜는 무능한 대통령의 결과가 어떤 것인지 분명하게 보여줬다. 국민들은 촛불을 들고 나와 박근혜의 무능한 리더십을 거부했다. 그렇게 문재인 정부가 태어났다. 문재인 정부가 무엇을 어떻게 할지는 박근혜가 반면교사다. 문재인 대통령의 리더십은 박근혜의 리더십만 아니라면 최소 낙제는 면할 조건을 태생부터 가지고 있다. 적어도 정권 차원에서 보자면 이보다 유리한 상황은 없을 것이다.

2017년 11월 21일 도종환 문화체육관광부장관이 청와대 본관에 걸린 임옥상 화가의 '광장에, 서'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지난해 광화문 광장 촛불시위를 주제로 한 작품이다.[중앙포토]

2017년 11월 21일 도종환 문화체육관광부장관이 청와대 본관에 걸린 임옥상 화가의 '광장에, 서'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지난해 광화문 광장 촛불시위를 주제로 한 작품이다.[중앙포토]

 문재인 대통령 집권이 7개월을 넘어 2년차에 접어들고 있다. 박근혜의 실정은 이제 말하지 않아도 다 안다. 그러니 이제 문재인 대통령은 너무나 무능했던 박근혜의 4년에 비추지 말고 집권 초 김대중에 비추어 보기를 권한다. 나보다 못한 사람을 거울로 삼으면 마음의 위로는 되겠으나 발전의 동력이 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사람이든 나라든 시궁창을 딛고서도 별을 쳐다보는 결기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7개월 동안 같은 노래를 들었다. 박근혜 타령은 이제 정말 지긋지긋하다.

 김춘식 중앙일보 포토데스크 부국장 kim.choonsi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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