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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로우·펜바탕체 … 태어나줘서 고마워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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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3호 14면

디자이너 아드리안 프루티거는 폰트를 점심에 쓴 숟가락에 비유했다. “숟가락의 생김새가 기억난다면 뭔가 불편했다는 뜻이니, 기억나지 않아야 기능을 잘 한 것이다”라고.

유지원의 글자 풍경: #2017년의 한글 글자체들

폰트 디자인에서는 바로 이 점이 어렵다. 실험적이고 독특한 폰트도 제 역할이 있긴 하지만, 기능적이고 범용성 높은 폰트야말로 개발이 까다롭다. 긴 글을 불편없이 읽도록 하려면 눈에 거슬리거나 두드러지는 형태를 삼가야 한다. 디자인인데 눈에 띄지 않아야 하는 아이러니. 기본형 폰트들은 최선을 다해 기억나지 않아야 하는 묵묵한 존재들이다.

류양희의 ‘윌로우’

류양희 디자이너의 ‘윌로우(Willow)’. 한글·로마자·그리스 문자를 한 디자이너가 서로 어울리게 만든 다국어 글자체다.

류양희 디자이너의 ‘윌로우(Willow)’. 한글·로마자·그리스 문자를 한 디자이너가 서로 어울리게 만든 다국어 글자체다.

도쿄의 한 오므라이스 전문 음식점에서였다. 묵직한 무게감을 가진 날렵하고 아름다운 숟가락을 만났다. 오므라이스가 한 입 크기로 깨끗이 떠졌고, 접시에서 입에 이르는 짧은 여행 동안 손과 눈과 입을 모두 즐겁게 해주는 숟가락이었다. 그 숟가락만은 두고두고 기억이 난다.

류양희의 폰트들을 바라보거나 읽으면 그 숟가락이 떠오른다. 절제되고 논리가 차분하며 기능에 충실하지만, 단아한 형태가 분출하는 가릴 수 없는 아름다움이 결국 시선을 사로잡는다.

‘고운한글’, ‘아리따부리’ 등으로 이미 한글 글자체 디자이너로서의 저력을 입증한 류양희는 최근 영국에서 한글 · 로마자 · 그리스 문자가 조화로운 글자 가족으로 공존하는 ‘윌로우’를 선보였다. 다국어 글자체답게 글자 가족의 구성에 여러 면밀한 장치들이 있지만, 그중 특히 로마자의 이탤릭체에 한글의 흘림체를 대응시킨 점을 주목할 만하다.

한글의 국제적 출시를 꿈꾸는 이 글자체의 가칭은 ‘윌로우(Willow)’다. 류양희의 성씨는 ‘버들 류(柳)’이다. ‘나무 목(木)’의 단단함과, 버드나무 이파리가 하늘하늘 흘러내리는 듯한 ‘토끼 묘(卯)’의 유연함이 공존하는 글자. 윌로우체가 딱 그런 성격을 가졌다. 타이포그래피적으로는 나무 판각 글자의 견고함과 붓의 부드러움을 겸비한 특성이 버드나무를 연상시킨다. ‘윌로우’라는 가칭에는 ‘버드나무’에서 온 원천적인 영감을 유지하면서도, ‘버들’ 혹은 ‘버드나무’라는 이름을 가진 기존의 다른 한글 폰트를 기꺼이 존중하고자 한 디자이너의 배려도 담겨있다.

양장점의 ‘펜시리즈’ 중 ‘펜바탕’

디자이너 듀오 양장점의 ‘펜시리즈’

디자이너 듀오 양장점의 ‘펜시리즈’

2017년에는 개인 글자체 디자이너들의 약진이 두드러진다. 양장점은 ‘양’희재와 ‘장’수영이 의기투합한 디자인 듀오다. 양장점은 서예 아닌 오늘날 일상 속 필기도구의 특성을 반영한 ‘펜시리즈’를 디자인하고 있다. 그중 볼펜을 사용한 ‘펜바탕 레귤러’가 먼저 진행 중이다. 꾹꾹 눌러쓴 미세한 필압의 표현과 획의 끝에 살짝 맺힌 볼펜똥이 친근하다.

한글 폰트 한 세트를 완성하려면 많게는 1만 자가 넘고 적게도 수천 자에 이르는 글자들을 일일이 디자인한다. 하지만 이런 노고에 대한 보상이 제대로 주어지지 않기에, 폰트 회사에서는 막대한 노동량과 최소 한도로 필요한 작업 시간에 비해 터무니 없는 단가와 급박한 마감에 시달린다. 이것은 한글 폰트의 불가피한 품질 저하로 이어진다.

