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들을 위한 건배사 비법

매년 12월만 되면 검색량이 치솟는 단어가 있다. ‘건배사’다. 검색빈도를 측정하는 분석도구인 구글트렌드에 따르면 건배사의 검색지수는 지난주(12월 17~23일) 100을 기록했다. 구글트렌드는 일정 기간 특정 단어의 검색 횟수가 가장 많았을 때를 100으로 정하고 나머지 기간 검색량을 상대적 수치로 보여준다. 즉 지난 한 주 동안 건배사를 검색한 건수가 최근 1년 중 제일 많았단 얘기다. 연말 송년회가 이어지면서 건배사 마련에 어려움을 느끼는 직장인이 그만큼 많다고 볼 수 있는 대목이다.
건배사 고충 토로 직장인 많아 #미리 연습해 준비해야 나아져 #메시지에 스토리 입히는 게 중요 #철 지난 유행어, 자기 과시 피해야

김민경 원장
중앙SUNDAY는 건배사가 두려운 직장인들을 위해 김민경(42) 아트스피치 원장을 지난 21일 서울 연남동 사무실에서 만나 조언을 구했다. 김 원장은 10여 년간 수백 곳의 기업에 스피치 비법을 강의해 왔으며 지인들 사이에선 ‘건달(건배사의 달인)’로 통하는 커뮤니케이션 전문가다. ‘스타강사’로 잘 알려진 김미경씨의 제자이기도 하다. 건배사 비법을 묻는 질문에 그는 “즉석 건배사를 즉석에서 하려고 하면 안 된다”고 말했다.
- 건배사에 어려움을 느끼는 직장인이 많다.
- “요즘 저한테도 문자메시지로 긴급 구조 요청이 많이 들어온다. 지금 어떤 사람들이랑 있는 자리인데 건배사를 해야 한다며 도와달라는 요청이다. 그만큼 건배사 할 자리도 많고 이를 어려워하는 이들도 많은 것 같다.”
- 어떻게 해야 잘할 수 있나.
- “노래를 아무리 못하는 음치라도 이른바 ‘18번’ 한 곡 정도는 그나마 앞에 나가 부를 수 있을 정도로는 한다. 자기 스타일에 맞는 노래를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찾았고 반복해서 부른 덕분이다. 건배사도 마찬가지다. 사람들 앞에서 말하는게 불편하고 어려운 것은 당연하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불쑥 건배사를 하게 될 경우 암담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 미리 준비하고 연습해야 한다. 즉석 건배사를 즉석에서 잘할 순 없다. 미리 준비한 다음 즉석에서 하는 것처럼 상황에 맞게 응용한다면 잘할 수 있다.”
- 어떻게 준비해야 하나.
- “일단 한 단어부터 생각해라.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가 출발점이다.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 상황에 맞는 메시지가 뭔지 파악해야 한다. 감사, 응원, 위로 등 단어를 떠올리면 좋다. 거기에 이야기를 입히면 된다. 자기 경험담이 될 수도 있고 시나 명언을 인용할 수도 있다. 메시지를 풍성하게 하는 역할이다. 마지막으로 쇼맨십이 필요하다. 쭈뼛쭈뼛하면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는다. 의도적으로 목소리를 크게 내야 한다.”
- 구체적으로 설명해 달라.
- “중요한 프로젝트에 입찰했으나 떨어진 다음 회식에서 건배사를 하게 된 상황을 가정해 보자. ‘죽을 죄를 지었다’는 식으로 건배사를 하면 분위기 망치지 않나. 그럴 경우 자기 상황과 참석자들이 공유한 경험을 연관 지어 건배사를 하는 게 좋다. 20~30대면 일을 배우는 단계니까 배움이라는 키워드를 활용해 보자. 예컨대 ‘이번 프로젝트는 결과적으로 아쉽게 됐습니다. 그런데 제게는 참 감사한 프로젝트였습니다. 훌륭한 선배들로부터 하나하나 배울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프로젝트를 통해 실패가 아닌 감사를 배웠습니다. 제가 여러분 감사합니다 하면 서로를 보고 고맙습니다 외쳐주시면 좋겠습니다’는 식으로 만들면 된다.”
