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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소녀상 할아버지’가 1년간 일본 영사관 앞에 머문 사연?

중앙일보

입력

부산소녀상 지킴이 김상금(67) 할아버지가 지난 28일 부산 동구 일본영사관 앞 소녀상을 돌보며 지난 1년 간의 심정을 말하고 있다.송봉근 기자

부산소녀상 지킴이 김상금(67) 할아버지가 지난 28일 부산 동구 일본영사관 앞 소녀상을 돌보며 지난 1년 간의 심정을 말하고 있다.송봉근 기자

“(일제시대에)어렸을 때 어머니가 동네 소녀들이 위안부로 일본에 끌려갔단 이야기를 수없이 해줬어요. 소녀상이라도 세워져 있어야 지금 청소년들이 우리의 아픈 역사를 알고 기억할 수 있잖아요.”

김상금 할아버지 “어머니에게 들은 위안부 문제 청소년들에게 알려주고파 지킴이 자처” #“소녀상 주변에 쓰레기 투척하고 욕하는 대한민국 국민 볼때 가장 힘들어” #“위안부 문제가 역사교과서에 실려 청소년들이 아픈 역사를 제대로 알게 되는게 소원”

김상금(67) 할아버지가 지난 1년간 부산 일본 영사관 앞에 세워진 소녀상을 지킨 이유다. 김 할아버지는 지난해 12월 28일 부산 시민들의 성금으로 소녀상이 세워진 직후부터 지금까지 하루에 적게는 4시간씩, 많게는 8시간씩 소녀상을 지켜오고 있다.

소녀상 지킴이를 자처해 ‘부산 소녀상 할아버지’라 불리는 그를 지난 28일 일본 영사관 앞에서 만나 인터뷰했다. 이날은 부산 소녀상이 건립된 지 꼭 1년째 되는 날이었다.

지난 1년간 소녀상을 지키면서 김 할아버지는 높다란 담벼락 너머에 있는 일본 영사관을 늘 봐야 했다. “볼 때마다 화가 치밀어 올랐다”는 말로 입을 연 김 할아버지는 “위안부 문제를 사죄하지 않는 일본은 문화적으로 미개한 나라”라며 “일본은 역사적 증언을 해줄 위안부 할머니가 모두 다 돌아가시면 끝날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한번 일어난 역사는 없앨 수도, 되돌릴 수도 없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소녀상지킴이 단체와 갈등을 빚은 '진실국민단체'의 최모 대표가 지난 4월 부산 일본 영사관 옆에 이승만,박정희 전 대통령 흉상을 세우려다 동구청 직원과 시민단체의 저지로 세우지 못하고 박정희 동사안 들고 철수 하고 있다. 송봉근 기자

소녀상지킴이 단체와 갈등을 빚은 '진실국민단체'의 최모 대표가 지난 4월 부산 일본 영사관 옆에 이승만,박정희 전 대통령 흉상을 세우려다 동구청 직원과 시민단체의 저지로 세우지 못하고 박정희 동사안 들고 철수 하고 있다. 송봉근 기자

1년간 소녀상을 지켜오면 가장 힘들었던 때가 언제였는지 물어봤다. “우리나라 사람인데 소녀상을 보며 욕을 하고, 주변에 쓰레기를 투척하고, 자전거를 묶어 두는 몰상식적인 행동을 하는 이들을 마주하는 게 가장 힘들었다”는 답이 돌아왔다. 30대 남성 2명은 올해 초부터 소녀상 주변에 쓰레기를 갖다 놓고 소녀상 반대 문구를 적은 불법 선전물을 붙여 소녀상 지킴이 단체와 갈등을 빚어왔다. 이 남성들은 지난 4월 ‘진실국민단체’라는 단체를 만들어 이승만·박정희 전 대통령 흉상을 세우려다가 시민과 동구청 직원들에 막히자 되돌아갔다.

