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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취재일기

‘판사 블랙리스트’ 조사가 왜 비밀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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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유길용
유길용 기자 중앙일보 기자
유길용 사회2부 기자

유길용 사회2부 기자

‘사법부 블랙리스트’ 의혹을 규명한다는 차원에서 법원행정처의 업무용 PC에 대한 조사가 시작됐다. 전·현직 판사가 사용한 PC를 들여다보는 것이 합법적인지 논란이 됐던 사안이다. 이 소식은 지난 26일 오후 5시쯤 알려졌다. 조사를 담당한 추가조사위원회(위원장 민중기 서울고법 부장판사)가 법원 내부 전산망(코트넷)에 공지의 글을 올렸다.

그 직전까지 조사위는 철통 보안을 유지했다. 조사 진행 상황을 묻는 기자들에게 공보 업무를 맡은 판사는 묵묵부답이었다. 판사들만 볼 수 있는 코트넷에 공지 사항이 뜬 지 한 시간쯤 뒤, 대법원 취재기자들에게도 같은 내용의 공지 사항이 전달됐다. 이후 전후 상황을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공보 담당 판사는 “공지 이외 사항은 알려 드릴 수 없다”는 답변만 했다.

조사위는 극비 임무를 수행하듯 은밀하게 움직이고 있다. 앞서 공보 업무를 담당했던 부장판사도 언론의 취재에 일절 대응하지 않고 있다. 필요할 때에만 메모 형식의 공지를 했다. 일부 언론의 추측성 보도와 미확인 팩트에 대해서도 아무런 대응을 하지 않았다.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조사의 공정성과 객관성을 지키겠다는 취지에서 벌어지는 이런 태도는 이번 사건의 진행 과정에 견주어 봤을 때 이해하기 힘들다. ‘사법부 블랙리스트’라는 법원 내부의 은밀한 의혹을 다루는 조사위가 굳이 ‘비밀스럽게’ 움직여야 하느냐는 의문이 든다.

지난 3월 블랙리스트 의혹이 제기되자 판사들은 법관회의 등 집단행동과 개인 미디어(SNS), 온라인 서명운동을 통해 여론에 호소했다. 지난 정부의 ‘문화·예술인 블랙리스트’ 의혹과 맞물리면서 사법부 블랙리스트는 의혹만으로도 충격적이었다. 신뢰의 상징인 사법부가 정치에 의해 얼마나 손상됐는지 걱정하는 목소리도 컸다. 김명수 대법원장이 취임할 때도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갈지에 관심이 쏠렸고, 그는 추가 조사를 선택했다.

법원 내부적으로는 조사위원회를 전폭적으로 신뢰하고 조사 결과를 기다리기로 약속한 듯하다. 그러나 국가적인 의혹에 대한 설명을 법원 내부 통신망의 공지 사항으로 대신하는 것이 사법부의 의무를 다한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김 대법원장이 지난 1월 신임 법관들에게 당부한 말과도 배치된다. 그는 “올바른 결론은 관계 당사자들과 충분한 대화와 투명하게 공개된 토론을 거쳐 숙고했을 때 다다를 수 있고 그 정당성도 인정될 수 있다”고 말했다.

유길용 사회2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