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쓸신세] 英 빨간 여권-파란 여권 논란…색깔의 비밀

중앙일보

입력 2017.12.26 06:00

업데이트 2017.12.26 14:37

영국 정부가 브렉시트(Brexit·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 이후 여권 색깔을 바꾸기로 결정했습니다.
현재 진홍색인 여권 겉표지를 진청색으로 되돌리기로 한 겁니다. 1988년 진홍색 여권을 도입한 지 30년 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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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여권 색깔은 4가지 뿐일까?

당시 영국은 거의 100년간 사용하던 여권 색깔을 자발적으로 교체했습니다.
EU의 전신인 유럽경제공동체(ECC) 국가들이 여권에 주로 사용하는 색깔이 붉은색이었는데, 영국도 그 일원으로써 화합을 다지는 뜻에서 스스로 결정을 내린 거였죠.
공동체의 유대 강화를 위해 색깔을 변경했으니, 공동체에서 떨어져 나가기로 한 이상 원래 색으로 돌아가는 것이 자연스러워 보이기도 합니다.

1988년 여권 색깔을 바꾸기 이전의 영국 여권(왼쪽)과 현재의 영국 여권. [위키피디아]

1988년 여권 색깔을 바꾸기 이전의 영국 여권(왼쪽)과 현재의 영국 여권. [위키피디아]

영국 “독립·주권 회복 위해 여권도 바꿔!“

실제 테리사 메이 총리는 22일(현지시간) 여권 표지를 진청색으로 바꾼다고 발표하면서 “자랑스러운 시민권을 상징하는 독립과 주권의 표현”이라고 밝혔습니다.
영국 정부는 2019년 10월부터 신규 여권을 발행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문제는 영국 내에서 여권 색깔 변경을 두고 의견이 분분하다는 건데요, “진정한 독립의 상징”이라는 찬성과 “쓸데없는 예산 낭비”라는 반대가 공방 중입니다.
출입국에 문제만 없으면 그만이지, 대체 여권 색깔이 무슨 상관일까 싶지만 그렇지 않은가 봅니다.

그러고 보니 아무 색깔이나 여권 표지에 사용하는 것 같지도 않네요. 노란색 여권은 본 기억이 없으니 말입니다.
그렇다면 여권 색깔에도 나름의 이유가 분명 있다는 것이겠죠.

색깔 별로 구분한 각국의 여권 표지. [패스포트 인덱스 캡처]

색깔 별로 구분한 각국의 여권 표지. [패스포트 인덱스 캡처]

여권 표지는 붉은색·녹색·푸른색·검은색만?

매년 ‘패스포트 인덱스(Passport Index)’를 발표하는 글로벌 금융자문회사 아톤 캐피털에 따르면 일반적으로 여권에는 네 가지 색이 사용됩니다.
붉은색·녹색·푸른색·검은색입니다. 명도와 채도 등 차이는 조금씩 있지만 4색이라는 큰 틀을 벗어나지는 않는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지정학적으로 같은 카테고리에 묶인 국가들은 여권 색깔로 통일성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이를테면 EU 회원국들은 붉은색을 여권 겉표지에 사용합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1988년 영국이 여권을 교체한 것도 EU의 통일성을 따르기 위한 것이었고요.

그렇다고 EU 규정에 회원국 여권 색깔과 관련한 내용이 있는 건 아닙니다. 2013년 EU에 가입한 크로아티아는 여전히 검정에 가까운 짙은 푸른색 여권을 사용 중입니다.

EU 28개 회원국의 여권 표지. 크로아티아(윗줄 오른쪽에서 6번째)를 제외한 나머지 국가들은 전부 붉은색 계통의 표지를 사용한다. [패스포트 인덱스 캡처]

EU 28개 회원국의 여권 표지. 크로아티아(윗줄 오른쪽에서 6번째)를 제외한 나머지 국가들은 전부 붉은색 계통의 표지를 사용한다. [패스포트 인덱스 캡처]

2010년 도입된 터키의 여권.

2010년 도입된 터키의 여권.

크로아티아라는 예외가 있기는 하지만, 메이 총리가 붉은색 여권을 폐지하는 것에 ‘독립과 주권’이라는 의미를 부여할 만한 거죠.
반면 터키가 2010년 붉은색 여권을 도입한 데엔 “EU 가입을 염원하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붙고요.