개인 디자이너들은 이런 압박과 제약을 벗어나 깊이 있는 연구와 장인적인 완성도를 추구한다. 다만 몇몇 후원만으로는 폰트 작업으로 생업이 유지되지 않아 폰트 디자인에만 집중하기 어렵기에 부득이 완성에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

‘초특태고딕’과 ‘본명조’

AG타이포그라피연구소의 ‘초특태고딕’과 다른 고딕체들의 공간 분배 비교

AG타이포그라피연구소의 ‘초특태고딕’과 다른 고딕체들의 공간 분배 비교

‘본명조’와 1990년대 이후 2017년까지 명조체의 흐름 비교

‘본명조’와 1990년대 이후 2017년까지 명조체의 흐름 비교

연구소와 회사들도 가만 있었던 건 아니다. AG타이포그라피연구소의 폰트 중에는 ‘초특태고딕’이 돋보인다.
볼드체 디자인은 어렵다. 굵고 무거울수록 더 어렵다. 한글 볼드체는 정말 어렵다. 로마자는 한 글자의 획수가 많아봐야 서너 개에 불과해서 대담한 디자인이 가능하다. 한자는 한글보다 획수가 훨씬 많지만 적당히 생략하고 변형해도 알아볼 수 있다. 한글은 획수도 많은데다가 점 하나만 달리 찍어도 글자의 뜻이 완전히 달라지기에 디자인적인 자유도가 낮다.

한정된 네모 칸 공간에 많은 획이 균형 있게 가득 차면서 최대한의 무게감을 실으려면 어떻게 할까? 이 어려운 문제에 도전한 폰트가 초특태고딕이다. 그 솔루션으로, 네모 칸 한 글자 공간 속 획의 비례를 과감하게 처리했다. 다른 무거운 한글 고딕과 비교할 때, 쌍비읍의 세로획에 비해 중성의 세로획은 두 배나 굵어 차이가 크다. 그럼으로써 초성과 중성이 서로 뭉치지 않고 고른 공간을 차지하게 했다. 획의 끝은 날렵하게 마무리해서, 묵직하되 둔중하지 않도록 했다.

한편, 본명조는 구글이 개발을 의뢰하고, 어도비가 기획을 총괄한 다국어 프로젝트의 일환이다. 산돌커뮤니케이션이 한글 디자인을 담당했다. 다른 명조체들과 비교하면 변화의 흐름이 한눈에 보인다. 본명조는 다른 명조들보다 같은 크기에서 커 보이고, 공간 분배가 고르며 획이 튼튼하고 단순하다. 글자가 눈에 쏙쏙 잘 들어온다.

본명조의 이런 특성은 인터넷 화면이라는 기술 환경에 최적화됐다. 글자는 기술 환경에 반응하며 진화한다. 시각적 말투로서 시대의 취향에도 부응한다. 폰트가 시대에 맞게 갱신되어야 하는 이유다. 그렇다고 예전 명조체들이 소용없어지는 건 아니다. 본명조가 정보전달에 유리하다면, 고아한 SM신신명조는 문학작품에 여전히 더 적합하다.

이쯤 되면 이런 질문이 나올 법도 하다. “그런 디테일까지 누가 알아봐요?”

미묘한 차이를 언어화하는 것은 전문가이지만, 어떤 글자체가 더 좋고 나쁜지는 누구나 어렴풋이 알아본다. 심지어 의식이 감지하지 못해도, 신체가 편안함을 느끼기도 한다. 전문가란 이렇게 사용자들이 스스로도 모르던 피로를 살피고 치유하는 사람들이다. 그렇게 전체 사회의 감각을 건강하게 회복시킨다.

점심때 쓴 숟가락의 숙명을 가진 폰트들. 하지만 어디 폰트 뿐일까? 사회에는 각고의 노력을 들여야 겨우 아무 일 없는 듯 보이는 영역이 도처에 있다. 그 묵묵한 작동을 멈추면 문제가 생기고 탈이 난다.

이렇게 사회를 원활히 가동시키는 모든 노고에 이름을 붙여 불러드리고 싶다. 그 모든 이름들을 대신해서 내가 잘 아는 몇몇 이름을 불러본다. 윌로우, 펜바탕, 초특태고딕, 본명조. 그리고 미처 다 언급하지 못한 노은유의 옵티크나 다른 한글 글자체들의 이름도 불러본다. 고맙습니다. 2017년,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태어나주어서. 2018년에도 우리의 일상에 드러날 듯 말듯 스며서 작동해주세요. 꿋꿋하게!

유지원
타이포그래피 연구자·저술가·교육자·그래픽 디자이너. 전 세계 글자들, 그리고 글자의 형상 뒤로 아른거리는 사람과 자연의 이야기를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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