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서소문 포럼

우리는 중국에 길들여지고 있는 건지 모른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4면

이상렬 기자 중앙일보 수석논설위원
이상렬 국제부장

이상렬 국제부장

대통령과 정부의 상식이 자신들의 상식과 어긋날 때 국민들은 실망하고 분노한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한·일 합의가 그랬다. 정부는 어쩌자고 피해당사자인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얘기에 귀 기울이지 않고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으로 해결될 것을 확인’해 줬던 것일까. 피해 할머니들의 명예회복은 어떻게 하고, 한(恨)은 어떻게 풀라고.

국제 규범 벗어난 사드 보복, 사과 받아냈어야 #피해 입은 국민보다 중국 더 믿는 우리 정부

문재인 정부는 박근혜 정권의 숱한 비상식적 행태에 대한 국민적 분노 위에서 탄생했다. 그런데 정부의 외교에서는 국민이 납득할 수 없는 일이 자주 벌어진다. 문 대통령의 방중이 단적인 예다. 국빈으로 중국을 찾은 대통령이 10끼 식사 중 8끼를 중국 측 고위 인사 없이 먹었다는 ‘혼밥’ 논란은 우리 국민들의 상식으로선 이해하기 힘들다.

문 대통령은 중국 엘리트의 산실인 베이징대 강연에서 중국을 “높은 산봉우리”라고 비유하고, 한국은 “작은 나라”라고 지칭했다. 외국에 나간 대통령이 우리나라를 ‘작은 나라’라고 부르는 것은 국민들이 받아들일 수 없는 표현이다. 그 대목은 의도와 관계없이 ‘사대(事大)’ 논란을 초래한다.

지난 4월 플로리다의 미·중 정상회담에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한국은 사실 중국의 일부였다”고 말했다고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소개한 적이 있다. 그 대화는 우리 국민들의 자존감에 상처를 입혔다. 그때 시 주석에게 잘못된 역사 강의를 들은 트럼프 대통령은 문 대통령의 베이징대 강연을 어떻게 봤을까.

나는 이번에 문재인 정부가 중국으로부터 고고도미사일방어(THAAD·사드) 체계 보복에 대한 사과와 재발 방지 약속을 꼭 받았어야 한다고 본다. 겉으론 개방과 자유무역을 외치면서 속으론 특정국을 상대로 관광·여행을 금지하는 것은 세계가 합심해 만들어 온 글로벌 규범을 어긴 것이다. 한반도에 배치되는 사드 레이더 망이 중국 내륙을 탐지한다고 억지를 부리는 중국보다 사드 보복의 부당성을 지적하고 재발 방지를 요구하는 우리가 훨씬 명분 있다. 그러나 우리 정부는 중국으로부터 변변한 사과 한마디 듣지 못한 채 넘어가고 있다. 중국은 글로벌 질서를 위반하고도 버젓이 면죄부를 얻은 셈이다.

잘못을 잘못이라고 인식하지 않으면 되풀이하기 십상이다. 우려는 현실이 됐다. 중국 당국은 19일부터 한국 단체관광을 다시 봉쇄했다. 사드 보복이 풀리기만을 기대하고 수개월을 가슴 졸이며 준비했던 국내 여행업계는 순식간에 날벼락을 맞은 꼴이 됐다. 한·중 정상이 “교류 협력을 더욱 적극 추진해 나가자”고 합의한 지 닷새 만이다. 그러나 중국은 “사실이 아니다”(중국 외교부 대변인)고 잡아뗀다.

더 가관인 것은 우리 정부다. 외교부는 “상황 파악 중”이라고 둘러댔다. 청와대는 한술 더 떴다. 핵심 인사는 “중국 당국이 한국행 단체관광을 중단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중국 외교부 대변인도 사실 관계 확인을 하지 않았느냐”고 말했다. 그렇다면 단체 여행 재중단 통보를 받고 망연자실한 여행업계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말인가. 우리 국민보다 중국 외교부 말을 더 믿는 정부는 어느 나라 정부인가.

청와대가 그토록 철썩같이 믿는 중국 외교부는 지난 3월 한국행 단체 여행을 전면 금지할 때도 이번과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그때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관련 상황을 들어본 적 없다”고 했고, “아무 근거 없이 함부로 의심하지 말라”고 딴청을 피웠다.

사실 국민들이 대통령과 정부에 바라는 것은 아주 상식적인 것이다. 외교에서도 그렇다. 당당하게 국민을 대변하고, 국익을 지켜 달라는 것이다. 중국은 오랜 세월 주변국을 길들이는 데 능했다. 때로는 위협도 불사했다. 중국은 이번 사드 보복을 통해 그 ‘실력’이 녹슬지 않았음을 입증했다. 제대로 항의 한번 못 하고 부당한 보복을 바로잡으려는 결기도 보여 주지 못하고 물러서는 사이, 우리는 중국에 길들여지고 있는 건지 모른다.

이상렬 국제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