한편 카리브해 국가들은 다 같이 푸른색 여권을 사용합니다.

지정학적 특성과 신념을 여권 색으로 표현

아톤 캐피털 측은 “특정 색을 사용하는 데엔 다 이유가 있다”며 해석을 내놓는데요,
새로움과 희망을 상징하는 푸른색은 보통 ‘신세계’ 국가들이 사용합니다. 북아메리카·오세아니아와 같은 신대륙에 있는 국가들이죠.

사우디아라비아의 여권.

사우디아라비아의 여권.

국가의 신념을 상징하는 색이 여권 표지에 사용되기도 합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녹색이 그 경우입니다. 사우디는 국기 색깔도 녹색인데요, 종교적 배경이 있습니다.
녹색은 ‘이슬람의 색’이라고 불립니다. 녹색을 가장 좋아했던 예언자 무함마드는 정복 전쟁에 나설 때마다 녹색 깃발을 들었습니다.
또 척박한 사막에서 살아가는 그들에게 녹색은 자연과 생명이 숨 쉬는 신의 땅을 상징하기도 했고요.

여권 색깔이 제한적인 데엔 현실적인 이유도 있습니다.
전 세계에서 통용되는 신분증이니만큼, 여권에 보안 기능을 필수입니다. 아무 종이나 사용할 수 없고, 제작하는 회사도 전 세계에 몇 없습니다.
각종 까다로운 조건을 만족하게 하려다 보니 색깔에도 제한이 생길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움직이는 그림 등 개성 있는 여권도

그러나 최근 들어선 여권의 세계에도 다양성이 도입되기 시작했는데요,
핀란드의 경우 2012년 도입한 새 여권에 개성을 입혔습니다. 겉모습은 특별할 것이 없는 핀란드 여권은 펼쳤을 때 특별해집니다.
페이지마다 사슴의 일종인 무스를 그려 넣었는데, 페이지를 빨리 넘길 경우 이 무스가 달리는 것처럼 보이는 거죠.

캐나다의 임시 여권.

캐나다의 임시 여권.

자외선을 이용해 여권에 ‘작품’을 그려 넣은 국가도 있습니다. 캐나다·미국·중국 등의 여권인데요, 자외선에 비췄을 때 숨겨진 그림이 보이도록 했습니다.

아예 남다른 색깔을 사용한 여권도 있습니다.
캐나다의 임시 여권은 하얀 표지를 갖고 있고요, 내년 도입될 예정인 노르웨이의 여권도 색다른 색깔을 선보일 예정입니다.

노르웨이, 2018년 새 여권에 파격 디자인 

특히 노르웨이의 새 여권은 등장과 동시에 가장 파격적인 여권일 될 것이 분명해 보입니다.

노르웨이의 자연환경을 단순화한 노르웨이 새 여권의 속지 디자인.

노르웨이의 자연환경을 단순화한 노르웨이 새 여권의 속지 디자인.

노르웨이 여권을 자외선에 비추면 야경을 보는 듯한 그림이 펼쳐진다.

노르웨이 여권을 자외선에 비추면 야경을 보는 듯한 그림이 펼쳐진다.

2014년 공모전에서 당선된 노르웨이 새 여권 디자인. 기존에 여권에 사용하지 않던 색깔을 사용했다.

2014년 공모전에서 당선된 노르웨이 새 여권 디자인. 기존에 여권에 사용하지 않던 색깔을 사용했다.

디자인 선진국답게 노르웨이는 2014년 새 여권 디자인을 공모했는데요, 그 결과 오슬로에 있는 노이에 디자인 스튜디오의 응모작이 당선됐습니다.
여권 속지엔 노르웨이의 자연환경을 단순하게 묘사한 그림을 그렸고요, 자외선에 비췄을 땐 마치 야경을 보는 듯한 아름다운 ‘산수화’가 나타나도록 했습니다.

표지 색깔도 눈에 확 띕니다. 흰색·청록빛·주황빛 표지의 여권을 각각 이민자 여권, 외교 여권, 일반 여권으로 사용토록 했습니다.
청록·주황빛이 각각 푸른색·붉은색 범주에 든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확실히 기존의 무거운 색감과는 다른 발랄한 색감입니다.
홍주희 기자 hongh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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