- 더 높은 연령대라면 어떻게 하나.
- “40~50대 관리자나 최고경영자라면 책임지는 자리니까 책임이라는 키워드로 만들 수 있다. ‘히딩크 감독이 대중이 난제라 부를지라도 난 도전이라 부르겠다는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이 프로젝트 시작할 때 다들 난제라 했지만 전 도전이라 생각합니다. 결과적으론 잘 안 됐지만 저흰 새로운 도전을 한 것에서 배울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 마음껏 도전하십시오. 책임은 제가 다 지겠습니다. 내일도라 말하면 도전하자로 답해주세요.’ 이런 식으로 얘기하면 회식 분위기가 훈훈해지지 않을까. 중요한 것은 내가 말하고 싶은 메시지에 스토리를 입히는 것이다.”
- 유행어 등을 활용한 건배사도 많다.
- “유행어나 3행시, 축약어를 쓴 건배사가 처음 들으면 신선하고 재밌다. 그런데 모임이 많아지는 시기엔 비슷한 유형들의 건배사가 반복되다보면 식상해진다. 또 내가 준비한 건배사를 바로 앞 사람이 하는 경우도 생길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유형의 건배사는 하는 사람의 입담과 재치에 의존하게 된다. 같은 건배사라도 남이 하면 재밌고 내가 하면 재미없을 수 있단 얘기다. ‘100모임 100건배사’를 할 수 있는 스토리 건배사를 추천하는 이유다.”
- 막상 하려면 쉽지 않을 거 같다.
- “처음엔 길게 할 필요 없다. 짧게 하더라도 힘차게 얘기하면 된다. 고작해야 10초다. 아주 짧지만 메시지와 스토리를 부여한 3~4문장을 얘기하는 데 집중하면 점차 나아질 수 있다.”
- 피해야 할 건배사는.
- “철 지난 유행어는 좌중을 맥빠지게 한다. 어느 교수님이 건배 제의를 하는데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라는 말이 있습니다’라는 멘트로 시작하는 걸 본 적이 있다. 참석자 대부분이 얼음처럼 굳더라. 유효기간이 있는 말은 조심해서 써야 한다. 또 건배사를 가장한 훈수, 자기 자랑형, 긴 연설형 건배사도 분위기를 급냉각시킨다. 마지막으로 음담패설과 성희롱 유형은 최악이다. 100명 중 99명이 웃어도 1명이 기분 나쁠 수 있는 얘기는 피해야 한다. 웃자고 한 얘기에 죽자고 덤벼드는 경우가 최근에 얼마나 많았나. 덜 웃기는 게 낫지 몇 명 더 웃기려다 패가망신할 수 있다.”
- 올해 송년회 자리에 쓸 만한 건배사가 있다면.
- “개그맨 김생민씨의 유행어 ‘스튜핏, 그레잇’을 활용해서 ‘힘들다고 처지면/ 스튜핏, 힘들어도 기운 내자/ 그레잇’ 이런 식으로 만들어볼 수 있다. 미안합니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문구를 활용한 건배사도 나는 자주 사용한다. 자기 상황을 녹여서 자연스럽게 풀어나가면 된다. ‘미안합니다’란 문구 앞에 ‘자꾸 실적 내라 다그쳐서’라는 메시지를 넣는 식이다.”
- 건배사 문화에 염증을 느끼는 이들도 있다.
- “건배사는 어느 문화권에서나 한다. 다만 우리나라에선 이를 강압적으로 하고 평가 대상으로 삼는 경우가 생겨 사람들이 더 부담을 느끼는 거 같다. 하지만 생각을 바꿔보면 평소 만나지 못하는 윗사람에게 자기 존재를 부각시킬 절호의 기회이기도 하다. 스트레스만 받지 말고 미리 준비해 기회를 활용하는 것도 방법이다.”
박민제 기자 letmein@joongang.co.kr