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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논설위원이 간다

“탐정은 안정적 전문직” … 개업 탐정이 변호사보다 더 많은 일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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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조강수
조강수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조강수의 세상만사 

일본은 탐정 천국이다. 개업 변호사(1만5000명)보다 탐정(3만 명)이 더 많다. 사무실을 내고 영업 활동을 하는 수치로만 봤을 때다. 사내 변호사 등 포함시 변호사는 총 3만9000명이고 탐정 자격증 소지자는 6만 명이다. 해마다 탐정 영화·드라마·만화·애니메이션·추리소설이 쏟아져 나온다. ‘탐정 갈릴레오’ ‘명탐정 코난’ ‘전업주부 탐정’…. ‘탐정’이 ‘엄연한 직업’으로 실재하기 때문에 나오는 추론과 상상력의 산물들이다. 일본이 업계 정화 차원에서 탐정업을 법제화한 지 10년이 지났다. 법제화 이전과 이후에 어떤 변화가 있었을까. 현지에서 만난 베테랑 탐정들은 “법제화 이전엔 수입이 훨씬 많았으나 시장이 혼탁했다”며 “지금은 합법적인 정보서비스업으로 생활 속에 깊숙이 뿌리를 내렸다”고 말했다.

2007년 탐정법 시행 이후 #수입은 줄었지만 합법의 길로 #5200개 사무소, 3만 명 활동 #이중 절반이 1인 탐정 #소설 속 명탐정은 허구 #의뢰인 만족시키는 게 명탐정

아자부탐정사무소의 우치다 코지 조사부장이 22일 결혼 사기 조사 의뢰 사건과 관련해 동영상 촬영을 하고 있다. [조강수 기자]

아자부탐정사무소의 우치다 코지 조사부장이 22일 결혼 사기 조사 의뢰 사건과 관련해 동영상 촬영을 하고 있다. [조강수 기자]

지난 22일 오전 11시 도쿄(東京)도 지요다(千代田)구 아사히쿠단(朝日九段)빌딩 8층의 ㈜아자부(麻布) 리서치 탐정사무소. 길 건너편에 김대중 전 대통령 납치사건이 일어났던 그랜드팰리스 호텔이 보였다. 이 탐정사무소는 기쿠치 히데미(菊池秀美·64·여) 민간조사업협회(민조협) 회장의 개인 회사다. 그를 마주했을 때 두 가지 이유로 놀랐다. 영화 ‘007 시리즈’에 영국 정보기관 MI6의 M국장으로 등장하는 주디 덴치와 외모·분위기가 흡사한 게 첫 번째였다. 두 번째는 일본 탐정협회들 중에서 회원 수가 가장 많은 민조협의 현직 회장이 여성 탐정이라는 거였다. 민조협은 내각총리대신의 허가를 받고 경시청의 감독하에 20개 지부로 운영되는 일본 유일의 전국 조직 탐정협회다.

자세히 둘러보니 의뢰인 상담실 벽에는 도쿄도 공안위원회의 직인이 찍힌 ‘탐정업 취급 인증서’가 보란 듯이 걸려 있었다. 일본은 2007년 ‘탐정업무 적정화법’을 시행했다. 국가가 관리·감독하는 공인탐정제도가 도입됐다. 허가제가 아니라 신고제라서 주무관청에 신고만 하면 즉시 영업이 가능하다. 그러다 보니 현재 일본 전역에서 3만여 명이 탐정 일을 하고 있다. 5200여 개의 탐정사무소(도쿄에 800여 개)가 있고, 이 중 절반가량은 ‘1인 탐정’이다. 아자부리서치 탐정사무소 직원은 4명이다. 가수 비의 일본 공연을 찾아다니고 드라마 ‘오로라 공주’를 즐겨 본다는 기쿠치 회장에게 일본 탐정의 과거와 현재를 물었다.