김 할아버지는 지난 6월 중순께 소녀상을 찾은 술 취한 중년 남성을 제지하다가 뺨을 맞기도했다. 중년 남성이 “넌 돈 얼마 받고 여기서 빨갱이 짓을 하냐”며 시비를 걸었고 그가 “자신의 부모나 형제가 그런 일을 당해도 그렇게 말할 거냐”고 말했다가 폭행을 당했다고 한다. 김 할아버지는 “우리의 아픈 역사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한국 사람들을 보면 화가 치밀어 올랐다”며 “역사교과서에 위안부 문제가 실려있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지난 1월 가족단위 시민들이 부산 동구청 일본영사관 앞에 건립된 소녀상을 찾아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송봉근 기자

지난 1월 가족단위 시민들이 부산 동구청 일본영사관 앞에 건립된 소녀상을 찾아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송봉근 기자

곧 칠순이 되는 그가 소녀상 지킴을 자처한 것도 위안부 문제를 배우지 못한 청소년들에게 아픈 역사를 알려주기 위해서다. 김 할아버지는 “어머니가 해줬던 위안부 소녀들의 이야기가 1991년 김학순 할머니의 첫 증언으로 세상에 알려질 때부터 관심을 갖고 지켜봤다”며 “부산에 소녀상이 세워지는 것을 보고 어머니에게 들은 이야기를 청소년들에게 전해줘야겠다는 결심했다”고 말했다.

그는 소녀상이 세워진 지 보름이 지난 1월 초 이곳을 찾은 연세 지긋한 일본 할머니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김 할아버지는 “한 할머니가 화분 다섯개를 갖고 와서 소녀상 앞에 놓더니 하염없이 울더라. 어설픈 한국어 발음으로 '미안하무니다. 죄송하무니다'를 연신 말한 뒤 손수건으로 소녀상 얼굴을 닦으며 '이 피눈물을 봐라'고 말할 때는 나도 같이 울었다”고 회상했다. 당시 할머니가 두고 간 화분을 그냥 놔두면 얼어버릴 것 같아 매일 집에 가져갔다 가져오길 반복했다고 한다.

김 할아버지는 “자기 조상들의 죄를 사죄하고 가는 일본인들을 보면서 희망을 느꼈다”며 “일본 정부의 진심 어린 사죄를 받기 위해서는 한국 정부가 좀 더 강력하게 사죄를 요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28일 부산 동구 일본영사관 앞 평화의 소녀상에서 소녀상을 지키는 부산시민행동 회원들이 소녀상 건립 1주년을 기념하는 기자회견을 한 뒤 '한일 위안부 합의 무효' 등 구호를 외치고 있다.송봉근 기자 (2017.12.28.송봉근)

28일 부산 동구 일본영사관 앞 평화의 소녀상에서 소녀상을 지키는 부산시민행동 회원들이 소녀상 건립 1주년을 기념하는 기자회견을 한 뒤 '한일 위안부 합의 무효' 등 구호를 외치고 있다.송봉근 기자 (2017.12.28.송봉근)

김 할아버지를 만난 날 문재인 대통령은 “박근혜 정부의 위안부 합의에 중대한 흠결이 확인돼 후속 조치를 지시했다”고 공식 입장을 밝혔다. 이에 김 할아버지는 “우리나라의 힘만으로 일본 정부의 사죄를 끌어내기는 힘들 것”이라며 “일본의 식민지였던 베트남 등 동남아 국가들과 연대해서 강력하게 사죄를 요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마지막으로 그의 소원을 물었다. “역사교과서에 일본 위안부 문제가 꼭 실렸으면 합니다. 청소년들이 우리의 아픈 역사를 알지 못하면 일본이 이를 왜곡하더라도 바로잡지 못하니깐요.”

지난 2016년 12월 28일 부산 일본영사관 앞에 소녀상을 설치한 시민단체 회원들을 동구청 철거반원들이 강제해산하는 모습. 시민단체 회원들이 경찰에 연행되자 부산 동구청은 소녀상 설치 4시간만에 철거했다가 시민들의 거센 항의로 이틀 뒤 다시 설치했다. 송봉근 기자

지난 2016년 12월 28일 부산 일본영사관 앞에 소녀상을 설치한 시민단체 회원들을 동구청 철거반원들이 강제해산하는 모습. 시민단체 회원들이 경찰에 연행되자 부산 동구청은 소녀상 설치 4시간만에 철거했다가 시민들의 거센 항의로 이틀 뒤 다시 설치했다. 송봉근 기자

부산=이은지 기자 lee.eunji2@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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