창업 당시 상황이 어땠나.
“남편이 지요다구 7선 의원 출신이다. 주변에 어려운 일을 당한 사람이 많아 탐정 일을 시작한 지 벌써 31년째다. 처음엔 탐정회사가 많지 않아 돈벌이가 됐다. 불·탈법과 합법의 경계도 모호했다. 의뢰 사건은 배우자나 애인의 불륜 문제, 부유층의 가족 간 재산 다툼, 호적 트러블 등이 많았다. 지금은 20~30%로 줄었지만.”
요즘엔 어떤 일을 주로 하나.
“산업재해에 따른 보험금 청구나 부동산 거래 때 실소유 관계 조사, 기업의 직원 신용도·횡령 및 기밀유출 사건 조사, 사람 찾기 등의 수요가 늘었다. 변호사나 로펌에서 재판 증거 수집 의뢰를 받아 협업하기도 한다.”
기쿠치 일본 민간조사업협회장(왼쪽)과 에노모토 전무. [조강수 기자]

기쿠치 일본 민간조사업협회장(왼쪽)과 에노모토 전무. [조강수 기자]

이때 기쿠치 회장은 “내용은 극비”라면서 사무소에서 작성해 의뢰인에게 제공한 두 건의 조사보고서 표지를 보여줬다. ‘도청·도촬기 탐사조사’ 실시 보고서와 ‘우와키(浮氣·불륜)조사’ 보고서라고 적혀 있었다. 그는 “전자는 큰 회사가 기밀 유출을 의심해 임원회의 도청 여부 등에 대한 조사를 의뢰해 수행한 결과이고, 후자는 배우자의 불륜 의뢰 건 조사 결과”라고 설명했다. 이어 “조사 때 청소부, 택배기사, 렌털 기사, 정원사 등으로 위장해 잠입하고 해커와 탐정들만 아는 최첨단 검색엔진과 GPS 등 첨단 장비도 활용한다. 수년 전 한국 정부기관 쪽 사람이 북조선 스파이를 찾아달라며 휴대전화 도청을 의뢰한 적도 있었다”고 소개했다.

아자부리서치 탐정사무소가 고객의 의뢰로 작성한 조사보고서 표지

아자부리서치 탐정사무소가 고객의 의뢰로 작성한 조사보고서 표지

2007년 법제화 이후 달라진 점은.
“의뢰·조사·결과 제공 등의 모든 단계가 합법적인 방법으로 진행된다. 법 위반 시 영업정지 처분 등의 제재를 받기 때문이다. 합법적 테두리 안에서 영업하기 때문에 정당성이 확보되고 신뢰도가 높다. 공권력이 해결하지 못하는 일을 대신 해주는 게 많다.”
사건 조사료는 어느 선에서 형성돼 있나.
“적게는 5만 엔부터 많게는 500만 엔까지 다양하다. 올해 3월 도쿄 번화가인 긴자의 한 빌딩을 20억 엔(약 200억원)에 매매하는 거래가 있었다. 이 거래를 맡은 부동산 회사가 매도자가 실소유주인지, 가압류나 부채는 없는지 등 사기성 여부를 확인해 달라고 의뢰해 왔다. 여러 방면으로 조사해 실소유주임을 확인하는 보고서를 제공했고, 안심 거래가 이뤄졌다. 그 건으로 30만 엔을 받았다. 탐정사무소마다 마케팅 능력과 조사 실력, 명성에 따라 조사료는 천차만별이다.” 

아자부탐정사무소의 우치다 코지(46) 조사부장이 조사차 현장에 간다고 해서 따라 나섰다. 40세의 초혼 여성이 50세 재혼남과 결혼하려고 하는데 실제 이혼했는지 의심이 가니 조사해 달라는 거란다. 코지 부장은 문제의 남성이 가끔 오간다는 맨션으로 가서 전처가 왕래하는지를 지켜보다 동영상으로 현장을 촬영했다. 그는 “12월 초에 의뢰를 받아 1주일간 조사 후 1차 보고서를 냈더니 추가 조사를 원해 10일 일정으로 동향을 파악 중”이라며 “곧바로 여기서 1시간 30분 거리의 하치오지(八王子)로 이동해 11시까지 잠복근무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코지 부장은 “대개 2인 1조로 움직이며 큰 사건은 하청업체와 팀을 짜서 수행한다. 탐정 일이 재미 있어 20년전 아자부리서치에 입사, 일을 배우며 회사와 함께 성장했다. 연봉도 중산층 수준이라 직업으로 만족스럽다”고 말했다.

도쿄의 한 지하철역에 걸린 탐정사무소 선전 광고

도쿄의 한 지하철역에 걸린 탐정사무소 선전 광고

일본엔 탐정을 양성하는 ‘탐정학교’도 많았다. 1주일 과정에서부터 1년 과정까지 다양했다. 신주쿠에서 42년째 종합 탐정사인 ‘오하라 조사사무소’를 운영하며 ‘명탐정’ 호칭을 들어 온 오부나이 요시오(小船井芳夫·66) 전 민조협 전무이사도 탐정학교를 갖고 있다. 21일 민조협 사무실에서 만난 요시오는 "'조사는 정(情), 진실의 탐구'가 우리 사무소의 슬로건"이라며 “우리는 50시간 이수 과정으로 운영하는데 탐정의 기술뿐 아니라 상식과 인간성을 기르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가장 기억에 남는 사건으로 불륜으로 태어난 딸 하루코(春子)의 의뢰로 자신을 고아원에 버리고 간 어머니를 찾아준 것을 꼽았다. 그 어머니가 1년에 1번씩 아이를 버린 날마다 고아원에 전화를 걸어 아이의 안부를 물었던 것을 단서로 해서다. 조사 착수의 전제는 복수가 아닌 용서 서약이었다고 한다. 수개월에 걸친 하리코미(잠복근무)와 주변 탐문조사 끝에 어머니를 찾았고 호스테스를 하다가 임신한 하루코가 아이를 낳자 같이 키우며 살고 있다는 것이다. 요시오씨는 "가끔씩 그 사건 생각에 혼자 술잔을 기울이면서 이런 독백을 하곤 한다. '사람은 정으로 흩날리고, 정에 의해 사람이 춤춘다'라고." 말했다. 오하라 조사사무소의 탐정 직원 6명은 전직 경찰관, 공안부 내각 조사실 조사관, 추리소설 작가, 범죄 심리관 등의 베테랑으로 짜여졌다. 때때로 공조하거나 하청을 주는 네트워크망엔 변호사 20명이 포진하고 있다고 했다.

요시오는 "탐정의 자산은 폭넓은 인적 교류와 네트워크"라며 "형사는 범법자를 처벌하지만 탐정은 의뢰인의 억울함을 풀어준다는 점에서 보람이 있는 직업"이라고 말했다.

어떤 탐정이 명탐정이냐고 묻자 그는 "추리소설의 고전인 '팔묘촌'(요코미조 세이시 작)에 등장하는 긴다이치 코스케 같은 국민 명탐정은 소설속에나 있다. 현실의 명탐정은 살인사건, 미제사건을 척척 해결해 내는 초인이 아니라 의뢰인의 요구를 제대로 파악한뒤 성심성의껏 일해 숙제를 해결하는 특수한 직장인이라고 보면 맞을 것"이라고 말했다.

법무법인 누리의 김성도 조사관리팀 실장은 "탐정은 인생을 들여다보는 직업"이라며 "그에 걸맞는 합법적 공간을 만들어줘야 할 때가 됐다"고 말했다. 그는 "2015년말 인터넷 보급률이 95.3%에 달하지만 흥신소나 심부름센터는 정보를 수집하고 분석할 기술이 없다는 게 문제"라며 "이 시대의 탐정은 인터넷에 공개된 정보의 파일 조각을 집대성해 원하는 결과를 도출한다는 점에서 '디지털 용병'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도쿄에서>

조강수 논설위원

※기사 작성과 통역에 장상인 JSI파트너스 대표(중앙SUNDAY 칼럼니스트)가 참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